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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우측 탑이 국보 11호인 미륵사 6층 석탑이다. 좌측 탑은 동원에 있는 9탑 석탑이다. 출토된 석재들의 진열해 놓은 모습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문운주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공주가 나눈 사랑은 극적이다. 마를 팔던 소년이 신라에 찾아가 선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꾀를 낸다. 동요를 만들어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부르도록 한다. 꾀돌이 서동과 선화공주는 결혼에 성공한다. 불가능하지만 믿고 싶은 삼국유사 속 러브스토리다.

왕위에 오른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자 사찰을 짓고 싶다는 부인의 청을 받아들인다. 연못을 메운 후, 법당과 탑, 회랑 등을 세운다. 사찰 ´미륵사´다.

익산의 백제는 무왕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왕이 세운 미륵사와 왕궁, 왕의 무덤인 대왕릉과 소왕릉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익산 천도를 꿈꿨던 백제 30대 왕, 의자왕의 아버지이고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의 전설이다.

지난 14일, 11시 익산에 도착했다. 광주에서 1시간 3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 문화를 지척에 두고 밖으로만 돈 셈이다. 동남아나 중국, 유럽까지 한국 사람들로 넘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견문을 넓히고 우리와 다른 생활 방식을 체험해보기 위해서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부터 체험해 보면 어떨까. 
 
미륵사 모형도 맨 뒤에 보이는 산이 미륵산이다.중원의 목탑을 중심으로 석탑이 대칭으로 서 있다. ⓒ 문운주
 
미륵사는 서원, 중원, 동원으로 나누어진다.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 승방지 등 3탑 3금당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용어들이 낯설다. 금당은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고 승방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듯하다. 회랑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통로 같아 보였다.

서원의 석탑은 7층 이상의 부재가 거의 발견되지 않아 6층까지 보수하는 것으로 기본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은 백제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우아하고 장엄하고 큰 것에만 높은 점수를 주었던 자신의 무지가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

3차에 걸쳐 발굴한 유물을 보면 건축재료, 생활용품, 불교공예품 등 다양하다. 건축 재료로는 기와, 풍탁, 연봉 등이다. 기와는 연꽃무늬 수막새, 녹유 서까래, 치미... 처마 쪽 기와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마감이 깔끔하도록 하는 것이 막새기와다. 치미는 용마루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 기와다. 그 높이가 99cm나 된다고 하니 절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했다.

생활용품으로는 토기, 자기, 청동 그릇 등이다. 이 밖에 관 꾸미개, 금 족집게, 청동함 등이다. 특히 청동함에서 나온 천연 진주는 동남아 국가와의 교류 사실을 보여준다고 한다. 유리구슬은 백제에서 유리를 생산했다는 사실을 짐작게 해준다. 금동 향로 청자류 등은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까지 미륵사가 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리호 2009년 미륵사지 해체 과정에서 사리장 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 엄구에는 금제사리봉영기,사리호, 은제관식, 청동함 등 많은 유물이발견되었다. 사리호는 외호와 내호 이중으로 되어있다.ⓒ 문운주
 
사리장 엄구... 사리함은 외호와 내호 이중으로 되어 있다. 그 섬세한 공예기술에 입이 벌어진다. 함께 발견된 사리 봉영기는 백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무왕의 왕비 사택적덕의 따님이 사리를 모시고 절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뒤집고.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니 12시 30분, 일정때문에 탐방을 서두르기로 했다. 서원은 중원을 중심으로 동원과 대칭 형태다. 석탑과 금당(본당) 지. 회랑지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11호인 6층 석탑이 뎅그래하게 서있다. 훼손된 상태다. 왜 복원을 하지 않는 걸까.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석탑 보수정비 기본 원칙'을 알기 전까지는...
 
동당간 지주 불교행사 때 기를 거는 장대를 받혀 주는 역할을 한다. 뒤에 보이는 것이 9층 석탑이다.ⓒ 문운주
 
중원(중앙) 맨 앞에 보이는 것이 동당간 지주다. 불교행사 때 기를 거는 장대를 받혀 주는 역할을 한다. 서원의 석탑은 보수 정비했다. 중원에는 중문, 목탑, 금당이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회랑이 둘러싸며 중심 영역을 형성한다. 목탑은 기단의 일부만 남아 있는 정도랄까.
 
미륵사지 석탑 (서탑) 남동쪽에서 바라본 11층 석탑... 뒤에 보이는 산이 미륵산, 용화산이라고도 한다. ⓒ 문운주
 
동원도 마찬가지로 석탑, 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랑은 동승방으로 연결된다. 동원 석탑은 1992년 원래 기단 정도만 남아있던 것을 서원 석탑의 형태와 출토된 부재의 비례 등을 근거로 27.6 m의 9층 석탑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탑 형태를 그대로 갖추고 있지만 모조품(?)인 셈이다.

서원, 중원, 동원을 한 바퀴 돌다 보니 미륵사지에 대한 이해가 한결 깊어진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면 역사적인 사료나 부재가 없이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금당, 승방, 회랑 등 건물 복원은 '미륵사 복원정비 연구팀'의 고증 연구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왕이 익산 천도를 꿈꿨던 왕궁리 유적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왕궁리 유적지로 향했다. 백제로, 무왕로, 왕궁로, 미륵사지로 등 도로 표지판이 특이하다. 1400여 년 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져 했던 고대왕조 백제의 숨결이 느껴진다. 무왕은 왕권 강화 및 건재를 위해 익산 천도를 계획했다고 한다.

왕궁을 조성하고 실제 궁으로 사용한 뒤 사찰로 변화하게 된다. 정전 건물은 편평하게 고르고 금당, 강당, 승방을 조성하게 된다. 유적 발굴 과정에서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왕궁이나 사찰과 관련된 유물이었다고 한다.

수부(도장 찍은 기와), 용변을 보는 변기형 토기... 변기를 보니 궁금해진다. 어느 분이 저 변기에서 일을 보았을까. 무왕? 선화 왕비? 중국과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는 청자편도 출토되었다.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 터는 북쪽에 위치한다. 곡수로, 화장실, 담장 등이 14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신기하게 느껴졌다.
 
왕궁리 5층 석탑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 하는 과정에서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목탑이었는데 후대에 석탑으로 변화되었다.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말,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 초 등으로 보고 있다. 아직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문운주
 
유적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경사도 때문인 듯하다. 벚꽃과 잔디,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관을 위해 조성한 것 같았다. 소나무에 지주를 세워놓은 모습이 식재한 지 오래되지는 않아 보였다. 봄에는 활짝 핀 벚꽃과 5층 석탑이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움을 연출한다고 한다.

마지막 탐방지 쌍릉이다. 백제 말기 무덤이라고 하나 아직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해설사분은 대왕릉이 무왕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믿는 듯했다. 익산 천도를 계획하던 무왕릉과 미륵사 창건을 간청한 선화 왕비 전설이 완성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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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삶의 의욕을 찾습니다. 산과 환경에 대하여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