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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1100살의 백록이 살았던 1100고지
 
1100고지의 사슴동상 한라산을 상징하는 하얀 사슴인 '백록'은 1100살(?). 그럼1100고지는 백록이 살던 곳인가.ⓒ 최정선
  
제주도 겨울의 최고봉은 눈이다. 눈이 없는 겨울은 진정한 풍경이 아니다. 제주도 한라산의 눈 소식을 들었다. 지천으로 핀 제주 동백의 인증사진이 SNS를 도배할 때쯤이다.

이왕 제주여행 계획한 거, 눈 쌓인 한라산을 등반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은빛 세상의 한라산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야멸찬 계획은 뿌리째 흔들렸다. 나는 저질 체력으로 자타가 공인한다. 한라산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헬스를 했다. 하지만 운동과 담쌓은 부실한 체력이 하루아침에 뽀빠이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제주 공항에서 현지 동행인들과 합류해 한라산 등반 코스인 영실로 가는 시외버스 240번을 기다렸다. 보통 한라산 등반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로 5개 탐방로다. 돌연 한라산 탐방로 통제 소식을 접했다. 물론 시외버스 240번도 운행이 정지된 상태. 다음날도 여전히 한라산 탐방은 통제됐다. 다행스럽게 1100도로는 차량 통행이 재개됐다.
  
1100고지는 한라산 고원의 대표적인 산지습지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돼 있다. 1100고지에 가까워지니 초록빛 숲들과 나무들이 은빛으로 변했다. 목적지 부근에 다다를수록 차량 행렬이 끝없이 펼쳐졌다. 다들 눈 구경하러 온 듯하다.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걷기 시작했다.
 
1100고지휴게소는 인파로 북적였다. 휴게소 한편에 사슴 동상을 찾았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구조물이다. 이곳에는 한라산을 상징하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하나는 사슴 동상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고상돈 산악인의 동상이다. 그는 제주 출신의 산악인으로 하얀 눈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과 조우하는 동안, 그곳은 신나게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과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온통 눈이 만든 은빛 왕국이다.
 
휴게소에서 하얀 한라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한라산의 대명사는 백록담이다. 백록담 지명에서 '하얀 사슴이 목을 축이는 연못'이 연상된다. 제주도 곳곳에 있는 농가의 사슴이 울타리를 뛰쳐나간 경우를 빼곤 현재 한라산에는 사슴이 없다.

한라산의 사슴이 사라진 시기는 1910년대로 추정된다. 1928년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10월호에 1915년 무렵, 제주읍에 거주하던 '가바지마'라는 사람이 잡은 한라산의 사슴이 마지막이라고 기록돼 있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보통 지명은 그냥 무턱대고 짓지 않는다. 백록과 1100고지도 분명 그 유래가 있을 듯해 열심히 찾아봤다.
 
선경(仙經, 도교 전적)에서 "사슴이 1000살이 되면 색이 푸르고, 또 100세가 더해지면 흰색으로, 또 500세가 되면 검게 변한다"고 했다. 이 고서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면 '백록' 즉 하얀 사슴은 적어도 1100세의 나이가 된다. 그럼 1100살의 백록이 나타난 한라산의 산악지역이 1100고지인가. 상상에 맡기겠다.
 
산을 오르지 않고도 겨울의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1100고지이다. 이곳에서 편하게 눈요기를 할 수 있지만 눈과 사람이 범벅이 돼 통행로가 미끄러울 뿐 아니라,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수렁 같은 곳이 많다. 나도 안심하고 눈 속으로 들어갔다 어깨까지 눈에 파묻혀 허우적거린 적이 있다. 하얀 눈에 반해 무턱대고 걸어 들어가면 안 된다.
 
제주도 시외버스 240번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 240번으로 1100도로를 관통해 한라산둘레길, 어리목입구, 1100고지휴게소, 영실입구까지 손쉽게 갈 수 있다.ⓒ 최정선
 
[노랑] 추사 김정희가 사랑한 제주도 물마농
 
제주도에선 1월에 피는 수선화를 새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꽃으로 여긴다. 하얗고 노란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수선화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부지불식간에 핀다.
 
제주도 수선화를 문뜩 보고 싶었다. 지난해 늦은 봄에도 수선화를 찾아 제주도에 갔다. 그땐 시들어 꽃대만 남은 녀석을 보고 돌아서야 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한 아쉬움에 몸부림쳤다.

제주도에서 수선화가 먼저 피는 곳이 서남부에 있는 서귀포시 대정읍이다. 어디에 피어 있는지 찾을 필요가 없다. 길 곳곳에 피어 있다. 그래도 꼭 집어 말하면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을 비롯해 대정향교, 대정들녘, 알뜨르비행장, 산방산 근처에서 많다.
 
추사관 담장에 핀 수선화 혹독한 한파를 뚫고 1월에 핀 수선화, 도떼기시장처럼 추사관 담장 아래에 흔들리고 있다.ⓒ 최정선

1840년(헌종 6)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유독 수선화를 좋아했다. 조선 때 중국 북경에서 알뿌리를 가져와 키운 꽃이 수선화다. 한마디로 귀한 꽃이다. 제주도 대정읍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담벼락과 밭둑, 길가에 수선화가 지천이라 놀랐다고 한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건 이곳 사람들이 잡풀로 여겨 뽑아 버렸다는 점. 당시 제주도민들에게는 농사 지을 땅에 올라온 잡초와 같은 귀찮은 존재였다.
 
수선화와 조우하고자 그 첫발을 디딘 곳이 추사관이다. 지난해에 왔을 때 한 녀석만 반겼는데 오늘은 여러 녀석들이 활짝 웃고 있다. 엊그제 제주도에 눈 소식이 있어 수선화가 혹여 피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극에 달했는데... 도떼기시장처럼 담장 아래에 흔들리고 있다. 15도로 고개를 숙인 수선화 향이 코를 자극한다.
 
제주도에서는 수선화를 '몰마농'이라 부르는데 '몰'은 동물인 '말'이란 뜻이다. 그래서 '말이 먹는 마농(마늘)'이란 의미도 있지만, '크기가 크다'라는 숨은 뜻도 있다. 즉 '뿌리 크기가 큰 마늘'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수선화를 찾아 다시 송악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미리 검색한 빛바랜 사진 속의 수선화를 찾아봤지만 허탕이다. 사계리 해안도로를 천천히 돌았다. 차 안에서 눈알을 굴려 가며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설픈 조사 덕에 허탈해 혀만 끌끌 차게 된다.
 
산방산 하멜기념비의 수선화 하멜기념비까지 조성된 길에 조우한 수선화는 아직 피지 못한 채 고개숙이고 있다.ⓒ 최정선
 
산방산으로 갔다. 하멜기념비까지 조성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매섭다. 못 만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제주의 산방산을 올려보는 꿋꿋한 수선화가 보인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에 흔들림 없이 고고한 자태로 야멸차게 나를 본다.
 
그렇게 겨우내 언 땅을 꼿꼿하게 지키던 수선화도 춘삼월이 되면 노란 유채꽃에 바통을 넘겨줄 것이다. 제주도의 땅은 한라산 부근만 겨울나라이지 한겨울도 봄이다. 추사 김정희가 사랑한 만큼 대중들에게 봄꽃으로 사랑받지 못해 애석하다.
 
서쪽에서 수선화를 봤다면 동쪽은 어떨까. 성산일출봉으로 갔다. 제주도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인데 수선화가 아직 피지 않았다. 하늘만 잔뜩 찌푸려 있다.
 
[주황] 귤껍질 융단이 깔린 신천목장
 

유독 귤나무가 흔한 곳이 서귀포 일대다. 이곳은 소담스럽게 아름다운 귤 익어가는 풍경이 흔해 관광지로 인기가 있다. 예로부터 감귤이 주렁주렁 달린 제주 풍경은 유명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광인 12곳을 영주십이경(瀛洲十二景)이라 했다. 특히 성산일출, 사봉낙조, 영구춘화와 더불어 귤림추색(橘林秋色)을 12경 중 4경으로 꼽았다. 지붕이 낮은 마을의 검은 돌담에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귤 풍경은 형언할 수 없다.
 
귤껍질 융단이 깔린 신천목장 올레길 3코스에 독특한 포인트가 바로 신천목장이다. 신풍목장과도 붙어 있어 신풍신천목장으로도 불리며 때론 바다목장으로 지칭된다.ⓒ 최정선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포구를 출발점으로 걷는 올레길 3코스에 독특한 포인트가 있다. 바로 신천목장이다. 신풍목장과도 붙어 있어 신풍신천목장으로도 불리며 때론 바다목장으로 지칭된다. 감귤 껍질을 넓은 목장에서 말리는 독특한 분위기는 말 그대로 장관이다.

목장에 들어가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다. 특히 푸른 바다와 접해져 황금빛이 도는 일몰이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영화 <내 생에 봄날>, <각설탕>의 무대가 됐다.
 
이곳은 겨울에 꼭 가봐야 하는 제주도 명소다. 목장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푸른 바다, 그리고 그곳에 도드라진 주황빛 귤껍질이 융단처럼 깔려 물결친다. 겨울 제주로 여행을 계획했다면 버킷리스트에 꼭 넣길 추천한다.
 
겨울의 제철 과일이 감귤이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매력인 감귤은 조선 시대 임금에게 진상하는 과일이었다. 감귤은 껍질부터 알맹이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특히 겨울철 감기에 더없이 좋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감귤은 입맛을 돌게 하고 소화를 돕는 것은 물론 소갈증을 멎게 했다고 나와 있다. 1521년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도 제주 감귤이 보배라고 표현했다. 그 종류는 무려 아홉으로, 금귤을 시작으로 유감, 청귤, 동정귤, 당유자, 감자, 산귤, 왜귤, 황귤이 있다. 현재는 감귤이 껍질을 쉽게 깔 수 있는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황금향 등으로 발전했다.
 
감귤이 많은 서귀포의 신천목장은 평소에는 목장으로 사용되지만 겨울에는 16만㎡(5만 평)의 너른 벌판에 10만 톤의 귤껍질을 말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곳에서 말리는 귤껍질은 약용으로 쓰인다. 특히 담을 없애고 기분을 좋게 한다고 한다.

올레 3코스에 속한 신천목장으로 가까이 갈수록 진한 귤향기가 더 진해진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따라 제주도에 무심코 왔다면 이만한 횡재는 없다. 주황빛 감귤 껍질 말리는 이색적인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귤껍질이 널린 광경은 웅장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진한 귤 향기와 섞인 바닷바람은 해묵은 감정을 씻겨준다. 특히 해가 질 때면 세상이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든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너른 초지에서 귤껍질을 말리는 풍경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신풍신천바다목장의 귀한 풍경이다. 다만, 신천목장 내부 출입이 통제돼 아쉽다. 대신 바닷가와 인접한 잔디밭은 출입이 가능하다.
 
[빨강] 겨울 동백과 인생사진  
위미리 동백식물원 ‘인생샷’의 성지, 위미 동백군락지다. 지금은 제주동백수목원으로 불린다.ⓒ 최정선
동백(冬柏)은 짙은 녹색의 타원형 잎 속에서 빨간 꽃을 피운다. 나무에 핀 목화(木花)일 때도 아름답지만 땅에 떨어진 낙화(落花)일 때 그 찬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무와 땅에 핀 동백은 완벽한 타인이지만 그 아름다움의 순위를 논하기 어렵다.

겨울에 핀 제주 동백은 화려하다. 토종 동백의 자리를 외래종인 애기동백이 점령한 뒤부터다. 이 녀석은 토종 동백의 애절함과 다른 미학이 물씬 풍긴다. 이번 제주도 여행의 포인트는 눈 속의 겨울 동백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내 마음 속의 겨울 동백은 흰 눈 위에 떨어진 피 같은 꽃이다.
      
동백은 11월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곳도 있고, 해를 넘겨 3월에 꽃을 피우는 곳도 있다. 제주의 겨울을 가득 장식하고 있는 동백은 외래종인 애기동백이다. 한국 토종동백은 2월에서 3월에 볼 수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동백나무군락지가 있다. 지금은 제주동백수목원으로 명패를 갈고 입장료를 받고 있다. 개인 소유로 1977년 씨를 뿌려 40여 년간 가꿔온 위미 동백나무군락은 제주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황무지였던 땅에 동백나무를 심어 거센 바닷바람을 막았고 그 나무가 자라 황무지를 기름진 농토로 탈바꿈시켰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 동백은 나무에 핀 목화(木花)일 때도 아름답지만 땅에 떨어진 낙화(落花)일 때 그 찬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최정선

그 주위로 동백포레스트 등 외래종 동백이 화려하게 핀 군락지가 있다. 최근 몰려든 인파로 문제가 생겨 폐쇄된 상태다.

동백은 피는 모습도 설레지만, 지는 모습은 더 애절하다. 멀쩡한 꽃송이가 툭 떨어져 땅바닥에 구른다. 빨간머리 앤의 머리카락 색이 꼭 이랬을 것 같다. 꽃송이뿐만 아니라 선홍색 융단이 깔려 자발적으로 방문객들의 발에 지르밟힌다. 겨우내 피어있던 동백꽃은 봄기운이 시작될 때쯤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벌떼처럼 꽃을 찾은 사람들은 동백나무 사이로 셀카 찍기에 여념없다. 예전에는 여행을 떠나면 기념사진보다 마음으로 풍경을 담았지만 지금은 사진을 남기는데 급급한 것 같다.
 
겨울에 피는 꽃, 동백. 가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제주도 섬 곳곳에는 핏빛처럼 붉은 동백이 피어난다. 12월, 1월의 동백이 끝물 같지만 떨어진 동백은 애기동백이고, 그 뒤를 이어 홍동백이 3월까지 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제주도 순수 동백을 보고 싶다면 300년 역사를 가진 신흥리 '동백마을'로 가면 된다. 그 이외에 동백을 실컷 볼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선흘동백동산, 카멜리아힐, 휴애리 자연생활공원 등이다. 그리고 청초밭영농법인에도 동백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셀프웨딩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동백뿐만 아니라 10월에는 메밀꽃으로 유명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웨딩촬영이 한참이었다. 매끈하게 빗어 넘긴 신부의 머리가 마치 동백기름 발라 쪽 찐 모습을 닮았다. 나도 몰래 훔쳐보다 동백처럼 빨갛게 뺨이 물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생각없이 경주> 저자입니다.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3초일상의 나찾기'( https://blog.naver.com/bangel94)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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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 <생각없이 경주>, <내일도 통영섬> 저자이며 여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