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7 18:53최종 업데이트 24.04.2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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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 ⓒ 단재신채호기념관


역사학자 신채호는 서재가 아닌 감옥에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다. 일제 지배하의 뤼순감옥에서 한국 고대사를 집필하던 그는 뇌일혈로 인해 원고를 마치지 못하고 순국했다. 그가 그처럼 목숨을 기울여 책을 쓴 것은 한국 독립을 보기 위해서였다.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그는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 옥중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생을 마쳤다.

그런 신채호가 주목했던 항일 아이콘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지 3년 뒤인 1908년에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을 펴냈다. 이순신을 되살리는 것이 항일투쟁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서문에서 일본과 싸운 위인들을 열거하면서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소상하여 후인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라"고 한 뒤 "슬프다, 독서하는 제군이여! 정신을 들어 이순신전을 볼지어다"라고 촉구했다. 그런 다음, 정치가 부패하고 민심을 잃은 조선은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전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거라고 단언했다.

"비린 비는 팔도에 가득하고 악한 기운은 동해에 덮여 7, 8년 동안에 병화가 끊이지 아니하니, 이렇게 부패한 정치와 이렇게 이산된 인심에 무엇을 의뢰하여 국가를 회복하였는가? 우리 이순신의 공로를 이에 알리로다."

신채호가 이순신에게 품은 기대감. 그 기대만큼이나 조선총독부는 이순신에게 우려를 품었다. 총독부는 이순신이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화약고임을 인식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어린이>지 검열이다.

아동문학가 방정환을 중심으로 개벽사가 발행한 <어린이>는 당국의 검열로 삭제된 기사들의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기사 일부가 삭제된 경우에는 해당 부분을 ○나 ×로 표시했다. 기사 전체가 삭제된 경우에는 독자에 대한 알림 글인 사고(謝告)를 통해 삭제 사실을 드러내거나 해당 기사 제목을 목차에 표시했다.

그런 흔적들을 추적한 논문이 장정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일제강점기 아동매체의 검열 양상과 대응 전략-<어린이>지를 중심으로'다. 지난 1월 <한국아동문학연구> 제48호에 실린 이 논문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검열이 제일 공격적으로 가해졌다"며 한산대첩·명량대첩 등과 더불어 거북선에 관한 기사가 <어린이>에서 삭제된 것 등을 예시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14대 종손 이응렬

일제가 이순신을 그처럼 집중 마크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순신 후손들이 그런 속에서도 항일운동을 벌인 일은 상당히 경이적이다. 일례로, 12대 종손 이세영은 독립군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내고, 13대 종손 이종옥은 이 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들의 뒤를 이은 14대 종손 이응렬도 그랬다. 그 역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응렬은 일제 강점 4년 뒤인 1914년 10월 16일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출생했다. 28세 때인 1942년 4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붙들린 그는 군사적 지배의 본거지인 용산으로 끌려갔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에는 이 시절인 1942년 10월 17일에 찍힌 그의 사진이 실려 있다.
 

1942년 10월 17일에 찍힌 이응렬의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이응렬의 14대조는 일본군의 조선 침략을 막아냈다. 그의 14대손인 이응렬은 항일 혐의로 일본군 본거지인 용산의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가 용산에 끌려간 것은 하숙집에서 독립사상을 전파했다는 이유에서다.

용산경찰서가 1942년 4월 14일 작성한 '이응렬 신문조서(제3회)'에 따르면, 수사관이 "당신은 상피의자(相被疑者) 풍천청·영가용옥에게 내선일체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이응렬은 "그때 내선일체는 절대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라며 "그저 내선일체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응렬은 창씨개명한 두 공동피의자에게 '절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누구라도 긴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 답변했다.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반일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사관이 "어째서 내선일체가 어렵다고 말한 건가"라고 묻자, 이응렬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론했다. "제 아버지가 일본과 조선이 상호 투쟁해온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내선일체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답했다.

한국과 일본은 상호 투쟁했던 역사 때문에 일체가 되기 힘들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까지 사건에 끌어들였다. 아버지 이종옥은 전년도인 1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일정 부분을 떠넘겨도 괜찮았던 것이다.

이응렬은 자신이 독립운동을 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요 대목마다 아버지를 거론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도 '아버지가 안 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한국 역사도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진술했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잃은 사실을 계속 환기시켜 수사관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면서 자신의 비중을 낮추려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943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징역 2년이라는 형량은 일제가 그를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어느 정도 시사한다.

2년 전 5월 16일, 이 법원은 중학생들에게 독립운동 노래를 가르치고 독립운동 조직의 구축을 시도한 이제국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제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시인 윤동주에게도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동일한 형량이 선고됐다. 이응렬에게도 징역 2년이 선고된 것은 일제가 그의 잠재적 가능성을 위험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응렬은 유죄선고 10개월 전에 체포됐으므로 2년 형량 전체가 유예가 된 것은 아니다. 수사 당국을 크게 자극하지 않으며 걸핏하면 아버지를 거론하고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듯한 느낌을 풍긴 것도 집행유예선고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4대조의 항일을 가슴에 품고
 

1964년 5월 14일 자 <경향신문> 기사 "후손 - 역사의 혈맥을 찾아 (2) 충무공의 15대종손 재국군"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64년 5월 14일 자 <경향신문>의 이순신 가문 특집은 이응렬이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사실을 언급하면서 "씨는 올해 50세. 일제 때 보전을 졸업, 잠시 직장을 가졌었으나 일경(日警)에 불온사상을 가졌다 해서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8·15 때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1945년 8·15가 아닌 1943년에 집행유예를 받은 이응렬은 이 기사에서처럼 '불온사상'의 소유자였다. 일제가 말하는 불온사상은 독립사상과 사회주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도 사회주의자였다. 2016년 6월호 <월간조선> '충무공 종부가 증언하는 항일 역사'에 등장하는 이응렬의 맏며느리는 "아버님은 보성전문 시절 좌익운동을 하셨어요"라며 "마르크스·레닌 이론이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회고했다.

이응렬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점은, 그가 해방 전에는 일제의 탄압을 받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며 갱생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1949년에 이들을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어 관리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들 중 최소 5000명에서 최대 20만 명을 학살했다.

이응렬도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였다. 그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제 때보다 이승만 때가 더 위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를 지탱한 친일세력이 이승만 정권 역시 지탱해주며 한층 더 악랄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응렬은 한국전쟁 중에 일가족이 학살을 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아산군 신창면 주민인 이애기가 부역 혐의로 학살당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이애기의 친정은 염치면 백암리 덕수 이씨 집안으로 전쟁 당시 충무공 봉사손 이응렬이 사촌오빠였다. 이응렬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고 그 가족들은 좌익 활동가가 많았다. 특히 이애기의 친오빠 이명렬은 염치면분주소장으로 활동했다가 수복 후 처형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때문에 이애기의 아들 김석희는 어머니가 좌익세력과 공모하여 대한청년단원 김○○의 부 김상구를 해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대한청년단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응렬은 14대조의 항일을 가슴에 품고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서도 탄압을 받고 이승만에 의해서도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그를 감금했다가 풀어줬지만, 이승만은 그를 생명의 위험으로 몰아넣고 그의 혈족들을 살해했다. 그 같은 한을 품고 살아간 이응렬은 1993년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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