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9 07:04최종 업데이트 24.04.1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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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9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과 함께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로 세우려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경복궁 바로 옆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려 한다.

이런 시도는 해방정국하의 독립운동진영이 볼 때는 세상을 일제 패망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일이다. 독립운동가와 그 지지자들로 구성된 이 진영이 이승만에 맞선 4·19혁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돌아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2018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은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으로 송출되는 한국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파하다가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죄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른 살 때인 1944년에 석방됐다. 그가 81세 되던 해에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등과 대담한 내용이 1995년 2월 <역사비평>에 실렸다. 대담에서 그는 46세 때 경험한 1960년 4·19의 감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4·19가 터졌을 때의 그 감격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8·15를 맞던 심경으로 4·19를 맞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지요."

대담의 또 다른 참석자는 독립운동가 조봉암과 함께 활동했던 정태영 전 동양통신사 외신부 기자다. 조봉암과 함께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조봉암 연구에 매진해 1991년에 <조봉암과 진보당>을 저술한 그는 8·15를 맞는 심경으로 4·19를 맞았다는 송남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제2의 해방이지요"라고 화답했다.

4·19를 감격스럽게 맞이한 이유
 

4·19 혁명 당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현수막을 든 시위대의 모습 ⓒ 문화재청

 
이들이 4·19를 제2의 8·15, 제2의 해방으로 인식한 데는 1960년 당시의 정세가 한몫을 했다. 해방정국하의 독립운동진영이 염원했던 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4·19 직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제자인 허정 외무부 장관(4월 25일 임명)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넘긴 이승만은 5월 29일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이륙해 하와이로 도주했다. 그런 뒤인 6월 19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다음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남북 관계에 관한 허정과 아이젠하워의 획기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허정 국무총리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회담에 있어서 한국의 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깊은 갈망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통일된 독립민주 한국을 평화적 방법으로 대의정치제도하에서 달성하고 이 지역에 평화와 안전을 완전히 회복할 것을 목표로 국제연합 결의에 규정된 제(諸)원칙에 의거하여 이 비극적 분단에 평화적 종결을 초래하도록 모든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일제 지배에서 갓 벗어난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시킨 이승만 정권은 통일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있다고는 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통일의 진(進)은 군대의 진격을 의미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통일운동을 하면 조봉암처럼 되기 쉬웠다.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이유로 1958년 1월 13일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이승만 집권기에는 북진통일 이외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대역죄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것이 이승만이 쫓겨난 직후에 단번에 뒤집힌 것이다.

한국 민심을 세밀히 관찰하는 미국이 한미 공동성명을 통해 북진통일론을 공식 폐기했다. '통일된 한국을 평화적으로 달성한다', '비극적 분단의 평화적 종결을 초래한다'라며 북진통일론을 지워버렸다. 독립운동진영이 제2의 독립투쟁을 통해 없애고자 했던 한반도 냉전정책의 하나가 이승만 하야와 함께 없어진 것이다. 송남헌과 정태영이 제2의 8·15를 언급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해방과 함께 두 개의 불청객이 들어왔다. 하나는 외국군들이고 하나는 분단이다. 이 둘은 해방의 의의를 격감시켰다. 김구나 김규식 등이 제2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그로 인해 해방과 독립이 불완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불완전 상태를 지탱하며 정권을 유지하고 통일을 훼방한 것이 이승만이다. 그래서 이승만 추방은 해방과 독립의 장애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송남헌과 정태영이 4·19를 감격스럽게 맞이한 것은 그 때문이다.

4·19가 혁신계에 유리한 정치 지형 선사

민주당과 더불어 4·19의 수혜자가 된 집단은 이른바 혁신계다. 이들은 4·19 직후의 7·29 총선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의회 진출을 이뤘다. 그해 제5대 총선에서 혁신계인 사회대중당은 상원인 참의원(총 58석)에서 1석, 하원인 민의원(총 233석)에서 4석, 역시 혁신계인 한국사회당은 참의원·민의원에서 각 1석, 혁신계의 하나인 혁신동지총연맹은 참의원에서 1석을 얻었다.

혁신계는 4월혁명 직전만 해도 제도권에 기반이 없었다. 이들과 이들의 선배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중 일부가 조봉암의 진보당 운동을 통해 제도권 진출을 시도했지만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런 세력이 참의원에서 3석, 민의원에서 5석을 차지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혁신계의 승리로 볼 수도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혁신계가 참패했다고 평했다. 그해 8월 12일 자 <경향신문> '서리 맞은 혁신정당 상(上)'은 "된서리", "참패" 같은 표현을 써가며 혁신계의 선거 결과를 다루었다.

이른바 '4·19 혁신당'인 이들이 상하원 291석 중에서 8석을 차지한 것이 참패로 해석된 것은 4·19가 이들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7월 28일 자 <경향신문> '하루 앞둔 총선 전망'은 "중반전에 들어와서 혁신계의 대두가 경남북에서 하나의 유행 현상"이 됐다고 한 뒤 "혁신계는 마지막 뿜 조성에 필사적이나, 그들의 추계대로 30여 석을 얻기는 지난할 것 같다"며 "자유당계와 혁신계를 20석으로 추산"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선거 전날에는 자유당과 합쳐 20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1개월 전만 해도 단독 20석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됐다 위 대담에서 서중석 교수는 "6월 하순만 하더라도 7·29 선거에서 혁신계가 20석은 차지할 거다, 한때는 우리나라도 보수·혁신의 대결로 갈지도 모른다고 하더니만 혁신계가 참패를 했거든요"라고 회고했다.

이승만이 죽어야 독립운동의 가치 살아나
 

지난 2월 28일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린 이승만기념관 건립추진 규탄 기자회견에서 청년대학생겨레하나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월 2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송현광장을 언급했다. ⓒ 연합뉴스

 
4월 혁신당들의 돌풍은 이번 4·10 총선의 조국혁신당 돌풍보다 대단했다. 이들이 차지한 의석 수는 조국혁신당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이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혁신계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 돌풍이 가능했던 것은 독립운동진영의 계승자들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이 일거에 형성된 결과였다. 이승만이 만들어놓은, 독립운동진영에 불리하고 친일파에 유리한 정치환경이 4·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붕괴한 덕분이었다.

7·29 총선에 출마한 혁신계 후보 상당수는 김구·김규식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었다. 남북분단을 해방과 독립의 장애물로 받아들이고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 선거에 뛰어들었다. 2007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보고서>에 실린 김선미의 '4·19를 전후한 시기 통일운동의 흐름'에 이런 대목이 있다.

"7·29 총선에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도 정치권 바깥에 있던 재야 정치인과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진보당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출마하여 선거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승만이 집권할 때는 독립운동진영이 숨을 죽이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쫓겨나자 이들이 혁신계를 형성하며 제도권에 뛰어들었다. 이승만이 살면 독립운동이 죽고 이승만이 죽으면 독립운동이 살아나는 한국 현대사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로 세우고 경복궁 바로 옆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는 시도는 그래서 위험하다. 이승만이 죽어야 독립운동의 가치가 살아난다. 그래서 4·19는 제2의 8·15다. 4·19의 의의를 퇴색시키는 시도는 우리 사회를 8·15 이전으로 퇴행시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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