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5 15:30최종 업데이트 24.03.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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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책, 인물, 역사 등 국내외 다양한 사건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합니다. [편집자말]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노인만 있고 어른은 없다고들 한다. 눈 얇게 뜨고 훈계하는 꼰대는 있어도 우러러 따를 어른은 없다는 이야기다. 왜 아닐까. 그저 뉴스 헤드라인만 뜯어보아도 어른이 실종된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

전략·전술은 물론 팀 운영에 있어서까지 방관모드로 일관한 위르겐 클린스만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국을 떠났다. '해줘 리더십'이란 조롱 섞인 신조어까지 만든 끝에 졸전을 거듭하고 아시안컵에서 탈락, 위약금 수십억 원을 챙겨 제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대중을 공분케 한 무능한 지도자의 선임에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책임론까지 불거졌지만 언제나 그러했듯 유야무야 넘어갔다.


더 심각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다.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에 외압을 가했다는 의혹을 받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주 호주대사로 임명되어 출국했다. 병사는 일선에서 위험을 무릅쓰다 숨지고, 그를 그렇게 되도록 놓아둔 이들은 면피하기 급급한 나라, 심지어는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조차 방해하여 절망하게 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란 말인가.

뉴스엔 연일 의사가 환자를 저버리고, 기업인이 기업윤리를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보도된다. 정치가가 국민을, 언론이 시민을 배신하는 일도 수시로 벌어진다. 매사 전 정권 탓만 하는 권력자는 그저 무능하다 적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어른다운 어른을 본 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아득할 지경이다.

'돈도 똥과 같다'... 그 어른의 가르침
 

어른 김장하 포스터 ⓒ 시네마달

  
지난해 11월 개봉한 <어른 김장하>가 이례적 흥행을 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한다. 2만9000 여명의 관객이 들어 다큐멘터리로는 꽤나 성공한 축에 든 이 작품은 2022년 말 방영된 MBC 경남의 동명 다큐 촬영분을 재편집한 것이다. 퇴직한 기자가 김장하라는 한 인물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이 줄기를 이루는데, 하나둘씩 드러나는 그의 선업이 추적하는 이와 지켜보는 이 모두를 경이롭게 한다.

1944년생인 김장하는 한약방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가난하여 중학교밖에 마치지 못했으나 한약방 점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공부하여 열아홉 나이로 한약업사 시험에 최연소 합격한다. 1963년 한약방을 개업해 2022년 은퇴하기까지 50여 년 동안 경상남도 사천과 진주에서 일했다.

다큐가 김장하에 관심을 가진 건 일생 동안 벌인 사회환원 활동 때문이다. 그가 한 일을 간단히만 추려도 다음과 같다. ▲고등학교를 설립해 지역 명문고로 발돋움하게 한 뒤 국가에 헌납 ▲수십 년간 1000명이 훌쩍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 ▲지역 언론사를 설립해 운영비를 지원 ▲지역 문예단체 지원 ▲경상대학교 남명학관 건립 지원 ▲진주문화를 발굴하는 도서 발간 지원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문화연구소 등 지역 문화사업 지원 ▲진주문고 경영 후원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 ▲여성단체와 극단, 각종 동아리 사업 등 후원 등이다. 진주 일대에서 김장하의 손길을 받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평생 자가용을 가진 일 없고, 은퇴 뒤 아파트로 이사를 오기까지 여러모로 불편했던 작은 집에서 거주한 그다. 버는 돈은 족족 각종 사회환원 사업에 쓰였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2008년 경상국립대에서 열린 명예 문학박사 학위수여식에서 선생이 한 말이 궁금증을 일부나마 해소해 준다. 선생은 말하기를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라고 하였다. 그가 돈을 어떻게 대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선행이 알려지는 걸 극구 피했던 김장하다. 어쩌다 접촉해온 기자며 PD들이 있었으나 단호히 물리쳤다. 본인이 부각되길 꺼렸으니 선행 또한 알려지지 못하였다. 다큐를 찍으며 알게 된 이들이 개별 사연을 전하여 알게 된 것만 위에 적은 정도일 뿐, 밝혀지지 않은 게 또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다. 경상도민일보를 퇴직한 김주완 기자와 MBC경남 김현지 PD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그마저 드러나지 않았을 테다. 다큐 <어른 김장하>와 취재기인 책 <줬으면 그만이지>가 해낸 작업은 그토록 귀한 것이다.

그러나 다큐는 김장하가 해낸 업, 그 근간을 충실히 살피지는 못한다. 다큐를 보고 나면 김장하란 인물은 이례적 개인으로만 느껴진다. 수백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고도 아까워할 줄 모르는 대단한 사람으로 말이다.  

영화가 담지 못한 것, 철학과 사상

책 <줬으면 그만이지> 겉표지 ⓒ 피플파워

 
<줬으면 그만이지>는 따로 장을 나누어 영화가 굳이 담지 않은 답을 담아낸다. 바로 김장하란 인물의 철학이다. 김장하는 중학교만 겨우 마쳤으나 평생 독서를 가까이 한 다독가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은 그가 유달리 철학과 사상에 깊이 관심을 두었다고 증언한다. 그중에서도 그의 정체성을 꼽으라면 한학, 다시 말하면 유학에 있다 할 수 있겠다. 그가 설립한 명신고등학교 교명을 <대학>의 구절인 '명명덕 신민(明明德 新民)'에서 따온 것도, 이 이름을 권한 유학자 허형 선생에게 <대학>을 사사했다는 것도, 또 허형 선생이 기문을 쓴 김장하의 조부 영은 김정원 또한 지역 향교에서 직책을 맡아 일한 인물이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김장하의 유일한 인터뷰로 남아 있다는 명신고 교지 창간호 학생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선생은 인생관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 나오는 군자삼락 모두 알죠? 그중에서 제2락인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하고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요."

하늘을 우러러서도, 또 땅에 구부려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일찍이 맹자는 군자의 기쁨이라고 말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일생을 산 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선생은 평생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할아버지와 공자, 남명 조식이라 말하였다 전한다. 그중 남명은 실천적 유학자로 이름난 인물로, 곽재우와 정인홍 등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여러 제자를 배출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세상에 이로움을 더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선생은 일생에 걸쳐 실천해 온 것이다.

가치와 철학, 사상이 없이는 인간이 바로 설 수 없음을 우리는 쉬이 잊는다.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 철학과 사상 없이도 얼마든지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지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미덕 또한 단련되는 것임을 어느 날에는 깨닫게 된다. 단련되지 않은 미덕은 눈앞의 유혹과 이익 앞에서 쉽게 흩어질 테니.

가치의 붕괴, 철학의 몰락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어른이 없다는 자조는 그저 걸출한 개인의 실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의 몰락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지금은 가치가 무너진 시대다.

주변을 보라. 가치와 미덕을 따르고 닦는 이를 만나기 어렵다. 타고난 대로 살며 누리고 과시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인 양 여기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각자도생이란 말이 시대를 대변하고, 무너진 가치 대신 변치 않는 재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 족하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보자. 검소가 미덕임을 이해하는 이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한반도에선 수백 년간 왕족까지도 겉으로나마 숭상해 온 유서 깊은 이 가치가 오늘에 이르러 지지리 궁상이며 없는 이들의 자기 위안쯤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 낭비를 피하고, 재화의 보다 유익한 쓰임을 도모하며, 과시와 편익의 욕구를 경계하여 스스로를 단련하는 이 가치의 미덕은 오늘날엔 거의 돌아봐지지 않는다.

애국심은 어떠한가. 공동체가 무너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부서지는 이 가치는 '따라봐야 남는 거 없더라'는 경험칙의 산물로써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군대는 뺄 수 있으면 빼야 하고, 세금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상책, 나라 곳간에 든 도둑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그래도 애국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나약한가.

책임 또한 제값을 받지 못한다. 오로지 화려한 것이 추앙받는 세상에서 책임만큼 구태의연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란 오늘날 거의 유일한 가치라 해도 좋을 이익과 동떨어져 있는 옛 미덕으로, 삶 가운데 책임 있는 이가 제 값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도 좋다. 한국이 손꼽히는 선진국이 되는 동안 이 사회에서 가장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한 집단이라 해도 좋을 군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보면 답이 딱 나오지 않는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며 사회의 가장 험한 일에 동원되는 청춘의 현실이 곧 한국이 책임을 대하는 자세라 할 것이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어른 김장하 스틸컷 ⓒ 시네마달

  
절제, 용기, 효, 성실과 같은 미덕이 처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없는 단련을 거쳐야 겨우 제빛을 발하는 미덕들의 빈자리를 오로지 공감이며 위안 따위의 반푼어치도 안 되는 태도가 채우고 섰다. 그마저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이익이며 우월감, 과시욕, 온갖 천박하고 얄팍한 욕구들이 범람하는 세상이 아닌가.

가치상실의 저변엔 철학의 몰락이 자리한다. 세상을 사는 자세와 기준, 판단을 이루는 근간이 없으니 만사를 그때그때의 이익에 따라 결정하기 십상이다. 미덕이란 부단한 수련을 통해서야 고작 한 땀씩 단련되는 것이지만 이익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세상에선 그처럼 이문 안 남는 일에 여력을 투입할 이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이 경박한 시대는 가치며 미덕을 존중해온 지난 시대에 크게 빚지고 있다. 김장하의 이야기에서 보듯 유학이 그중 하나다. 유학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학>의 8조목은 '성심 정의 격물 치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로, 나를 닦고 세상을 공부하며 가정과 나라, 나아가 온 세상을 평안케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즉 유가의 제자를 자임하는 이라면 스스로 덕을 갈고 닦으며, 자신을 세상에 던져 모두를 이롭게 하여야 한다. 하나하나가 가치가 몰락한 각자도생의 세상에 역행하는 일이 아닌가.

지난 시대, 많은 이들이 여러 국난을 극복하고 오늘을 세운 한국을 가리켜 민족성에 특별함이 있다고들 했다. 특유의 성실과 교육을 장려하는 자세, 자식과 부모, 이웃과 국가에 대한 희생이며 책임 따위의 것, 그것이 한국의 국민성이라고들 말해왔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의 피에 녹아든 신화적 무엇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이 땅에 오래 뿌리내려온 유학의 긍정적 잔재다. 그리고 그 모두가 생명을 다하여 소멸위기에 있다.

이제 누구도 철학을, 사상을 세우지 않으며, 그리하여 옳음을 구분하고 미덕을 수양하지 않는다. 어른이 없다는 자조 뒤엔 철학을 잃어버린 시대의 단면이 자리한다. 철학도 사상도 없이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옛 철학은 가고 새것은 없는데 우리는 대체 희망을 어디서 구하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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