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7 11:49최종 업데이트 24.03.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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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이 있다.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 머리는 멍하고, 몸은 여기저기 찌뿌둥해서 뭘 해도 맘에 들지 않는 날, 이날이 딱 그랬다. 책도 들어보고, 시도 외워보고, 자주 듣던 팟캐스트나 유튜브도 열었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클래식은 지루했고, 가슴을 두드리던 록은 시끄러웠다. 

우두커니 앉아서 컴퓨터 방향키만 눌러대고 있는데, 한 동영상 제목이 귀를 파고들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

잠시 망설이다가 엔터키를 눌렀다. 지하철역을 떠올리게 하는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친 목소리. 시각 위주의 영상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내 귀로 듣는 장면은 불만은 크고도 당당했고, 장애인의 항변은 작고도 주눅 든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가 썩었다며 혀를 차는 목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염려하고 경계도 했건만, 나는 또다시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ESC 키를 누르고 말았다. 서로가 권리자이면서 피해자인데, 누가 잘못했다는 것일까? 나라가 있고, 정치가 있는데 왜 보통 국민들끼리 이렇게 얼굴을 붉히고 마음에 상처를 줘야만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났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불편한 곳이 다르면 서로의 사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장애인이란 그 이름만으로도 느껴지는 동질감이 있다. 함께해야 하는데,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응원이 될 텐데, 귀찮음을 불편함으로 포장하고, 비겁함을 현실이란 핑계로 덮어씌워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난 운이 좋은 거였어​​​​​
 

멍하니 천정 보고 혼자라서 외로운 이들에게는 따뜻한 손길 하나면 족하다. ⓒ 김미래/달리

 

이어폰을 뺏다. 홀로 앉은 도서관 장애인 열람실이 새삼 넓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천정에 박힌 등 하나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나도 장애인인데...'

그런데 난 이렇게 좋은 열람실에서 맘껏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맘만 먹으면 가고 싶은 데도 갈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 어쩌면 그들은 내가 부럽겠구나. 난 운이 좋은 거였어.'

마음속 먹구름이 몰려가면서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막걸리도 떠올랐다.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취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건 내게 내민 손길이었다. 

나는 무척 개구쟁이였다. 하루 종일 뛰놀다가 저녁나절 아이들이 하나 둘 불려 갈 때도 거의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악동 중 하나였다. 지금도 앉아서 하는 놀이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아버님의 집요한 노력에도 난 바둑을 배우지 못했고, 심심풀이 고스톱이든 친목 다지기 카드 놀이든 할 줄 아는 게 없다.

내겐 오로지 '산들공'뿐이었으니, 언제나 산놀이, 들놀이, 공놀이와 함께했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만의 흥에 취한 채 걸어서 '남의 동네 한바퀴'나 '시장 한 바퀴'를 보태곤 했다.

그런데 시력이 제 혼자 가지 않고 이런 내 놀이를 함께 데려갔다. 참 야멸차고도 얄미웠다. 거의 남겨두질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술을 마셨나 보다. 아무 술이나 마셨다.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취하고 싶어서, 아니 취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잊고 싶어서. 하지만 다행히도 술과의 밀애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내겐 기약 없이 떠난 시력을 대신할 가족도 있었고, 나를 둘러싼 좋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다시 '산들공'을 즐길 수 있었고 골목길도 함께 누볐다. 내가 보는 것과는 달랐겠지만, 또 다른 기쁨이고 희망이었다.

시력도 잃었는데 또다른 병이

그렇게 다른 삶에 적응해 나가던 내게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났다. 어쩌면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겐 꽤나 커다란 돌부리였다.

7, 8년 전쯤이던가, 콜레스테롤과 당 수치가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이미 병이 시작됐으니 약을 먹으라고 했다. 난 먹고 싶지 않았다. 질병이란 꼬리는 내 눈 하나로 족했다. 의사의 집요한 강권에도 나는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반드시 콜레스테롤과 당 수치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례적으로 고집불통인 진상 환자의 막무가내가 의사의 인내를 이겼다. 필요한 운동과 피해야 할 음식에 관해 묻는 환자의 목소리는 우쭐했고, 천천히 답하는 의사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잠겨 있었다.

단순히 약을 먹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내가 불치병 환자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못 보는 현실은 인정했지만, 희망까지 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다른 질병이 하나 더해진다면, 왠지 그 희망이 꺾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석 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희망을 꺾을 순 없었다. 도움을 받는 것보단 나 스스로 하는 게 최선이란 판단 아래, 아내를 구슬리고 협박해서 살빼기 운동을 찾아 따라 했고, 매일 매일 실내 자전거로 달렸다. 맛 좋은 음식과도 결별, 닭가슴살과 삶은 달걀 그리고 찐 양배추와 토마토를 비롯한 각종 채소가 주식이 됐다.

석 달 후, 몸무게는 8kg이 줄어들었고, 나름 체형도 보기 좋게 변했다. 흐뭇했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병원을 찾은 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당 수치는 정상으로 내려왔지만, 콜레스테롤 수치는 정말 1도 변하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고지혈 약을 처방하고, 당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속적인 운동과 식단 관리 그리고 금연과 금주를 권했다. 

담배는 이미 끊은 지 오래고, 그까짓 술도 이참에 끊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맘은 무거웠고, 의욕은 나질 않았다. 처음에는 이게 모두 하나 더해진 고지혈이란 병 때문인 줄 알았다. 

한 주, 두 주 시간이 지나고, 친구를 만나고,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에겐 술이 단순히 마시고 취하는 그런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술 없이도 모든 게 가능한 사람도 있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술 한 잔 못 하는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도 왠지 소외되는 것 같았고, 겉돌기만 했다. 친지를 만나도,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그 자리가 낯설었고, 어색했다.

급기야 술을 끊으라는 그 말이 마치 살아온 내 생을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살려고 이래야 하는지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냥 마시세요. 적당히 마시라는 소리지, 누가 끊으랍디까? 괜히 혼자 금주를 선언해 놓고는 이건 또 뭔 난리법석인지…."

금주를 포기하고 기분 좋게 타협했다. 아내의 말마따나 적당히 마시는 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에게 막걸리란

그래도 조심스러운 마음에 좋은 술과 나쁜 술로 갈라치길 시도했다. 누군가 와인이 좋은 술이라길래 공부까지 하면서 마셨다. 하지만 와인은 내가 그렇게 미칠 듯이 놓지 못하던 술이 아니었다. 선물로 받은 고급 위스키도, 코냑을 비롯한 브랜디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오로지 마시기 위한 술은,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내게 옛 추억을 전혀 살려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 막걸리를 마시는 데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막걸리를 비롯한 술을 마시면서 떠오르는 즐거운 추억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좋은 술, 나쁜 술을 따져 본 적이 없었다. 혀를 굴려서 온 입으로 맛을 느껴보라는 와인 전문가의 조언에 엉뚱하게도 얼레리 꼴레리를 떠올리는 나였고, 10만 원짜리 와인과 5천 원짜리 와인을 맛보면서도, 그냥 맛이 조금 다르다는 것밖에 모르는 나였다.

막걸리 대학이란 별명을 가진 학교에 다닐 때의 추억, 산으로 들로, 여름이면 살짝 얼린 막걸리 한 병을 배낭에 들고, 겨울이면 사발면과 곁들여서 남한산성을 누볐던 추억.
 

술자리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따뜻한 손길이고 함께라는 기쁨이다. ⓒ 김미래/달리

 
여전히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동창모임, 무작정 떠난 여행길의 사람들, 조곤조곤 이야기꽃 속 친구들, 굳이 찾아와 고기를 굽고, 굳이 찾아와 술병을 건네고, 굳이 찾아와 헛소리를 남발하는 사십년지기,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나만 빼고 별바라기에 여념 없던 그놈들, 아이 때문에 모였지만 아이들만 빠진 성당 모임, 감히 아버님 형제 자매모임에 명예 회장으로 꼽사리 껴서 받아 든 술잔, 형님들처럼, 누님처럼 반겨주던 변리사님, 아내보다 죽이 더 잘 맞는 아내의 친구들... 

이 좋은 만남엔 항상 사람과 술이 있었다. 꼭 막걸리가 아닌 때도 많았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떠올리면 이 좋은 사람과 추억이 떠오른다. 그랬다. 내게 막걸리는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었다. 이야기였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롭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솔직히 자신은 없다. 아직 나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언젠가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막걸리 한 잔을 건넬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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