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프랑스 여류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202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는다. 그녀는 미술학도 출신으로 2007년 단편 기록영화 <현장에서>로 영화와 첫 번째 인연을 맺는다. 이후 기록영화 <솔페리노>(2008)와 <집안의 그림자>(2010)를 선보인 그녀는 20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상업영화 <투 쉽스>를 연출한다.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한 <에이지 오브 패닉> (2013), 2016년 <빅토리아>의 각본과 연출을 도맡은 그녀는 마침내 2019년 <시빌>로 72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장을 받는다. (그해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에서 대상을 받는다). 그녀는 2023년 76회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다.
 
영화는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1988년 이문열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을 발표했고, 이듬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성공한다. 이문열은 소설 제목을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의 시 <유희는 끝났다 Das Spiel ist aus>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을 해부하는 영화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객석은 호기심으로 넘친다. 150분 상영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흐르지만, 청춘 관객들의 수다스러운 대화는 끊어진 지 오래다. 21세기 20년대의 고단한 청춘을 평일 오후의 영화관으로 데려왔는지, 자못 궁금하다. 더욱이 '추락'이 해부될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것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사건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눈이 하얗게 쌓인 프랑스 남부 깊은 골짜기에 외따로 있는 집에서 여류 작가 산드라가 젊은 여성 방문객과 환담하고 있다. 한낮인데 그녀의 손에는 적포도주 잔이 들려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음악 소리가 차차 높아간다. 위층 계단에서 큼지막한 개가 오르락내리락할 뿐 사위는 고요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작별한다.
 
2층에서 손님에게 이별의 인사를 보내는 산드라. 소년 하나가 개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영사기는 소년과 개의 동선을 비추며, 이윽고 그들은 집에 돌아온다. 그러다가 아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객석을 놀라게 한다. 눈 위에 사람이 누워 있고, 선혈이 낭자하다. 산드라가 아이를 안은 채 경찰에 전화한다. <추락의 해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는 유명 작가 산드라의 재판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관계를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도록 인도한다. 산드라의 남편 사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타살이라면 누가 범인인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객석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 범죄, 스릴러까지 호명되지만, 그들을 모두 합해야 이해 가능할 듯하다.
 
산드라와 사무엘 (1)
 
도이칠란트 출신 여성 산드라와 프랑스 남성 사무엘은 런던에서 만나 서로가 첫눈에 반해 결혼한 사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제삼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공감과 상호이해다. 사무엘은 산드라처럼 글쓰기와 대학 출강으로 삶을 지탱하지만, 글쓰기에 더 많은 관심과 역량을 투입한다. 하지만 그는 산드라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다.
 
산드라는 프랑스도 도이칠란트도 아닌 제삼지대 런던에서 살고자 하지만, 남편의 소망에 따라 프랑스 오지에서 집필을 지속한다. 그들은 각자에게 허여된 시공간 안에서 개인적인 욕망과 가족의 과업과 사랑에 몰입하지만, 가족은 사랑보다 노고가 앞서기 마련이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다니엘의 육아로 그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만, 삶의 피로와 대화 단절은 둘의 관계를 어둠으로 몰아가고, 끝내 다니엘의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차분한 산드라는 사건의 충격과 후유증에서 벗어나지만, 감성적이고 격정적이며 직선적인 사무엘은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면서 우울증 치료까지 받는 처지가 된다.
 
산드라와 사무엘 (2)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소설의 소재를 끄집어내는 탁월한 능력의 산드라. 그런 그녀에게 자극받은 사무엘 역시 소소한 일상에서 사건을 취재하고자 한다. 그 결과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을 휴대전화와 유에스비에 녹음하기 시작한다. 사무엘의 죽음을 타살로 규정하는 수사당국의 표적이 된 산드라는 죽기보다 싫은 일상의 까발림과 만난다.
 
추락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있은 두 사람의 격렬한 언쟁과 물리적 폭력, 술잔 깨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대소동이 법정을 사로잡는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들의 거친 말다툼과 충돌이 산드라가 사무엘을 살해할 지경까지 인도했는지가 관건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산드라가 사무엘을 조롱과 비난과 냉담으로 일관한 것처럼 몰고 가려는 검사.
 
산드라는 언제부턴가 프랑스어를 포기하고 영어로 자신이 마주해야 하는 복잡다단한 내면을 토로한다. 프랑스 법정에서 도이칠란트 여성이 영어로 자기를 변호하는 장면이 유럽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다가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은 11살짜리 아들 다니엘을 혼란에 빠지게 하며, 영화는 더욱 미궁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작가의 사명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이미지. ⓒ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를 보다가 느닷없이 전율하는 나 자신을 본다. "작가는 허구가 실재를 이기도록 기억을 망각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가진다!" 우리가 항용 나직하게 말하는 실제 현실의 존재가 실재이며, 상상력을 동원하여 실재를 이런저런 색깔과 향기로 윤색하는 것이 허구다. 따라서 우리는 허구에서 실재를 찾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허구가 실재보다 훨씬 더 실감을 자아낼 수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실재에 더 많은 의미와 무게를 두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명제를 <추락의 해부>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왜 허구가 실제 현실을 이겨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나 논리 전개가 없기에 수수께끼 같은 추상적 명제만 남는다.
 
여기서 남는 마지막 단서는 기억이다. 기억은 실재를 완벽하게 재연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 문제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은 선택적으로만 남는 법이고, 그것으로 왜곡된 대상과 관계와 사건 역시 사태의 진실과 직결돼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것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단편 소설 <덤불 속>(1922)에서 이미 명쾌하게 갈파한 바 있다.
 
작가의 사명으로 제시된 허구와 실재의 관계 그리고 기억의 망각은 <추락의 해부>에서 중요한 명제로 작동한다. 망각하지 아니하고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거나 녹음하는 행위는 실재가 허구를 능가하고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을 포함한 실재의 파편적인 기록과 기억을 의미하며, 전체적인 의미망 포착에 실패하고 만다.
 
<추락의 해부>는 무엇을 해부하는가?!
 
법정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피부와 머리 색깔과 인종과 표정과 눈동자가 21세기 20년대 프랑스 사회의 다채로움을 웅변한다. 그들이 하나같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것은 산드라와 사무엘의 파탄지경에 이른 부부생활이다. 유명 작가가 하루아침에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재판받아야 한다는 이상 현실이 그들을 흥분시킨다.
 
조용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시작된 사무엘과 산드라의 차분한 대화가 조금씩 소리를 높여가며 두 사람의 격정적인 내면 토로가 이어진다. 사랑한다는 산드라의 말은 너무 쉽고 허망하게 묻힌다. 언젠가 두 사람을 활활 불타오르게 했던 사랑의 분출은 사소하고 너저분하며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남루한 일상의 명징한 확인으로 모습을 바꾼다.
 
급기야 글 쓰는 사람들 사이의 최대 금기어인 '표절'이란 단어까지 튀어나오며 심각한 논쟁으로 비화한다. 그것이 사무엘의 질투나 열등의식에서 발원했는지, 먼 이국에서 문화적 이질감을 경험해야 하는 산드라의 내면에 잠재돼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들 부부를 파국의 정점으로 인도한 본원적인 것은 실재(實在)를 이기지 못한 허구다.
 
<추락의 해부>는 적어도 21세기 20년대 세계화 시대를 가장 멋지게 시전하는 유럽의 가정 풍속도, 거기서 성공적인 작가로 살아가는 여성과 실패하여 초라해진 남성, 그들이 엮어가는 아슬아슬한 부부관계를 해결하는 방식, 아들의 사고를 대하는 남녀의 차이, 그들의 위험한 삶을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시민들과 언론까지 해부하고 있다.
 
<추락의 해부>에서 쥐스틴 트리에가 추구하는 것은 너저분하고 소란스러우며 출구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도 빛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까발려진 사생활, 다니엘의 의혹에 찬 시선, 변호사이기 전에 친구였던 뱅상과 맺는 관계, 선정적인 언론 매체의 폭력에도 산드라는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러지고 상처 난 날개 때문에 추락할 뿐이다!"
덧붙이는 글 스포일러가 내재해 있으니, 읽으실 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쥐스틴트리어 칸영화제 허구 실재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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