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4 19:15최종 업데이트 24.02.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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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기자말]

도언이 물건. ⓒ 이지성

 
중년의 여성이 교실 맨 앞자리 책상에 앉아 있다. 그 책상은 원래 딸아이가 앉았던 자리였다. 그 딸은 약 10년 전에 떠난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2학년 3반 3번 김도언이다. 그가 앉은 책상은 단원고 4.16기억교실(아래 '기억교실') 2학년 3반 도언이 자리다. 기억교실은 단원고 희생자 261명을 기리기 위해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 교실과 교무실을 복원한 교실이다.

중년 여성의 이름은 '이지성'. 도언이가 별이 된 뒤 '도언 엄마'로 더 많이 불렸다. 지금은 민간기록기관 4.16기억저장소(아래 '기억저장소')의 소장과 경기도교육청 4.16민주시민교육원의 기억관운영실 실장을 겸직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두 차례에 걸쳐 만난 그가 말했다.


"참사 전에는 내 아이만 바라봤다면 지금은 세월호참사에 희생된 우리 아이들 250명, 선생님 11명, 그리고 일반인 43명, 조금 더 나아가면 참사 때 억울하게 희생된 그밖에 모든 분을 매일매일 기억하고 애도해요."

슬픈 만큼 모질어졌던 시간
 

이지성과 기억교실. ⓒ 이지성

 
이지성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참여했던 구술 기록(그날을 말하다 <도언 엄마 이지성>)에는 그가 참사 초기에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나며 딸이 탔던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참사 일주일 뒤, 살아있길 바랐던 도언이가 바다에서 주검으로 올라왔다. 못다 핀 자식의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위로하러 집에 들른 형부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도언이 장례식장에서 단원경찰서 형사인 후배를 만났는데, 유가족 집마다 사복경찰이 두 명씩 붙더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아이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엄마가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안 되지 싶었다. 그때부터 분향소에 매일 아침에 나가 새벽에 귀가했다. 유가족들과 전국을 돌고 해외까지 나가서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섰다. 몸이 부서져라 서명받고 간담회를 하고 농성하고 걷고 싸우고 한뎃잠을 자는 날이 이어졌다.

참사 1주년 이틀 후인 2015년 4월 18일,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근혜장벽(차벽)'으로 둘러싸고 '캡사이신 물대포'도 모자라 유가족들을 폭행하고 경찰버스로 끌고 갔다.

그날 유가족 엄마들과 광화문 현판 앞에 있었다. 경찰들에게 연행되지 않으려 버스 밑으로 기어들어가 연결선을 붙잡았다. 다시 선두에 서서 청와대로 가려다 몸싸움이 붙었다. 앞에 선 기동대원이 모자를 벗기면서 머리를 잡아당겼다. 상대의 헬멧을 벗기고 머리를 맞잡았다. 기동대원이 때리고 캡사이신을 얼굴에 비벼도 상대방이 손을 놓을 때까지 붙들었다. 벗겨진 모자는 도언이의 모자였다. 슬픈 만큼 모질어져야 했다.

참사 초기, 기록활동가들이 유가족과 만든 4.16기억저장소는 세월호참사 기록을 모으던 민간단체였다. 오래전부터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임원들이 기억저장소 소장을 맡아달라고 누차 부탁했다. 매번 손사래를 쳤지만, 고심 끝에 기억저장소로 가기로 결심했다. 세월호참사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4.16기억교실(당시 단원고 2학년 존치교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2016년 7월, 기억저장소에 소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기억저장소는 거래처에 결제 대금이 쌓였고 실무자 월급도 밀려 있었다. 수집한 자료들은 어디 뒀는지 찾기 어려웠다. 먼저 가장 친한 유가족 부모 8명을 가족운영위원으로 데려왔다. 꾸준히 함께 할 전문가와 지지자들도 외부운영위원으로 섭외했다. 무너졌던 운영위원회를 다시 일으키려 듬직한 일손들을 불러왔다.

그때부터 가족운영위원 엄마들하고 방송국과 행사장을 다니며 기억저장소를 알렸다. 연말까지 2600명 이상의 '기억회원'을 모집했다. 1억 원 이상의 후원금이 모였다. 부임하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후원금을 모으면서 모든 기억저장소 실무자들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했다. 아이들 목숨값으로 모은 돈이니 아이들을 위해 값지게 써야겠다 다짐했다.

이후 26년 차 기록관리 경력자 이은화를 기록팀장으로 영입하며 기록물 관리를 체계화했다. 세월호 인양 후 쏟아져나온 희생자 유품도 전문가들의 도움과 자문을 구해가며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기억저장소 엄마들, 실무자들과 함께 막막하고 힘겨운 시간을 헤쳐갔다.

"만드는 건 쉬워도 지키는 건 어려워요"
 

국가지정기록물-현판. ⓒ 용우

 
지난 2016년 8월 20일. 단원고에서 '기억교실 이전식'이 열렸다. 2학년 교실의 책걸상과 물품들이 거의 다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옮겨졌다. 다만 도언이의 책걸상을 비롯해 희생 학생 3명, 미수습 학생 4명의 책걸상은 단원고 교실에 남았다.

"제가 엄마들한테 책상 빼지 말라고 했어요. 아직 미수습자가 있잖아요. 아이들이 다 돌아오면 같이 임시 이전해서 간다. 그 마음이었어요."

참사 초기부터 유가족들은 단원고 2학년 교실(기억교실)을 추모와 교육의 장소로 보존하려 했다. 일부 단원고 재학생 부모들은 2학년 교실의 '조기 정리'를 요구했다. 경기도교육청이 4.16민주시민교육원을 새로 건립하고 거기에 기억교실을 복원하겠다는 복안을 냈다. 유가족들은 '단원고 정상화'를 위해 교육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억교실 이전식 한 달 뒤,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들렀다. 옮겨간 책걸상과 기억물품들은 창고 같은 공간에 처박혀 있었다. 이삿짐 포장도 뜯지 않은 채였다.

"처음에 임시 이전 했을 때, 예산이 없다고 기억교실 문을 닫아놨었어요."

기억교실을 다시 열기 위해 저장소 엄마들과 팔을 걷어붙였다. 책걸상과 비품을 닦고, 전시물을 하나씩 만들었다. 교육청과 싸워가며 기억교실 개방과 전시를 위한 예산을 얻어냈다. 2016년 11월 21일, 임시 이전한 곳에서 기억교실을 처음 열었다. 준비한 지 3개월 만이었다.

그 뒤 기구한 시절을 함께 버텨낸 기억교실이 드디어 복원공사를 마칠 즈음. 기록으로써 기억교실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국가기록원은 '단원고4.16기억교실(공간기록)'을 국가지정기록물 '14호'(2021.12.27.)로, 4.16기억교실 관련 피해자·단원고·세월호 기록물(113철 410건)을 국가지정기록물 '14-1호'(2023.1.6.)로 지정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기억교실을 없앨 수 없게끔 만들고 싶었어요. 그럼 기록물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되거든요. 기억교실을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받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리려는 게 다 그런 이유예요. 기억공간을 만드는 건 쉬울 수 있어요. 근데 이걸 지키는 건 쉽지 않아요."

"이골이 나도록 싸운 시간"
 

국가지정기록물-현판&지정서. ⓒ 용우, 4.16기억저장소

 
기억저장소에서 보낸 시간은 이골이 나도록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기억저장소가 관리하는 단원고4.16기억교실과 4.16기억전시관, 그리고 기록물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하고 관철하고, 외압을 막아내야 했다.

"지금은 유가족이 기억저장소 소장을 맡아야 된다고 봐요. 유가족이 대표로 있어도 이렇게 치고 나가기 힘든데요. 유가족이 아니면 이걸 헤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유가족들의 힘으로만 기억공간과 세월호 기록물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다.

"남들은 뭐 유가족이 완장 찼다고 생각하겠지만요. 저는 항상 어딜 가도 90도로 인사해요. 남들이 비굴하게 왜 그러냐고 해요.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에 읍소할 수밖에 없어요. 외부에 있는 분들과 전문가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기록물을 관리하고 이곳을 지킬 수 없거든요."

기억저장소에서 리더로 지내는 동안 외롭지 않았냐고 물었다.

"저는 이끌어가고 결정하고 추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롭죠. 집에 갈 때 진짜 무너져요. 근데 아침 되면 또 나가요. 매일 무너지고 매일 일어나요."

그럼에도 뒷사람을 위해서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탄탄하게 다져야 했다.

"이 일을 누구라도 해야 하면, 어차피 그 첫 번째는 '나'죠. 제 뒤에 오실 분이 조금 더 편안하게 안정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게 내 역할이다. 힘들어도 무너지지 말자."

그날 이후로 정신없이 싸우고 많은 활동을 벌였다. 그러는 동안 주변을 살피고 돌아볼 여유도 줄어갔다. 황금이는 도언이가 졸라서 데려온 반려견이었다. 지난 2023년 10월 10일, 황금이도 별이 되었다. 황금이는 힘들 때 옆에 와서 위로해 주는 집안의 막내였다. 

"우리가 감정이 격해지면 힘들어 다른 집처럼 황금이를 많이 못 챙겨줬어요. 이번에 황금이 떠나가고 알았어요. 도언이 가고 나서 황금이 사진을 우리가 한 번도 안 찍었던 거예요. 도언이가 얘 찍어놓은 사진밖에 없는 거지. 우리가 너무 무심했구나."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힘든 아픔들을 감내하면서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기 위한 일들을 놓지 못했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버거운 일을 계속하게 했을까.

2015년, 진도에서 도언이가 수학여행 때 가져갔던 카메라가 올라왔다. 나름대로 씻었지만 탐탁지 않아 수리업체에 세척을 맡겼다. 한참 뒤에 찾으러 갔다. 직원이 일일이 분해해서 클리닝 작업을 했다고 했다. 감사하다며 비용을 드리겠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업체 대표님이 나오셨어요. '아니에요, 어머니! 그냥 가져가세요. 제가 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에게 뭐라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하면서 그분이 우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도언이 물건이 올라오면 훼손되지 않게 오래 보관할 방법을 궁리했다. 도언이와 도언이 친구들의 기록물 보존을 위한 험난한 여정의 시작은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도언이의 추억이 담긴 물건은 유난히 많았다. 중3 때 엄마와 맞춘 커플링, 수학여행 다녀와서 쓰자고 했다가 못 쓴 영화 티켓, 수학여행 전날 사서 가져갔다가 바다에서 올라온 반바지, 엄마한테 받아 간 손거울, 가입관 할 때 잘라 달라 부탁해서 받은 도언이 머리카락... 도언이가 쓰던 칫솔도 아직 집에 있다. 밤이면 도언이 방에 불을 켰고 한 번도 끈 적이 없다.

도언이의 물건이라면, 도언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었던 엄마. 그 엄마의 딸은 유난히 친구들을 좋아하고 챙겼다. 딸의 친구들도, 그 친구들이 남긴 물건과 이야기들도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엄마였기에 별이 된 아이들이 그냥 '단원고 희생 학생 250명'으로 불리지 않고, 한 명 한 명씩 제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지 않았을까.

"기록이란 마음을 모으는 곳"
 

도언의 책상. ⓒ 용우

 
참사 직후 팽목항에서 보냈던 기억은 통째로 사라졌다. 투쟁했던 기억들은 또렷했다. 다만 그 투쟁을 몇 년 도에 했나 따져보면 기억나지 않았다. 햇수로 10년이 지나다 보니 기억할 건 많았고 그만큼 잊어버리는 것도 많았다.

"기록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지거든요. 기록을 보면서 기억을 다시 복기하는 거잖아요. 기억은 왜곡될 수가 있어요. 근데 이 기록을 보면 다시 기억하거든요. 지금 내가 한 구술이 예전에 했던 구술 내용하고 달라질 수 있어요. 그때의 분노와 지금의 분노도 다르고요. 기억이 왜곡되기 전에,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이 구술을 기록으로 남겨야 해요."

희미해지는 기억보다 더 두려운 건 속절 없이 흐른 10년의 세월이었다.

"2015년, 2016년, 2017년... 2023년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온도가 달라져요."

세월호참사 기록을 위해 7년 넘게 달려온 세월. 기록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기록은 마음을 모으는 곳이라고 봐요.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마음, 한마음으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달려왔던 그 마음. 그리고 TV를 보면서 무사 귀환을 바랐던 그 마음. 이걸 후손들이 보는 거죠.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않았지만, 국민들이 다시 국가를 살려냈구나.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기록을 남기고, 우리가 싸울 힘을 만드는 거죠. 투쟁의 원천은 기록에 있어요. 그게 기록의 힘이에요."

2015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도보로 행진할 때부터 그는 유가족과 함께한 시민들을 '단원고 11반'이라 불렀다. 2024년은 세월호참사 10주년이다. 10주년을 앞두고 단원고 11반 학생들에게 간절하게 전하고픈 마음이 있었다.

"참사 10주년에는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이 많이 들어와요. 저는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10주년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냐 묻는 것보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들이 10주년에 무엇을 하겠다'를 저한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요. 2014년 4월 16일로 돌아가서 그 마음으로 다시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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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 중에 일부 내용은 4.16기억저장소가 발간한 소식지 <기억의 연대 2021. vol.5>, 4.16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 <도언 엄마 이지성>, <4.16기억저장소>, <도언 아빠 김기백>을 참고했습니다. 글쓴이는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이자 공동체은행 ‘빈고’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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