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6 16:01최종 업데이트 24.01.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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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한 미술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이 대입 정시 미술 실기 준비를 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한 사진). ⓒ 연합뉴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해 말, 수능을 끝내고 대학 입시까지 무사히 마친 제자들에게서 속속 연락이 왔다. 수능이 어려웠다는데 다행히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몇몇 제자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나눈 것이 자신의 공부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공부가 아니었다면 고등학교 3년의 수험생활 동안 수능과 대입을 왜 치러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무기력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 덕분에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나가야 할지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기에 그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대학 입시가 끝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 때문에, 오직 내신과 수능 점수에 목매는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앞서, 어떤 학교와 학과에 입성하겠다는 목표만 중요하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점점 더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성과와 점수만으로, 직업의 종류와 연봉으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값과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인 것 같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란, 그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이다. 그 공포에 짓눌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이나 고통은 신경 쓰지 못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듯하다.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지난해 말 한국에서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봤다. 영화는 일본의 작은 마을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세 개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먼저 아들 미나토를 홀로 키우는 엄마 사오리의 시선이다. 미나토가 언젠가부터 신발 한 쪽을 잃어버리고, 물병에 흙을 담아오고,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는 모습에 사오리는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이유를 묻는다. 학교 담임교사로부터 듣지 않아야 할 폭력적인 말을 들었다고 고백한 아들의 말에 사오리가 학교에 찾아가면서 사건의 한 부분이 드러난다.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교사들에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혀달라고 부탁했지만 "죄송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도대체 교사들이 왜 저런 거야?' 답답함이 극에 달할 때쯤 영화는 담임교사인 호리의 시선으로 다시 이 사건을 비춘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이야기다. 호리는 미나토에게 그 어떤 폭력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학급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는 다정한 선생님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왜 미나토는 거짓말을 해서까지 호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았을까. 미나토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한 순간, 영화는 다시 미나토의 시선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또 한 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 <괴물> 스틸컷 ⓒ (주)NEW

 
영화는 "그래서 괴물은 누구?"라는 질문에 어떤 답도 내놓지 않은 채 끝난다. 처음 영화를 다 보고서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아 뒤죽박죽의 감정에 어지러웠다. 영화가 미스터리 추리물도 아닌데, 다시 모든 장면을 복기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생각했고, 심지어 영화에서 제대로 비춰주지 않는 다른 인물들의 삶까지 더해서 상상해야만 했다.

여전히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있지만,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사실 그대로를 본다고 해도, 그 속의 수많은 생각과 감정과 입장을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한 선택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답답하고 악하게 보이기도 하는 어떤 말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순간을 다 볼 수 없고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내 선택이 최선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안 보이는 것,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뼈를 깎듯 노력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에 서둘러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은 어렵다.

힘들고 어렵다고 그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괴물이 된다. 하나의 말만 듣고, 하나의 면만 보고, 하나의 상황만 파악해서는 반드시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사오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 호리가 폭력 교사로 지역 신문에 보도되고 학부모들에게 공개 사과를 하는 것은 너무나 약소한 처벌이지만, 호리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억울한 처사인지 알게 되듯이 말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감독이 똑같은 사건을 여러 개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을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해 언론에 보도되면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말한다. 수많은 언론이 다양한 시선을 비춰주느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떤 단면 하나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매우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형국이 들불처럼 퍼져 나간다.

언론만 그러한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야기들도 그렇다. 앞서 말한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능 점수만 높고 입시 성과만 좋으면 된다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것을 방해하고 막아서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요즘 아이들이 다른 사람 배려할 줄 모르고 사회성이 없다는 말들이 정말 많은데, 과연 그것은 단순하게 세대론으로 웃어넘길 일인가? 친구를 경쟁자로 보는 자기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에게 '대학 갈 때까지 몇 년만 참으라'고 이야기하는 어른들 혹은 사회 시스템이 진짜 괴물이다.

미국의 에세이스트 수전 손택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수상 연설 '문학은 자유다'에서 "정신적 약탈자들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이 작가가 할 일이라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파편과 경험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 소명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 작가를 교육으로 바꿔본다. 교육은 우리가 정신적 약탈자의 말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의 목소리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 점검할 줄 아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서 괴물은 누구?"라는 질문에 내가 그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된 최소한의 도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괴물에서, 다정하게 손을 내미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부디, 그런 교육이 가능한 정책을 고민하는 2024년이 되길, 괴물이 되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정치가 가능하길 소원한다.
 

이윤영 / <인디고잉> 편집장 ⓒ 이윤영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윤영은 부산에 위치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발행하는 인문교양지 <인디고잉>의 편집장입니다. 청소년기부터 인디고 서원에서 활동하며 인문·문화·교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세계를 꿈꾸는 시민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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