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5 10:58최종 업데이트 24.01.0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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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기자말]

차량에 붙이고 다니는 세월호 ⓒ 가온누리 가족

 
같은 일을 겪고도 기억이 다를 때가 있다. 어떤 기억은 아예 잊히거나 기억한대도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기억만큼은 모두 선명하게 기억한다. 11월 18일 부천에서 만난 4·16재단 국민발기인 박강희·김우철씨가 기억하는 '그날'이 그랬다.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게 첫째 가온이가 5살, 유치원 간 지 한 달 정도 될 무렵이었어요. 아직 낯설어서 가기 싫다고 매일 우는 애를 꾸역꾸역 보냈거든요. 우는 애를 들여보내 놓고 마음이 너무 심란한 채로 집에 왔는데 TV 모니터에 속보가 뜨더라고요. 이게 뭐지? 하다가 솔직히 저는 울고 들어간 가온이 걱정에 얘를 다시 데려와야 하나, 하고 멍하니 티브이를 켜놓고 있었어요. 2시간쯤 지났나, 구조가 됐다길래 그런가 보다 했죠. 그런데 실시간으로 뉴스가 계속 바뀌더라고요." (강희)


가온이와 누리, 연년생 남매를 키우던 강희씨는 그날의 불안했던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막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힘들고 못내 아쉬운데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먼저 생각났다. 직장에 있던 남편 우철씨도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큰 행사를 해요. 그때가 딱 첫날이었어요. 준비할 게 많아서 아침에 나가려고 하는데 뉴스가 나오더라고요. 다 구조됐다고. 그런데 행사장에 도착하니 뉴스에서 아이들이 죽었다는 거예요. 갑자기 축제도 취소되고 행사도 조촐하게 진행하기로 했어요. 행사 때문에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마음이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처음에는 '진짜? 사실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철)

안도했다 절망한 그날
     
세월호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기억을 꺼낸다. 뉴스를 보고 당황했고 잠시 후 전원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했다가 다시 절망했던 그날의 기억. 비현실적인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강희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세월호 집회에 나섰다. 동네에서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세월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같이 분노하던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순간 멀어지는 걸 느꼈다.
 
"이제 그만하라 그러더라고요. 아직도 이해가 안 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났는데 점점 세상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더라고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어요. 무력감이 느껴져서 작은 집회라도 열리면 찾아갔죠." (강희)


우리 가족만이라도 힘이 닿는 대로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지내는 동안 4·16재단이 설립됐다. '생명, 안전, 약속'을 슬로건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꿈꾸는 일상이 안전한 사회'를 비전으로 내걸은 곳이었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등의 활동도 하지만 공동체 안전강사를 양성하거나 각종 연구, 교육 사업 등을 통해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고 했다. 재단 설립 소식을 듣고 강희씨는 '가온누리가족'으로 발기인 신청서를 작성했다. 

"집을 이사하던 시기라 이런저런 큰돈이 제 통장에 들어오던 때였어요. 마침 재단 설립 소식을 들은 거예요. 정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발기인 신청을 했어요. 경제활동을 하지 않던 때니까 제게는 큰돈이었거든요. 하지만 우철씨가 동의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이 아니라, 아이들 이름으로 신청서를 작성했죠." (강희)

"(애들이) 어릴 때는 사실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아이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안산 기억교실을 방문했는데, 엄마 아빠가 둘 다 엉엉 우니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걱정했죠.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잖아요. 어느 날 가온이가 악몽을 꾸기도 하고 배 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2~3년은 아이들이 트라우마가 생길까 집안에서는 최대한 그런 영상을 보지 않도록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도 매년 4월에 세월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4월 16일이 다가오면 아이들 가방에 리본을 하나씩 달아서 학교에 보냈어요." (우철)
 

노란 리본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우철씨는 자신도 늘 달고 다니려고 노력한다. 집 대문에도 차에도 아직 노란 리본이 붙어있다. 가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유가족인지를 묻는다. 이제 그만 좀 하라며 그의 가방에 달린 리본을 떼려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관종'이냐며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었다. 

"관심받고 싶어서 그러냐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리본을 보는 사람은 한 번이라도 세월호를 더 떠올릴 테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겠죠. 리본이라도 계속 달고 다니자, 그런 마음이에요." (우철)

우철씨는 20대를 그 또래들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결혼한 이래 30대에 접어들자 가족들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월호를 마주했고, 뭔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뭘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데 '작게나마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세월호 이후에 주변을 돌아보게 됐어요. 뉴스를 보면 결국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가 죽지 않아도 될 일에 자꾸 죽어 나갔단 말이에요. 답답하지만 아직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회가 생기면 노력해요." (우철)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한 마디의 힘
 

가온누리 가족 ⓒ 박내현

 
10년은 짧지 않다. 두 사람의 말처럼 '직접 관련없는 사람'들이 세월호 이야기를 꾸준히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얘기할 사람이 없다고 느껴졌고 세상이 달라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해 2월, 4·16재단에서 열린 발기인 모임에 참여했다.

"유가족, 재단 사람 외에 일반인은 우리뿐이더라고요. 어색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같은 테이블에 있던 유가족이 가온이랑 누리한테 눈을 못 떼시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 떠나간 아이들이랑 이제 비슷한 또래가 되고 있잖아요. (유가족들에게)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라고 했더니 펑펑 울더라고요. 그래서 '이것만 해도 되겠다, 투사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우리 같은 시민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는 게 내 소임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이 뭐 대단한 활동은 아니지만, 그거라도 나 같은 사람, 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자. 그분들이 그렇게 느껴주신다면 한 10년, 그래도 잘 왔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강희)

엄마·아빠와 오랜 시간 세월호 관련 행사에 참여했지만, 가온이는 주변 친구들과는 세월호를 주제로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지난달 유튜브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이 가족에게 남긴 메시지를 모아놓은 영상을 보다가 눈물을 쏟았다.

"갑자기 가온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막 우는 거예요. 엄마 아빠에게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막연히 듣기만 했는데, 직접 보니까 마음이 좀 그랬나 봐요. '엄마, 세월호가 이런 일이었어'라며 말을 못 잇더라고요. '그래, 이런 슬픈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되겠지'라고만 했어요." (강희)

가온이와 누리 같은 10대에게 세월호는 되려 낯선 일이다. 너무 어릴 적 일어난 일이라 가끔 매체를 통해서, 혹은 학교에서 세월호 이야기를 들어도 그 사건이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세월호참사 이후 한국 사회가 '안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됐다는 정도다. 그래서 우철씨는 4·16재단이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이나 사업을 더 많이 해주길 바란다.

"서글픈 생각인데 우리 세대는 정말 내 자신이나 내 가족한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세월호참사 후에 1년 정도 '정말 나한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하며 사람들이 움직였다고 봐요. 추모는 하지만, 내 일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우리 부모 세대의 행동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온이나 누리가 계속 이걸(세월호참사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우철)

가온누리 가족은 지난해 부천 송내도서관에서 준비한 추모 행사에 다녀왔다. 청소년 센터에 속한 청소년들이 직접 준비한 행사였는데, 가온이와 누리 또래의 아이들이 세월호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의미 있었다. 세월호참사가 10년 전의 일이 아니라는 걸 이태원참사로 다시 느꼈기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사회적 안전과 관련한 고민을 이어가며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여유 있어야 주변을 둘러보는데 요즘은 다들 힘드니까 각자도생이랄까요. 그래서 개인이 내면의 힘을 길러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여유를 갖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건전한 이기주의자, 주변의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고 최소한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강희)

강희씨는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그저 스스로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는 답답함에 세월호 연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고 아이들도 함께해 위로받았다고도 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느껴질수록 주위를 둘러보기 어렵다. 하지만 강희씨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갔다.

강희씨와 우철씨 부부는 지난해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안에서 한 걸음의 의미를 깨닫고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1km 뛸 때 죽을 것 같다가 또 어떻게 겨우 2km 뛰어요. '그래 오늘 잘했어, 훌륭해'하며 뛰다 보니 어느덧 10km를 뛰고 있더라고요. 꼬박 열달 걸렸어요. 그렇게 한 발 한 발 뛰면서 '그냥 내 경험이구나. 내가 느끼는 경험이고 내가 느끼는 가치고, 결국 내가 스스로 딛는 발걸음이구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강희)

10km를 뛰기 위해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이 있었다. 세월호참사에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하루 쌓아온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노란 리본을 새롭게 고쳐 달고, 누가 뭐라든 휘둘리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키면서 보내온 하루하루. 박강희·김우철씨처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덕분에 세월호는 '그들만의 일'로 머무르지 않을 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이 모여 2014년의 시간을 2024년까지 이어오고 있다. 수많은 소시민이 앞으로도 그 시간을 이어갈 것이다.
 

4·16재단 출범식 ⓒ 가온누리 가족

 

4·16재단 발기인 워크숍 ⓒ 가온누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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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힐튼호텔옆쪽방촌이야기>, <우리지금이태원이야>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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