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8 10:23최종 업데이트 24.01.0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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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기자말]

팽목기억관에는 가족들이 바다에서 뭍으로 나온 세월호 희생자들을 처음 만난 팽목항의 아픔과 그리움이 그대로 저장돼 있다. ⓒ 신정임

 
전남 진도 팽목항(현재는 진도항)은 여전했다. '4.16세월호참사 희생자 팽목항 분향소'라는 표지판이 달린 '0416 팽목기억관'을 중심으로 세월호팽목성당과 강당, 세월호가족식당이 각각 컨테이너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개들이 뒤섞인 흙밭에 덩그러니 놓인 컨테이너들에서 쓸쓸함이 묻어 놨다. 

팽목기억관에서 5분도 안 된 거리에 세월호 희생자들이 차디찬 바닷속에서 처음 뭍으로 올라온 선착장이 있다. 바다로 뻗은 길에 어린이문학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세월호 기억의 벽'이 이어졌다. 전국 26개 지역의 어린이와 어른들이 타일 4656장에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곱게 새겨놓았다.


'봄은, 죽었다'는 선언 옆에 '세상을 바로 보겠습니다'라는 다짐들이 수십 미터 이어지고, 세월호 추모벤치, 솟대 등 조형물들이 바다로 뻗은 길 곳곳에 놓여 있다. 이 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난 10년 동안 점점 멀어져 왔던 노란 리본의 기억에 한 걸음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시민상주를 시작한 이유
 

광주시민상주모임은 팽목항에 철마다 현수막을 걸고 매달 기억순례와 기억의 문화제를 하며 10년 전과 다름없이 팽목을 일상적으로 지키고 있다. ⓒ 신정임


기억의 벽 맞은편에는 '기억해야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생명존중 안전사회 건설하자' '4.16세월호참사 기억/추모 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을 약속하라' 등의 구호를 담은 현수막들이 죽 걸려 있었다.

지난 11월 4일 이 현수막을 내건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이하 시민상주모임)의 시민상주, 정기열(55)씨를 광주에서 만났다. 10년 동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함께 활동해온 그를 만나자 팽목항에서 조금 또렷해진 노란 리본의 기억에 여러 감정이 더해졌다.

시민상주모임의 원래 이름은 '세월호 삼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이었다. 우리의 전통을 되살려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삼년상을 치르던 것처럼 상주의 마음으로 세월호 삼년상을 치르겠다"며 세월호참사 두 달 뒤인 2014년 6월 16일에 발족했다.

처음 22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지금은 300여 명이 함께하는 큰 공동체가 됐다. 소통은 회원 대화방에서 하고, 대표도 직책을 맡은 간부도 없는데도 지난 10년 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다. 5.18의 아픔과 함께 공동체의 힘을 경험한 광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생자 가족의 마음도 어느 지역보다 깊이 공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유가족들과 붙어서 그들(유족)에게 힘이 되어주는 거였습니다. 항상 가족들이 원하고 가족들이 하는 활동을 군말 없이 같이하려고 했습니다.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이하 '가협')가 어떤 의제를 내세우면 그게 바로 우리의 의제가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지금까지 왔어요."

3년, 5년 시간이 흘러도 '우리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시민상주모임의 첫 사업은 '진실마중 사람띠 잇기'였다. 침몰 당시 승객들을 대피시키는 대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한 뒤 자신들이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원들의 재판을 방청하러 오는 희생자 가족들이 있었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광주법원으로 가는 길에 200~300여 명이 늘어서 사람띠를 이었다. 이들의 손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등이 적힌 노란 팻말이 들려있었다.

"그즈음에 광주비엔날레가 열렸습니다. 비엔날레 안에 뜨개질을 해서 나무를 감싸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우리도 그걸 접목하기로 했습니다."

시민들이 마을별로 모여 뜨개질을 하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적은 노란색 별들을 엮고, '4.16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담은 대자보도 만들어 광주법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나무들을 둘러쌌다. 시민들은 이 길을 '세월호 진실마중길'이라고 불렀다. 재판이 열린 2014년 6월부터 7월 14일까지 세월호 진실마중길에서는 42차례나 '진실마중 사람띠 잇기'가 이어졌다.

"안도감이라고 할까요? 이렇게라도 우리가 이해해주고 품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나마 유가족들이 좀 덜 힘들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함께 순례하며 통한 이심전심
  

광주시민상주모임의 시민상주들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다.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끼면서 10년을 이어왔다. ⓒ 신정임


시민상주모임은 쉴 틈이 없었다. 곧바로 십자가 순례에 함께했다.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2학년 고 김웅기군의 아빠 김학일씨, 고 이승현군의 아빠 이호진씨와 누나 이아름씨가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단원고를 출발해 충남과 전북, 전남을 지나 팽목항에 다다른 뒤 다시 대전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하는 순례를 계획했다.

고향이 전남 함평인 정기열씨가 순례단 소식을 듣고 함평 구간만이라도 동참하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하다가 아예 시민상주모임이 전남지역에서 대전까지 올라가는 길의 지원을 맡기로 했다. 숙소를 알아보고 식사와 간식 등을 챙겼다. TV로 보는 희생자 가족과 직접 만나는 희생자 가족은 다르다고 그가 말했다.

"함평에 새벽 4시쯤 갔는데 그때 승현이 아빠가 일어나 있었어요. 앉아 있는 모습을 딱 봤는데 뭔가 탁 막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옆에서 걸어만 주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종일 걸었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자 웅기 아빠가 먼저 말을 걸며 친근하게 대했다. 전체 37일 여정 중 보름 가까이를 함께하면서 차곡차곡 정이 쌓였다. 대전에서 헤어질 때 승현 아빠가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이때의 인연이 이어져 지금도 두 아빠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빠들만의 이심전심이 통해서다.

정기열씨가 순례 동참을 자처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가톨릭 스카우트 지도자로 1년이면 30일은 야행을 하고, 행진도 익숙했다. 두 아들과 같이할 일을 찾다가 시작한 일이 휴일을 온통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일이 됐다. 자원봉사였지만 아이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일조한다는 보람이 있었다.

시간과 돈, 열정을 내놓은 사람들
 

가톨릭 스카우트 지도자로 자원봉사를 해온 정기열 시민상주는 세월호참사를 만난 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 조재형


그의 일상은 세월호참사를 만나면서 바뀌었다. 회사가 끝나면 광주에서 차로 2시간여를 달려 팽목에 가서 회의를 하고 집에 오면 오전 1시가 넘었다. 다시 아침이면 회사로 출근하고 저녁이면 팽목으로 향하는 날들이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회의를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이던 첫째가 전화를 하더니 대뜸 물었다.

"아빠, 요즘 돈 없어?"

개인 사업을 하는 정기열씨가 매일 새벽에 오니 아빠가 사업이 안 되어서 투잡이라도 하는 줄 알고 건 전화였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시민상주모임 이야기를 했다.

"전부터 아이들한테 항상 이야기해왔거든요. 세상은 혼자 능력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으니 5%라도 사회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요. 그래서인지 시민상주모임 활동을 이해합니다."

정기열씨처럼 자기가 가진 시간과 돈, 열정을 내놓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시민상주모임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2014년 11월부터 천일 동안 마을별로 돌며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알리는 '천일순례'도 할 수 있었다.

시민상주들은 명절 때면 고향에 내려가서, 해외에 나가면 여행지에서도 그 지역을 돌며 천일 동안 걷고 또 걸었다. 정성이 닿아 희생자 가족이 원하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로 나아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과정에서 4개였던 광주 마을촛불 모임이 19개까지 늘어났다.

시민상주들은 마을에서 매주 피케팅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처음에 '세월호 삼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이라고 이름을 정할 때만 해도 "3년이면 진상규명 등도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3년이 됐지만 침몰의 원인도, 구조를 못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시민상주모임을 그만둘지를 결정해야 했다. 시민상주 80여 명이 모여 논의한 끝에 "탈상을 했으니 3년이란 말은 빼지만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될 때까지 함께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희생자 가족 곁에 있겠다고 한 처음의 다짐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대신 시민상주모임의 3년간 활동을 정리한 책 <사람꽃 피다>을 출간했다. 지금껏 희생자 가족들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며 사람꽃 향기를 전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시민상주 100명이 둘씩 짝을 지어 서로를 인터뷰한 뒤 정리한 글들을 모았다. 앞이 꽉 막힌 상황이어도 이를 풀어가는 건 역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작업이었다.

팽목은 우리의 일상

시민상주모임의 활동은 변함이 없다. 마을촛불들은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마을에서 피케팅을 이어간다. 주기가 다가오면 문화제 등 행사들도 마련한다. 바닷바람에 해진 팽목항 현수막들도 때마다 바꿔 단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이면 진도군 임회면 입구에서부터 기억동산을 거쳐 팽목항까지 가는 기억순례를 하고, 팽목기억관 옆에서 문화제도 연다. 세월호 선체 인양 전엔 기다림의 문화제였던 이름이 지금은 "세월호참사를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아 '기억의 문화제'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 2022년 6월부터는 매주 목, 금요일 광주 시민상주들이 돌아가며 팽목기억관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도 하고 있다. (1주일 중 나머지 3일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또 2일은 진도 시민들이 지키면서 팽목기억관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1년 365일 열려 있다.) 정기열씨는 "우리에게 팽목을 지키는 건 일상"이라면서 팽목항에 기억공간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팽목은 희생자들이 뭍으로 처음 나온 자리이니만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진도군민들의 희생도 기록으로 남겨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요."

2018년 진도군에 팽목항에 기억관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진도군은 면담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팽목기억공간 조성을 위한 국가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기억공간의 필요성을 알리며 전국을 순회했는데도 진도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새로 당선된 진도군수는 안 쓰고 있는 매표소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작은 기억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유가족들과 약속했지만, 2023년 12월 말까지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진도항 여객선터미널이 새로 문을 열면서 팽목기억관 주변이 주차장화 되어가고 있어 팽목항에 제대로 된 기억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많다. ⓒ 신정임

 
그러는 사이 팽목기억관 옆에는 진도항 여객선터미널이 새로 문을 열어 제주로 가는 배를 타려는 여행객들이 늘었다. 팽목기억관 주변이 여객선터미널을 찾는 사람들의 주차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관광객들이 여객선터미널을 오가면서 매일 팽목기억관에 들립니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는 분들이 '아직도 진상규명이 안 됐냐?'고 물어보세요. 안됐다고 하면 다들 놀라시죠. 우리가 돌보는 것과 국가에서 운영하는 건 다르잖아요. 기억공간이 자리만 잡아주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참사 관련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진도군 입장에서도 사람들을 더 많이 유인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1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시민상주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를 묻자 정기열씨는 스카우트 이야기를 했다.

"스카우트 지도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과 텐트를 치고 몇 박 며칠 야영을 하다 보면 힘든 점이 많습니다. 가끔은 '내가 언제까지 이 활동을 해야 하나. 이번만 끝나면 그만두어야지'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무사히 야영을 마치고 성과도 보이니까 다시 다음 야영을 준비하는 거죠.

시민상주 활동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3~4년은 정말 힘든지도 모르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는 것 같을 때면'언제까지 하나. 이제는 내가 빠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프로그램을 하나 끝내면 또 힘을 받고 다음으로 나가는 생활의 연속인 거죠."


함께하는 이들이 줄어든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잊혀진 게 아니라 다 마음속엔 있는데 직접 나와서 하는 사람들이 좀 안 보일 뿐이죠. 안에서는 다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원하고 우리가 하는 활동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탁환 작가의 책에 나온 "질문이 멈추면 기억도 멈춘다"는 문장을 좋아한다는 정기열씨는 그 반대인 '기억이 멈추면 질문도 멈춘다'는 문장도 성립할 거라고 말했다.

"계속 기억을 하고 거기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해나가면 문제 해결 방법도 떠오르고 책임 당사자도 거기에 답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질문과 기억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깔려 있으면 어느 순간 우리가 정말 행동하고 압축된 힘이 필요할 때 그분들도 나올 거라는 기대감도 있고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래오래 기억해주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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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달빛 노동 찾기> <숨은 노동 찾기>의 공동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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