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7 07:09최종 업데이트 24.01.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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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의 X에 공개된 차세대 EUV장비 출하 소식. 인텔은 ASML과 손잡고 하이-NA EUV를 공동개발에 적극 나섰습니다. 그 결과 첫 장비는 인텔로 향하게 된 겁니다. ⓒ ASML


[기사 수정 : 27일 낮 12시 15분] 

지난주 ASML이 인텔에 차세대 노광장비인 하이-NA EUV를 납품했다는 소식이 여러 언론을 통해 주요하게 보도 되었습니다. 반도체 장비 회사가 장비를 반도체 제조회사에 판매하는 건 늘 있는 일인데 왜 유독 이번 납품에 대해 많은 언론이 주목했는지 그 이유를 대통령께 설명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의 장비 회사 ASML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직접 다녀오기도 했고, 이전 기사에서 몇 번 설명 했으니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복습하는 차원에서 짧게 요약하고 시작하겠습니다.


ASML은 반도체 제조공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광공정에서 쓰이는 장비를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전 세계 노광장비시장에서 점유율이 90%가 넘고, 특히 반도체 공정 미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EUV의 경우에는 ASML 외에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아직 없습니다. 한마디로 ASML의 장비 없이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모두가 기다리는 3900억 원짜리 하이-NA EUV

ASML의 노광장비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노광장비는 빛을 이용해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데 사용하는 광원에 따라 크게 심자외선(DUV)과 극자외선(EUV)으로 나눕니다. DUV는 193nm(나노미터)의 파장을 가진 빛을 사용하고, EUV는 13.5nm로 파장이 짧은 빛을 사용합니다. 파장이 짧을수록 빛의 간섭이 줄어들어 보다 미세한 회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EUV가 더 첨단 공정을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EUV에서 성능이 좀 더 향상된 것이 하이-NA EUV입니다. "하이(High)"는 말 그대로 높다는 뜻이고, "NA(Numerical Aperture)"는 우리말로 "개구수"라고 하는데 위키백과에서는 "광학에서 시스템이 빛을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는 입사각의 특징을 지닌 무차원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어도 어렵고 설명도 어렵네요. 렌즈의 밝기나 해상도를 나타내는 척도인데 간단하게 렌즈의 상대적 크기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현장에서도 개구수란 말은 안 쓰고 그냥 편하게 NA라고 부릅니다. 하이-NA EUV는 기존 EUV의 NA가 0.33이었는데 이걸 0.55로 키웠습니다. 렌즈가 그만큼 커졌습니다.
  

심자외선을 사용하는 DUV와 극자외선을 사용하는 EUV는 렌즈도 다른 걸 씁니다. ⓒ 삼성전자

 
EUV장비가 그려내는 회로의 해상력은 사용하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NA값이 커질수록 높아집니다. 한마디로 렌즈의 크기가 클수록 더 미세한 회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렌즈 크기를 키우는 건 어려운 기술입니다.

일반적으로 똑같이 렌즈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DUV는 돋보기 형태의 렌즈를 이용해 빛을 투과시키고, EUV는 반사경 형태의 렌즈를 이용해 빛을 반사시킵니다. EUV에서 렌즈를 키우면 반사경이 받아들이는 입사광과 내보내는 반사광에 간섭이 생기기 때문에 빛 간섭을 피하며 렌즈를 최대로 키우는 것이 기술입니다.

렌즈를 키워서 해상도를 높인 이 장비가 중요한 이유는 노광공정에 DUV를 사용하다가 7나노 공정부터 EUV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처럼 2나노 공정부터는 하이-NA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 EUV를 이용해서도 2나노 공정이 가능하긴 하지만 경쟁업체가 하이-NA를 사용한다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장비 한 대 가격은 약 3900억 원. 그래도 많은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ASML이 하이-NA EUV를 개발한다고 발표한 이후 아직 완제품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서로 먼저 사겠다고 주문을 넣었습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인텔과 마이크론, 대만의 TSMC가 주문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첫 장비가 과연 어느 회사로 가느냐가 관심사였습니다. 이 장비가 어느 회사로 가느냐에 따라 2나노 이하의 초미세공정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인텔이 그 첫 번째 장비를 가져간 것입니다.

사실 인텔이 첫 번째 장비를 가져가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텔은 2021년부터 하이-NA EUV 관련 개발 협력을 시작했고, 양사가 이미 여러 번 올해 첫 장비를 인텔에 납품한다고 밝혀온 바 있기 때문입니다.
  

ASML의 장비 로드맵. DUV시대는 마무리되고, EUV시대가 열렸습니다. 차세대 EUV 장비인 하이-NA EUV의 첫 고객은 인텔이 되었습니다. ⓒ ASML

 
우리 기업들은 2025년 이후에나 장비 도입 가능

그럼 첫 번째 장비라는 상징성은 인텔에 빼앗겼다 하더라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장비를 가져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네요. 보도에 따르면 인텔이 초기 6대까지 모두 가져가기로 되어 있고, 벨기에의 반도체 연구소인 IMEC도 한 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럼 여덟 번째 장비를 가져오면 될 거 아니냐구요? 아쉽게도 ASML은 현재 이 장비를 일 년에 한두 대 밖에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텔에 약속한 장비를 다 공급하는 것도 2025년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ASML도 2025년에야 연간 생산 가능한 장비 대수가 5대 정도 될 거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하이-NA EUV를 받을 수 있는 시기는 빨라야 2025년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대만의 TSMC와 미국의 마이크론도 주문을 넣은 상태에서 장비를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이크론이 먼저 가져가게 된다면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제껏 줄곧 지키고 있던 1위와 2위 자리가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TSMC가 먼저 가져가게 된다면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300조 원을 투자해서 만들겠다는 팹들은 경쟁력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장비를 어느 회사가 먼저 받아 오느냐에 따라 업계의 판도가 바뀔 수 있습니다.
  

ASML이 발표한 EUV사용 고객사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TSMC 등이 보입니다. 하이-NA EUV 사용 고객사에서 빠지면 경쟁에서도 뒤처지게 됩니다. ⓒ ASML


인텔은 세계 최고의 중앙처리장치 제조업체이지만 파운드리에선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습니다. ASML EUV 장비 도입도 경쟁사에 비해 늦어서 10나노 이하 공정 경쟁에서는 TSMC나 삼성전자에 한참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하이-NA EUV를 선점하면서 추격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투자전문 블랙노트인베스트먼트는 보고서를 내고 인텔의 파운드리 매출 점유율이 지금은 1%도 안 되지만 하이-NA EUV의 도입이 이뤄지면 10년 뒤인 2032년에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삼성을 따돌리고 TSMC에 이어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언론들은 지난 ASML 방문 당시 삼성전자와 ASML이 한국에 짓겠다고 한 R&D센터에 하이-NA EUV가 들어올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양해각서 교환 수준인 데다 구체적인 시행계획이나 일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설령 모든 게 양해각서대로 빠르게 시행이 된다 하더라도 ASML의 생산능력 때문에 2025년 이후에나 도입이 된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반도체 업계의 기술 경쟁에서 2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입니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총력을 다해 어떻게든 따라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늘 경쟁업체보다 몇 년 앞선다는 이야기를 듣던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한두 해 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 낯섭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재계 총수들과 함께 떡볶이 튀김 빈대떡을 맛보고 있다. 오른쪽 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윤 대통령, 박형준 부산시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 연합뉴스

 
오늘 ASML의 차세대 장비의 인텔 납품에 대해 대통령께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며 우리 반도체 업체들이 뒤처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부문 세계 1위 기업이고, SK하이닉스가 HBM을 비롯해 새로운 제품군에서 앞서가고 있는 등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잘되고 있는 줄 알고 있겠지만 실상은 미 정부의 보조금을 등에 업은 인텔과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약진, 한정된 ASML 장비 공급으로 인한 기회 상실 등의 이유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님이 이런 우리 반도체 기업들을 위해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고 하니까 법인세 깎아 주고, 사업장 안전규정 완화해서 인명 사고 나더라도 대충 덮고 넘어가라는 이야기로 잘못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건 기업가가 해 먹기 좋은 나라일 뿐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대통령이 경영계획 짜기도 바쁜 기업 총수들을 시장에 데리고 다니며 떡볶이 먹는 데 줄 세우는 걸로 시간을 빼앗지 않는 나라입니다. 대통령의 행사에 기업 총수들이 따라가려면 해당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간을 빼앗겨가며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기업들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면서도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재벌 총수들을 대신해서 제가 부탁합니다. 기업인이 경영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정치 활동에 들러리 세우는 일은 이제 그만해 주기 바랍니다. 이 치열한 반도체 산업경쟁 중에 도움은 못 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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