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5 13:19최종 업데이트 23.12.05 13:19
  • 본문듣기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가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싫어하는 대표적 독립운동가는 약산 김원봉이다. 이 점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입을 통해 증명됐다. 그런데 박민식 장관 후임으로 발표된 강정애 전 숙명여대 총장은 김원봉과 인연이 두텁다.

강정애 국가보훈부장관 후보자의 시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권준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 1988년에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은 "1917년 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여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고 한 뒤, 권준이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한 일을 설명한다.


독립기념관이 발행한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권준을 소개하는 항목에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다음, 상하이 퉁지대학 공과에서 수학"했다며 이렇게 서술한다.

"같은 해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재기·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 등과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권준과 김원봉
 

권준 장군 ⓒ 자료사진

 

김원봉은 일본 외무성의 경계 대상이었다.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 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외무대신 훈령이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하달됐을 정도다.

일본이 그처럼 경계한 것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들이 마치 홍길동 분신들처럼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출현해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쐈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에 강정애 후보자의 시할아버지도 참여했다.

위 공훈록은 "군자금 조달, 폭탄 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서·총독부·동척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二重橋) 투척 등을 적극 지원"했다고 기술한다. 식민지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폭파 작전에도 참여했던 것이다.

의열단이 그런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것은 일제의 압박이 정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인 신채호가 1923년에 집필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은 "일반 민중이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이므로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의열단원 권준은 그런 피압박 상태를 중국 한커우(漢口)에 가서 호소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위 공훈록은 1926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한구(漢口)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인도·몽고·안남·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됐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권준은 프랑스에 맞서는 베트남(안남) 독립운동가 등과 함께 제국주의의 압박을 국제 무대에서 고발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의열단이 그런 무대의 한국 대표로 그를 내보냈다는 것은 그가 김원봉의 분신으로 활동할 만큼 사상적 무장이 돼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권준의 독립운동은 아들 권태휴로 이어졌다.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권태휴 편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1942년 6월에 군사교육을 필하고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활동"했다며 "1943년부터는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화중(華中) 일대에서 정보 수집 등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고 설명한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주도한 독립군 조직이다. 권준이 여기에 들어간 것은 이 가문이 대를 이어 김원봉과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김원봉은 1942년 12월부터 백범 김구와 제휴했다. 김원봉 라인인 권태휴가 1943년에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양쯔강 중하류 일대에서 지하 활동을 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의 태도 변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정애 후보자가 지명을 받은 4일, 권준 가문과 김원봉의 인연이 언론에 많이 보도됐다. 윤석열 정부가 인사 검증 과정에서 이 점을 검토하지 않았다면, 그런 인연이 그처럼 빨리 보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향후 강정애 후보자의 장관직 수행 과정에서 그 인연이 어떻게 작용할지와 관계없이, 윤석열 정권이 이번 인사조치와 그 인연이 함께 보도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지난 5월 22일 보훈처장 신분으로 보훈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박민식 처장은 김원봉의 독립투쟁을 '여러 가지 그런 활동'으로 표현하면서 "김원봉은 여러 가지로 그런 활동을 했습니다만, 북한 정권과 너무 직결되기 때문에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로 김원봉을 폄하했다.

김원봉의 아나키즘은 전체주의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민식 장관의 인식은 달랐다. 지난 7월 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우리 국민한테 자유를 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전체주의 국가, 자유도 없는 그런 전체주의 국가를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김원봉 같은 경우가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이유로 김원봉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박민식 장관의 주장이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백선엽과 김원봉을 비교할 때 이거는 사실 이야기가 안 되는 거거든요"라는 발언도 했다. 독립투사 김원봉과 친일파 백선엽을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박 장관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두 사람의 비교를 거부했다.

이 정도로 김원봉을 비판했던 윤석열 정권이 김원봉과 인연이 깊은 강정애 후보자를 다른 자리도 아닌 국가보훈부장관에 내정한 것이다.

지난 10월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패한 뒤로 윤석열 정권은 역사전쟁과 이념전쟁의 강도를 낮추고 있다. 홍범도·정율성에 대한 공세도 누그러졌다. 강정애 후보자 건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윤석열 정권이 독립운동과 역사전쟁에 대한 기본 인식을 바꾼 것은 물론 아니다. 현재 윤석열 정권이 벌이는 역사전쟁의 핵심 키워드는 이승만이다. 이승만 동상을 서울 광화문광장 및 워싱턴 한국대사관에 설치하고 이승만기념관을 청와대 동남편에 건립하는 일은 10월 11일 이후로도 변함없이 추진되고 있다.

10월 18일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동상 광화문광장 건립추진위원회'가 출범했고, 11월 1일에는 윤 대통령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500만 원을 기부했고, 11월 15일에는 이승만 토크 콘서트의 전국 순회 일정이 영남대에서 시작됐다. 독립운동이나 역사전쟁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기본 입장은 보궐선거 이후로도 바뀌지 않은 모양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은 이번 인사조치를 통해 김원봉과 관련된 종전의 태도를 누그러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권의 역사관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4월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확고한 철학 없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에 관한 메시지를 임의로 바꾸고 있는 셈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