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0 17:56최종 업데이트 23.12.1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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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있는 메이지 신궁 ⓒ 위키미디어 공용

 
엔화가 1달러당 150엔을 넘나들고 있다. 1990년 이후 33년 만의 역대급 엔저가 이어지면서 원화를 값싼 엔화로 바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11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인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11월 환전거래의 52.5%가 엔화 환전이었다.

한국인의 일본 관광도 증가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이 홈페이지를 통해 11월 15일 발표한 추계치에 따르면, 지난 10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251만 6500명이고 한국인은 25.1%인 63만 1100명이다. 전체 외국인 숫자는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10월보다 0.8% 증가한 데 비해, 한국인 숫자는 무려 219.9% 증가했다. 엔저가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최근 현상을 반영하는 통계치다.
  
역대급 엔저가 아닌 '역대급 한저(韓低)'가 한국인들을 현해탄 너머로 실어나르던 때가 있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바닥을 칠 때인 1909년 4월 11일, 90여 명의 한국인들이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일본 여행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한국통감부 기관지를 모체로 하는 경성일보사가 모집한 제1회 일본관광단이었다.

일본관광단  

2005년에 <동양학> 제37집에 실린 박양신 당시 단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본의 한국병합을 즈음한 일본관광단과 그 성격'은 대한제국 멸망 4개월 전인 1910년 4월의 제2회 일본관광단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친일파 박기순이 히로시마 해군공장을 보고 나서 "혼백이 자빠지고 신(神)이 놀랄 만하다"며 감탄한 일을 소개한다. "이 관광단을 전후해서 관광단의 이름이 붙은 일본 관광은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고 논문은 말한다.

'한저'에 편승해 일본이 부추긴 관광 붐은 대한제국 멸망 2개월 뒤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의 출발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대한제국이 없어지자마자 단체로 일본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의 일원이었던 이기용. ⓒ 위키미디어 공용

 

이 대열에 합류한 관광객의 후손 2명이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각각 1억 400여만 원의 부당이득금을 국가에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귀족 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을 여행한 자작 이기용이 패소 피고들의 조상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기용 후손이 보유한 토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에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은 이기용의 유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라는 점이 인정됐음을 보여준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은 1910년에 출판된 <조선귀족관광단> 등의 자료를 인용해 이기용의 일본 관광을 소개한다. 보고서는 "1910년 10월 23일부터 11월 26일까지 조선귀족관광단 64명이 시모노세키·나고야·도쿄·하코네·닛코·교토 등을 방문하였는데, 특히 도쿄에서는 일본 천황을 비롯한 황족과 가츠라 수상을 비롯한 조야 인사들의 환대를 받았으며, 이토오 묘소에 참배하기도 하였다"라며 "이기용은 10월 24일 서울에서 출발하였다"라고 설명한다.

"가츠라 수상"은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한다'는 밀약을 4년 뒤 대통령이 될 윌리엄 태프트 전쟁부장관과 체결한 가쓰라 다로 총리다. 대한제국 특권층 출신들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을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일본까지 찾아가서 만나보고, 전년도 10월 26일에 죽은 이토 히로부미 묘소에도 찾아가 참배를 했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 강점 전후에 이런 관광 이벤트를 벌인 것은 특권층의 환심을 사서 한국 지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위 박양신 논문은 "일본 측은 관광단에게 해군공창·제철소를 비롯한 선진 공장 시설을 선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제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힘을 과시했으며, 동시에 잘 정돈된 고도(古都)의 사적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역사·문화를 뽐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 측은 관광단이 가는 곳마다 자연발생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다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벌임으로써 한국인의 인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관광단원들은 일본의 문명 앞에 압도되었으며,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열렬한 환영에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을 반기고 한국을 도와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귀국 후는 대개가 입을 모아 일본의 진심과 지도를 역설하며 다녔던 것이다."
 
이 관광단에는 양반가 부인들과 대궐 상궁들도 있었다. 총독부는 이 관광단을 위해 여행도 주관하고 비용 전액도 부담했다. 한국 귀족들에게 공짜 관광 혜택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가성비 높은 관광이었는지는 을사오적 이지용의 부인이 이 여행 후에 보여준 행동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위 논문에 인용된 1910년 10월 26일자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이지용의 부인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 여성에게 '그런 나라에서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경성에 와서 살고 계시니 불쌍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많은 걸 받은 이기용

이 시기에 이기용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기용 편은 1910년 10월에 자작 작위를 받은 그가 이 여행 때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훗날 그는 일왕의 "끔찍한 총애"를 받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받은 술병도 그 증거가 됐을 것이다.

주병을 받은 직후인 1911년 1월, 그에게는 평생의 생활자금이 떨어졌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1911년 1월 13일 일본정부로부터 3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은 일을 그의 핵심적 친일행위의 하나로 열거한다. 은사공채에서 발생하는 이자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친일재산부터 한몫 챙겨둔 상태에서 친일파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기용은 고종황제의 조카뻘이었다. 대한제국에서 황족 신분을 누렸던 이기용은 공짜 여행과 주병과 은사공채 등을 받은 뒤로는 일본 귀족의 책무를 성실히 이행해 나갔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11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공축(恭祝) 일한합병 1주년 기념'을 실어 식민지배를 찬양했다. 황족 출신이 기고하는 이런 글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됐으리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는 옛 황족이자 현 귀족인 지위를 활용해 한국인들을 친일 활동으로 결집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1917년에는 친일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을 맡았고, 1925년에는 일왕에 대한 조선 특권층의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맡았다. 1937년에는 지도층과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국방협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전쟁 중인 1943년 10월 15일에는 <경성일보>에 학도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1889년 생인 이기용은 대한제국 멸망 당시 21세였다. 남들보다 젊은 나이에 일본 귀족이 됐기 때문에, 함께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 대다수와 달리 일제강점기 막판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해방 4개월 전인 1945년 4월에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고, 7월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에 참여했다.

그런 뒤 8월 15일에 '불편한 해방'을 맞이했다. <친일인명사전>은 "후작 이해승과 함께 1910년 10월 수작자로서 해방 이후까지 생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1948년 1월 20일자 <경향신문> '친일파 속속 단두대로'는 18일의 친일파 체포 소식을 전하면서 "왜제의 끔찍한 총애를 받던 이기용을 정동 자택에서 무난히 체포하여 서대문경찰서에 구금"했다고 보도했다.

상반기에 반민특위 활동이 왕성했던 1949년에 이기용은 59세였다. 반민특위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2년 6월과 재산 절반 몰수를 선고했다. 하지만 "형집행이 정지되어 보석으로 풀려났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1910년에 공짜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은 일본의 힘에 놀라 감탄사를 발하며 친일의 길을 밟아나갔다. 그 관광단의 일원인 이기용은 35년 후에 일제 패망을 목격하고 그 뒤 반민특위에 붙들렸다. 1910년 관광 당시에 나이가 어렸기에, 그 여행에서 본 것들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을 기회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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