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3 17:42최종 업데이트 23.12.0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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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별재판부의 재판 광경 ⓒ 자료사진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 청산이 무산됐다지만, 단 한 명도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 근거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정리하는 대목에서 "1951년 2월 2대 국회의 의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공포에 의하여 반민법과 관련된 모든 판결을 무효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그 효력이 없어졌다"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친일 청산이 그렇게 무효가 되기 전까지 잠깐이나마 '옥고'를 치른 친일파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사형선고까지 받은 경우도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단 하나, 친일 경찰 김덕기다.

혼자서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유일한 최악질 친일파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김덕기가 사형을 선고받은 날은 1949년 7월 1일이다. 이 시점은 친일파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시위하고(6.2) 반민특위를 공격하고(6.3)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6.6)하는 등의 흐름이 이어지던 때였다.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뒤였기 때문에 최악질 친일파들을 추가로 체포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가 힘든 시점이었다. 최악질 친일파들이 법의 심판대에 제대로 올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김덕기가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죄질이 가장 나빴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상태에서도 혼자서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그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최악질'이라고는 말하기는 힘들어도 사형을 받을 만한 악질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1000명 이상 검거한 친일 경찰
 

1949년 3월 11일 자 경향신문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덕기는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기 4년 전인 1890년에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했다. 조선총독부 설치 이듬해인 1911년에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23세 나이로 일제 경찰에 발을 들였다. 이때부터 55세 때인 1945년까지 일왕(천황)의 녹봉을 받았다. 32년간 안정적으로 친일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순사보에서 시작한 그는 순사-경부보-경부의 상급인 경시 계급까지 승진했다. 37세 나이로 경시가 된 1927년에 평북 경찰부 고등경찰과장이 됐다. '성공'한 친일 경찰의 반열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강원도에서도 근무하고 평북에서도 근무하고, 압록강 너머에서도 근무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덕기 편은 그가 경부로 승진해 평북경찰서에 근무한 1922년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8월부터 관동청 안동경찰서 경부를 겸직했다"고 설명한다.

관동청은 일본이 뤼순(여순)·다롄(대련) 조차지(租借地)와 남만주 철도를 지키려고 설치한 기관이다. 평안북도에서 근무하면서 관동청 관할인 안동(단둥) 경찰도 겸했으니, 독립군들이 오가는 길목을 다니며 활동한 셈이다.

그는 44세 때인 1934년 행정관료로 전업해 전라북도 내무부 산업과장이 됐다. 그 뒤 함경남도에서도 근무하고 평안북도에서도 근무하고 경상남도에서도 근무했다. 경찰 시절에 평안북도와 압록강 이북을 오간 이력까지 감안하면 활동 범위가 꽤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근무지가 38선 이북이었다면, 북한에서 친일 청산의 대상이 됐거나 아니면 월남을 했을지도 모른다.

행정관료로 근무할 때는 부지사급인 평북 참여관과 경북 참여관을 지냈다. 경찰 순사보로 시작해 고위급 행정관료까지 승진했던 것이다.

그의 근무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년간의 관료 시절에는 전북-함남-평북-경남에서 근무했다. 한반도를 오르내리는 식으로 임지가 변경됐던 것이다.

반면, 21년간의 경찰 시절에는 강원도에서 7년 근무하고 평북에서 14년 근무했다. 평북에 있는 동안에 관동청 경찰도 겸임했다. 독립군이 오가는 곳의 일본 경찰이 그를 오랫동안 필요로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일한 반민특위 사형수가 된 것은 이 시절에 그가 독립운동에 상당한 타격을 줬기 때문이다.

그의 반민족행위가 경찰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행정관료 시절에는 시국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내선일체 이념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평북 경찰 일을 한 데서 나타나듯이 그는 그곳을 무대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 일에서 혁혁한 기록을 남겼다.

김덕기가 반민특위에 체포(2.8)되고 1개월 뒤에 보도된 1949년 3월 11일자 <경향신문> '김덕기의 악질 죄상'은 "그가 검거한 사건 수는 무려 1천 건. 그중 9.6퍼센트가 사형, 9.4퍼센트가 무기징역, 10퍼센트가 10년 이상 징역, 71퍼센트가 1년 이상 징역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가 검거한 사람의 10명 중 1명은 사형됐는데, 총 검거 수가 무려 1000명을 넘었다. 주로 독립운동을 수사한 점을 감안하면 그의 손에 의해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희생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위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게 체포된 혁명투사를 보면 오동진 창의단 단장, 편강렬 의사, 평북 낭림대장 정창헌 외 3명은 김덕기 자신이 무장 경관을 대동하고 현장에서 사살! 그 외에도 전 농림장관 조봉암, 박헌영, 고 안창호 제씨(諸氏) 등도 그가 체포하였다 한다."

김덕기는 독립운동가들을 재판에 넘겨 사형을 받게 한 일도 많지만, 현장에서 그냥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장 경관들을 대동했으므로 얼마든지 제압해 체포할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현장에서 죽이고 적당히 둘러대는 일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3년에는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던 의열단 단원들을 체포했다.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에게도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 때문에 1924년 8월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은 "조선 총독이 주는 경찰 최고의 훈장"이라고 설명한다.

김덕기가 1927년에 체포한 거물급 독립운동가 오동진은 1944년 감옥에서 순국했다. 원호처가 국가보훈처로 개칭된 지 2년 뒤인 1987년에 발간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은 "모진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라고 기술한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직후에 김덕기는 오동진을 옥사에 이르게 만든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9년 2월 10일 자 <동아일보> '김덕기 수감'은 그가 이틀 전에 경춘선 마석역에서 검거된 일을 전하면서 "우리 오동진 의사를 체포하여 옥사케" 한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그해 5월 8일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에 따르면, 김덕기는 그해 5월 2일 제2차 공판 때 오동진 체포를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경찰 상부에 있었으니 책임을 지겠다고 답했다. 오동진이 순국한 데 대한 책임이 없음은 물론이고 체포도 직접 하지 않았다는 말을 그렇게 했던 것이다.

김덕기가 지금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홍범도에 관해 "비록 글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적인 의협심이 있어"라고 평했다. 홍범도는 사냥이나 군대 운영, 전투 등에서는 분명히 지식인이었지만, 박은식 같은 유학자들의 눈에는 무학으로 비치기 쉬웠다. 박은식 같은 선비 출신들은 홍범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교육 수준이 높지 않다는 점을 동시에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의 상당수가 고등교육 이수자인 데서 알 수 있듯이, 홍범도는 공산주의 사상에 접근하기 힘든 처지에 있었다. 윤석열 정권은 그런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로 내몰며 육사 흉상 철거를 시도했다. 홍범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악수를 둔 셈이다.

만약 김덕기가 지금쯤 살아 있다면 이보다 훨씬 더한 악수를 뒀을지 모른다. 홍범도를 공격하는 쪽은 그가 일본군에 쫓겨 러시아로 피한 일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는 데 비해, 김덕기는 그런 근거도 없이 도산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체포를 시도한 일이 있었다. 중국에서 대중 강연회를 여는 안창호를 중국 정부의 힘을 빌려 체포할 목적으로 그런 거짓 제보를 했던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에 인용된 1959년 7월 8일자 <국민보> 기사에 따르면, 김덕기는 중국 지린성(길림성) 헌병사령관에게 "길림에 한국인 공산당 5백여 명이 집합한다니 잡아주오"라며 "놈들은 당신네 만주를 뒤덮으려는 놈들이요"라고 허위 제보를 했다. 이렇게 제보해 중국군이 체포하도록 한 뒤 신병인도 절차를 밟으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체포됐지만, 중국 정부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덕분에 김덕기의 작전은 무산됐다. 중국 정부를 속여 신병 인도를 받으려던 그의 구상은 실패로 귀결됐다.

독립운동을 이처럼 훼방한 김덕기에 대해 검찰은 1949년 6월 3일 제4차 공판 때 사형을 구형했다. 친일 극우세력이 친일 청산을 훼방하던 이 시기에 검사가 준엄하게 사형을 구형하자 방청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때 마침 방청하고 있든 방청객들은 사형 구형이 내리자 민족정기는 사라 있다는 듯이 일제히 우뢰 같은 박수로 법정 내를 진동케 하였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4일 자)

재판부는 이 구형을 받아들여 7월 1일 사형을 선고했다. 이것이 친일파에 대한 유일한 사형선고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1950년에 풀어주기 전까지 그는 한동안 사형수로 살아야 했다.

김덕기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죽이거나 사형으로 내몬 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김덕기 한 사람만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누가 봐도 불공정했다. 김덕기는 친일청산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체험한 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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