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8 13:28최종 업데이트 23.11.2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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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붙어있는 정당 현수막 (자료사진) ⓒ 연합뉴스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 청팀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 백팀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어릴 적 운동회를 하면 꼭 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를 의식한 상대 팀은 더 크게 목청 높여 반박 노래를 부른다. 그럼 나는 더, 더 크게 소리 높인다. 정신 차려보면 대회 내용은 기억도 안 나고 퉁퉁 부은 목청만 남아있다.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사무처에서 각 시도당에 내려보낸 공문 속 2030 현수막 홍보 시안 문구가 논란이 됐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나?" 청년 겨냥이 아니라 저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심각한 이 문구에 대부분 경악했다. "공식 시안이 아니다"는 해명에도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결국 민주당은 20일 공개사과했다. 사건은 점이 아니라 면이라 했던가? 난 의문이 든다. 민주당은 어쩌다 누가 봐도 말이 안되는 무리수를 두었을까? 그 답은 길거리에 있었다.
     

조정식 민주당 사무총장 명의로 지역 시도당에 내려보냈다는 공문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현수막 시안 ⓒ 더불어민주당

 
차라리 '귤 팝니다' 현수막이 낫다

우리 동네 정치인들은 1년 내내 그들만의 운동회를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여기저기 현수막이 걸려있다. 위의 현수막을 아래에서 공격하고, 그것을 옆에서 조롱한다. 당최 핵심 내용이 무엇일까? 서로를 '국민의짐', '더불어돈봉투당'이라고 비난하는 단어밖에 안 보인다. 차라리 옆에 걸려있는 '귤팝니다' 현수막이 낫겠다. 적어도 어디서 얼마에 무엇을 파는지는 쓰여 있으니.


오늘 출근길에도 뒤집힌 현수막을 봤다. 이걸 건 사람은 관리조차 버거운 듯하다. 또 다른 곳의 횡단보도에 서 있는 아저씨는 현수막에 가려진 2층 가게 간판을 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폈다 한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 규제'를 없앤 옥외광고물법 개정 이후인 2022년 12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접수된 현수막 관련 민원은 무려 1만 4197건. 2022년 9월부터 2022년 11월까지 접수된 동일 민원이 6415건인 것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동네를 채팅창처럼 쓰고 있는 정치인들은 이 상황을 알까? 난 그들에게 이런 현수막을 내걸고 싶다. "시민은 모르겠고, 정치인은 이름 알리고 싶어." 

현수막은 단순히 잉크 뿌린 천 쪼가리가 아니다. 명확한 메시지를 담는다.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와 태극기를 새긴 천을 휘날렸고, 4.19혁명이 일어날 때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뛰쳐나와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87년에는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라고 써있는 검정색 현수막을 들었다. 그 중엔 분명 오늘날 정치인이 된 청년들도 있을 것이다.

총도 칼도 막지 못하는 얇은 천 쪼가리 하나에 몸을 던진 학생이었을 것인데, 왜 그 누구 하나 오늘날에 걸린 의미없는 비방용 현수막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을까. 이제는 현수막에도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지자체에서 옥외 간판의 디자인을 통일해 동네 미관을 개선한 것처럼, 현수막도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된다. 혹은 2030 세대가 SNS를 능숙하게 다루는 점에 기반해, 온라인 상에 대형 뉴스 칸을 만들거나 애플리케이션 배너광고를 실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거리 홍보 수단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독일은 선거 유세 차량이 없고, 유권자가 후보자 지지 스티커를 승용차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미 전남도의회, 부산시의회 등 각 시도에서는 시민들의 불만을 반영해 정당현수막 규제 조례안을 발의했다. 허위, 혐오, 비방의 내용을 금지하고 읍·면·동별로 걸 수 있는 개수를 제한하는 방식이다. 정치 현수막 전용 게시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현수막에 의해 동네가 망가지고 있다
 

도로에 뒤집혀서 걸린 현수막 ⓒ 정누리

 
현수막 경쟁에 뛰어든 정치인들의 입장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현수막은 시민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수단 중 하나다. 자신의 관심사 외에 접하기 힘든 마이크로 미디어 시대에 강제라도 이름 석 자를 노출시킬 수 있다. 한 친구는 자기 동네 국회의원 이름이 친구 이름과 비슷하다며 출마했냐고 놀리기 바쁘다. 어쨌거나 그 국회의원은 자신의 이름을 시민에게 각인시키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모든 마케팅의 첫 번째는 '노출'이라는 점에서 정치인들에게 매혹적인 선택지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성 없는 노출은 거품일 뿐이다. 게다가 송도에서는 한 대학생이 킥보드를 타다가 현수막 끈에 걸려 넘어지고, 소상공인들은 가게 간판이 안 보인다며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전국 지자체에서 철거한 현수막 무게가 약 1300톤으로 대선이 있었던 지난해 1분기보다 200톤이나 늘었다. 정치인들은 일반 기업 및 단체의 환경 규제 법규조항까지 담당하는 일꾼들이다. 그런 이들이 먼저 동네를 망가뜨린다면, 그 누가 행정의 말을 듣겠는가.

또한 일반 시민들이 현수막을 지정 게시대에 걸어야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어떤 구역에서든 현수막을 달아도 허용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특권 아니겠는가. 국회에서는 지난달 각 정당이 읍·면·동 별로 설치할 수 있는 현수막을 최대 2개로 제한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문턱을 아직 넘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화를 낼 땐 아직 애정이 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냉소적으로 변한다. 임계점을 넘기 전에 하루빨리 현수막의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 나는 요청한다. 그들 말대로 정치는 잘 몰라도, 동네를 살리고 싶은 청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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