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8 07:07최종 업데이트 23.11.2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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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이 지난 13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 및 향후 정책 추진방향 발표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는 여전히 '주 69시간' 카드가 아쉬운 모양이다. 지난 3월 정공법을 택했다가 된통 두들겨 맞고 추진을 접는 듯하더니, 여론조사 결과라는 새로운 패를 들고 8개월 만에 슬그머니 다시 나타났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기존보다 더 넓게 확대하자는 여론이 높았다면서 '일부 업종·직종'에서 협의를 거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여론조사에 근거한다니, 대번에 질문이 나온다.10명 중 8명이 반대하는 재활용품 규제 철회는? 반대가 60%를 넘나들었던 용산 대통령실 이전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론조사를 앞에 내세우는 방식이 정권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어떻게든 '69시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도드라진다.   

'바짝 일한 다음 놀면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의 근원

'악마의 맷돌'.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에 대한 예상 이상의 극심한 반발과, 정부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시간 제한을 풀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며 떠올린 개념이다.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그의 역작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동학을 논하며 '이중운동'을 이야기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자기조정시장'이 인간과 사회의 기본적 삶의 토대를 해체하고 잠식해 갈 때 두 방향의 운동이 벌어진다. 즉,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시장 이윤 획득을 위한 자본의 증식 과정 속에서 인간과 자연을 '갈아 버리려' 하면, 이런 폭거에 대항해 사회는 '자기보호'를 위한 운동을 주기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것이 '이중운동'이다. 

'주 69시간'의 연원이 되는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발언'은 '악마의 맷돌'을 문자 그대로 표현한다. 게임이라는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떤 순간에는 인간의 노동시간을 무자비하게, 주 120시간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바짝 일한 다음에 놀면 되는 거 아니냐. 

상품의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나 사회적 수인한도를 뛰어넘어서라도 투입할 수 있어야 인류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 그리고 이것이 자본가 - 노동자 양자 간의 자유계약에 의해 보증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것'이라는 아이디어다. 

40년 전 마거릿 대처가 "사회 같은 것은 없다"라고 단언했던 것처럼, 윤석열 대통령은 '주 120시간'과 '부정식품을 선택할 자유'를 주창하며 '악마의 맷돌'을 더 빠르게 회전시켜 보려 했다. 그러나 맷돌의 회전 속도에 비례해 다른 한 켠의 길항하는 운동의 정당성도 강화된다는 사실은 간과한 듯하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2022년 1월 10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중소기업 경영 및 근로환경 개선 현장 방문을 위해 인천 남동공단 경우정밀을 찾은 가운데 공장 관계자와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주 69시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폭발은 노동시간을 갈아내는 '악마의 맷돌'에 대해서만큼은 더 이상 용납이 안 된다는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의 일면을 보여 준다. 심해도 너무 심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이 이미 세계에서 손꼽히는 살인적인 수준이라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여기서 '살인적'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산재로 인정되는 과로사만 매년 500명을 넘나든다. 이것도 까다로운 산재 기준에 따른 통계고, 실제 장시간 노동에 따른 사망자 수는 연간 26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WHO와 ILO의 공동연구(2021)에서 2016년 한해 대한민국 뇌심혈관계 질환 사망자 3만 8000명 중 7%가 장시간 노동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추산에 따른 것이다.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사망 영향률을 기록한 프랑스와 비교하면 2016년 기준으로 2000명이 더 사망한 셈이다. 이 정도면 국가적 대참사가 벌어지고 있다고 비상사태를 선포해도 지나치지 않은 수준이 아닌가.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인데, '69시간'은 극단적 가정이라거나, 평균 노동시간은 줄어들 것이라거나,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거나, 나중에 충분히 보상휴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정부의 해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렇게 노동시간을 쥐어짤 수 있는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선택권'이나 '휴가를 얻을 수 있는 권리'같은 것은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감각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렬한 저항은 시장자유주의 보수의 입장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반공보수적 입장으로 선회한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맷돌 회전속도'는 더 가속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빨랐다. 아무리 시장친화적인 국민들이라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니, 나름 야심 차게 진행하려는 노동개혁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념적 대결 구도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키는 카드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맷돌을 멈추기에도 쉽지 않아
 

지난 3월 20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주69시간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묻는 조사판이 놓여있었던 모습. ⓒ 유성호

 
대한민국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가 우회로를 택해 어떻게든 주 52시간제의 벽을 허물어뜨리려는 시도는 부분적으로는 관철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구조적 불안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번 노동부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난다. 전적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노동자 중 상당수도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데는 찬성한다는 사실이다. 격렬하게 반대하는 노동자들도 상당하지만 한편에서는 그만큼의 여유가 있거나 또는 그런 선택이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노동자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노동시장은 다층적이며, 수많은 제약 속에서 노동자들에게 현실적인 판단을 강요하게 만든다. 노동시간 결정권 - 충분한 임금 - 고용안정은 이론적으로는 트릴레마 관계가 아니지만 희한하게 대한민국에서는 실질적 트릴레마 관계다. 최소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두 번째는 이러한 교착을 타개할 의지가 없는 정치의 무기력함이다. 근본적으로는 포괄임금제를 폐지·규제해야 하고, 수당이 아닌 기본급 중심의 임금체계를 구성해야 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일자리 숫자를 확대하고 소득축소는 최소화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수년 전부터 과제로 지적되어 왔던 사항들이다. 

그런데 포괄임금제 폐지는 고사하고 규제조차 수년째 진척이 없다. 기본급 확대는 고사하고 최저임금에 상여금을 산입하고, 연장수당에 세제혜택을 확대하는 법안들이 발의된다.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한 중소기업에 대한 세액공제 실적은 연간 10억 원도 되지 않는 현실이다. 현실의 벽은 높은데, 정치의 의지는 너무 낮다. 윤석열의 '주 69시간제'에 분노하면서도 이재명의 '주 4.5일제'에도 크게 호응하지 않는 이유다. 국민들은 구호가 아니라 변화를 원한다. 

장시간 일하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 없는 사회, 연장근무 없이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사회, 야근하지 않으면 승진할 수 없는 사회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이미 그 증표는 0.78이라는 충격적인 수준의 출생률로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는 '맷돌'에 투입할 인간 자체가 줄어드는 자기파괴 운동으로 이행 중인 상황이다. 그렇기에 윤석열 정부의 69시간 전면적 관철은 불가능하겠지만, 동시에 지금의 교착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정치가 분발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국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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