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5 17:51최종 업데이트 23.11.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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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태평양 전쟁 당시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섬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벌인 타라와 전투. ⓒ 위키미디어 공용


오는 28일 유해로 봉환되는 고 최병연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이중·삼중의 피해자다. 군무원인 일본 해군 군속으로 강제징용된 그는 징용 피해뿐 아니라 직접적인 전쟁 참화까지 입었다. 지금의 키리바시공화국에서 벌어진 타라와전투 때 도망가거나 투항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죽음을 맞았다. 호주와 하와이의 중간쯤인 이곳 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희생됐던 것이다.
 
동아시아 곳곳의 일제 식민지 주민들 상당수는 무기 같은 방어 수단도 갖추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내몰렸다. 병사가 아닌 최병연 같은 이들은 연합군 코앞에서 항복하거나 도주할 기회마저 차단당했다. '영광스러운' 옥쇄(玉碎,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을 뿐이다. 최병연도 그런 피해자다.
 
강요받은 집단 죽음

1879년에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인 태평양전쟁 막판에 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열도는 1945년 6월까지 3개월간 미군의 공세에 노출됐다. 이로 인한 일본 측 사망자는 약 1만 8천 명이고 그중 1만여 명이 오키나와 주민들이다.
 
2010년에 공저작인 <현대 일본정치의 쟁점>에 실린 최기성 도쿄대 연구원의 논문 '일본 정치와 민족문제-오키나와의 전쟁 체험을 중심으로'는 "철혈근황대·여자학도대 등에 편성되었던 소년·소녀를 포함한 일반 주민 다수가 전투에 휩쓸리거나 일본군의 전투에 방해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집단 자결로 내몰리거나 희생되었다"고 한 뒤 오키나와인들에게 강요된 집단 옥쇄를 이렇게 설명한다.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은 당시 섬을 지배하던 수비대장이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진지 내에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투항을 권고하러 온 주민들을 스파이로 처형하는 등 긴박한 상황 속에서 게라마섬과 토카시키섬 주민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한 명령의 결과였다."
 
압도적인 적을 만나면 옥처럼 부서지라는 명령은 식민지 한국인들에게도 떨어졌다. 해외 전쟁터가 아닌 한국 내에서도 그런 선전전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서정주 편에 따르면, 이 친일 시인은 1944년 8월호 <국민문학>에 기고한 '무제-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여'에서 옥쇄를 찬미했다.
 
"어머니여, 저 용맹스런 함성은 저곳이리 / 푸른 혈조가 끊임없이 내려와 / 커다란 목소리, 나를 부른다 /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미국과 영국의 군대를 만나 용감히 싸우되 항복하거나 도주하지 말며 부득이할 경우에는 희생제물이 되라는 메시지를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이런 선전전이 세상을 압도하는 속에서 한국인들은 죽음으로 속절없이 내몰렸다. 지금의 키리바시공화국에서 벌어진 타라와전투에서 이런 식으로 희생된 한국인은 문서상으로 1117명이다.
 
작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0권에 실린 심재욱 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의 논문 '태평양전쟁기 일본 해군 조선인 군속의 길버트제도 동원과 사망 피해'는 "일반적으로 타라와전투(1943.11.20~25)로 불리는 길버트제도의 전투는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한 대표적인 전투"라고 한 뒤 한국인 피해 실태를 이렇게 기술한다.
 
"일본 해군의 건설부대였던 제111특설해군설영대 및 제4특설해군시설부 타라와·마킨 파견대 소속으로 약 1409명이라는 다수의 조선인 군속이 투입된 점과 그 대다수인 1117명이 사망한 점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논문에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뒤 해상자위대 호위함장과 간부학교 교관 등을 지낸 다니우라 히데오(谷浦英男)의 저서인 <타라와·마킨 전투 - 해군육전대 길버트 전투기>가 인용돼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이 책에서 다니우라는 미군이 일본인으로 파악한 전사자도 실은 한국인일 거라며. 희생자들의 시신이 시커먼 숯처럼 된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대부분 비무장 조선인으로 구성된 비무장 공원 집단으로 천 명 가까이 되었지만, 이 시점에는 이미 절반 정도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숙소에 딸린 대형 방공호에 대피해 포 폭격을 피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상자도 꽤 있었을 것이다. 미군의 최종적인 함포 사격과 돌입한 해병대의 화염방사기 공격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타죽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숯이 된 사체를 보고 미군은 '일본군 500명'으로 추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고 미 해병대가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아무 저항도 못하고 그냥 타죽었을 것이라는 게 다니우라의 판단이다. 도망도 못 가고 숯처럼 타버린 사체들을 보면서 그날의 옥쇄 상황을 그렇게 추정했던 것이다.
 
일본군이 옥쇄를 강요하기도 했지만, 조선인들 역시 투항을 선택하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 한국인들이 미군에 항복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위 논문은 연합군이 작성한 포로 명부에 기재된 한국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이렇게 설명한다.
 
"<부로명표>에서 확인되는 다수의 조선인 포로들의 진술에 의하면, 일본군은 '생포될 경우 미군이 솔로몬제도의 조선인들처럼 증기 롤러로 깔아뭉갤 것, 말할 수 없는 고문을 할 것, 즉시 총살할 것, 코와 귀를 베고 눈을 팔 것' 등이라는 내용을 조선인들에게 전파하였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도주하거나 미군에 투항하지 못하게 하고자 사전에 단단히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심신이 극단적으로 억압된 한국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미군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줬던 것이다.
 
두 아들의 아버지 '타라와 46번 유골'
 

21일 SBS <8시 뉴스>에서 보도한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80년 만에 고국 온다"의 한 장면 ⓒ SBS


언론보도에 따르면, 24세 청년 최병연은 1942년에 해군 노동자로 징용됐다. 아내와 두 아들을 집에 둔 채 키리바시로 끌려간 그는 이듬해 타라와전투에서 숨을 거뒀다. 스물다섯에 그렇게 된 것도 억울하고, 가족을 두고 그렇게 된 것도 억울했다. 자기 일을 하러 갔다가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순전히 군국주의세력의 이용물이 되어 그렇게 됐으니 억울함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유해의 신원이 확인된 것은 2019년 8월이다. 그 전까지는 '타라와 46번 유골'로 불렸다고 한다. 신원이 확인된 뒤 곧바로 돌아왔어야 하지만, 미국 국방부의 내부 절차와 코로나19로 인해 이제야 돌아오게 됐다. 작년 보도에 따르면, 80대가 된 두 아들이 수십 년간 애타게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최병연 같은 한국인들을 최종적으로 해친 것은 미군이지만, 이들을 그 지경으로 내몬 것은 일본이다. 일본은 본인들의 의사를 무시하며 강제징용한 뒤 전투 현장에서 옥쇄를 강요했다. 강제징용에 더해 사실상의 집단학살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이런 피해자의 유해가 8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니,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최소한의 입장 표명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해봤자 소용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독도 강점 118주년인 금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 인근 185킬로미터 지점에서 한미일 미사일 방어훈련을 벌였다. 한미일 안보협력의 형식적 리더는 미국이지만 실질적으로 끌고가는 쪽은 일본이라는 점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다.
 
대한제국 강점 113주년인 금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인 이날 일본은 제주 남방 해상에서 한미일 미사일 방어훈련을 벌였다.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이, 금년 들어 이런 날마다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입 닥치고 협력이나 하라'는 메시지로 이해될 만하다.
 
최소한의 입장표명이라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18주년인 이달 17일, 일본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스탠퍼드대학 공동 좌담회를 열었다.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눈물을 짓누른 채 그런 퍼포먼스를 하필이면 11월 17일에 연출한 것이다.
 
한국 시각 17일에 맞춰 좌담회를 열어도, 현지 시각을 기준으로 보도될 가능성이 더 크다. 훗날 더 오래 기억될 현지 시각 11월 17일에 행사를 열었다는 게 중요하다. 의도성이 짙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날 윤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저와 가장 가까운 기시다 후미오 총리님", "기시다 총리님과 한일 간 협력의 지평을 첨단 과학기술 분야로 확대해 나가기로" 한 데 이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발언했다.
 
수상관저 홈페이지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과학기술 분야의 제휴는 변화하는 일한관계를 상징하는 영역이 되고, 일·한 그리고 일·미·한이 연대하여 세계를 바꾸어가고 오늘의 논의가 그런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한일 연대가 세상을 바꿔가고 있다는 자평을 담은 발언이다. 최병연 같은 피해자들의 한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한국을 자국 방위에 끌어들이는 일본의 뻔뻔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이 정부 대표가 되는 고 최병연 추도식이 12월 4일 열린다. 이것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이 끝나지는 않는다. 일본 정부가 이런 일에 최소한의 입장 표명이라도 하도록 촉구하는 노력이 한국 정부에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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