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6 11:52최종 업데이트 23.10.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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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 (자료사진) ⓒ 연합뉴스

 
30대 후반의 기자 부부가 있다. 각자 종합 일간지의 정치부와 경제부에서 바쁜 취재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시에, 3살 된 아들을 키우고 있다. 가사와 육아는 최대한 '반반' 하려고 하지만, 어린이집이나 육아를 돕는 친정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즉각 대응하는 것은 주로 아내 다솜(가명) 몫이다.

"저도 남편도 비슷하게 바쁘지만, 친정에서 육아를 도와주시다 보니까 아무래도 저랑 소통하고요. 그러다 보니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을 가거나 할 때 시간을 내는 게 제가 됐어요." 다솜은 다음 인사 때 국제부나 온라인뉴스팀처럼 출근 시간이 비교적 늦거나 '돌발 야근'이 잘 발생하지 않는 부서에 지원할 계획이다.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에 클라우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선정됐다. 1990년 하버드대 경제학과 최초로 여성 종신 교수로 임명된 그는 성별 소득 격차, 여성 노동력 등에 대해 연구해 온 경제사학자다. 2021년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생각의힘)은 작년에 관련 취재를 위해 사놓았던 책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차일피일 독서를 미루고 있다가, 그의 노벨상 수상을 기화로 다시금 꺼내 들었다.

요즘은 일·가정 양립이 전제라지만... 누가 가정의 '온콜'에 대응하는가
 

클라우디아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표지 ⓒ 생각의힘


책은 지난 100여 년간의 미국 대졸 여성에 초점을 맞춰 성별 소득 격차를 이야기 한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 1878~1897년 출생 여성은 가정과 커리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1920~1945년 출생 여성은 '선(先) 일자리, 후(後) 가정'이었다. 1946~1965년 출생자는 가정을 먼저 일군 후 일자리로 시선을 돌렸고, 1966~1979년에 태어난 여성은 고소득 전문직으로 대거 진출했으며, 피임약의 발명으로 출산을 뒤로 미뤘다. 1958~1979년 출생자로서 1980년대부터 대학에 들어간 마지막 집단은 커리어와 가정을 모두 거머쥐기 위해 노력하는 부류들이었다.

커리어와 가정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이전 시대의 여성과 달리, 이제 여성의 일‧가정 양립 자체는 당연한 전제로 여겨진다. 문제는 맞벌이 부부 가운데 누가, 가정에서 일어난 돌발 상황에 누가 대처하느냐다. 책에서는 긴급 호출에 지체없이 대응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영단어 '온콜'(on-call)이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골딘은 미국에서의 성별 소득 격차를 직종 분리보다도 직종 내 격차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나 직종 내 성별 소득 격차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크다. 남성과 여성이 대학 졸업 당시에는 거의 비슷한 출발선상에서 시작하다가도 졸업 후 10년이 흐르면 상당한 임금 격차를 드러내게 된다. 골딘이 말하는 교수‧변호사‧금융계 같은 전문직, '탐욕스러운 일자리'(greedy job)는 장시간 노동에 시간 사용의 유연성이 없는 대신 임금은 다른 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전문직 부부라 하더라도 '직장과 가정에서 누가 온콜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보통은 남성이 직장을, 여성이 가정을 택했다. 그것이 부부 둘 다 공평하게 가사와 육아에 더 힘쓰는 것보다 전체적인 소득 감소를 줄일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여성들은 주 양육자로서 노동 시간에 유연성을 꾀하는 대신, 승진과는 멀어지며 임금 상승이 더디게 된다. 반면 남성들은 가정일을 덜 챙기는 대신 직장일에 더욱 몰입해 임금 상승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러한 현실이 차곡차곡 쌓여, 날이 갈수록 남녀 간에 소득 격차가 심화되는 것이다.

골딘은 이들 일자리의 산업적 특성이 성별 소득 격차를 낳는다고 본다. 특정 클라이언트, 특정 거래 상대, 특정 고객과의 모든 일을 챙기는 '온콜' 상태를 강요하는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책에서 "남녀 사이의 소득 차이는 일터에서의 편견이나 가정 친화적 정책의 부족, 그 밖에 빠른 해법들이 지적하는 문제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다"(306쪽)고 말하며 다른 요인들은 부차적으로 치부한다.

미국보다 심각한 한국... '스펙'이 같아도 돈 덜 버는 여자들
 

2000년 이후 각국의 통계로 국가별 보고연도가 다르며, 주황색 점이 2000년 이후 첫 통계, 초록색 점이 가장 최근 통계임. 점이 왼쪽에 있을수록 남녀임금격차가 적음. (데이터출처 : OECD, 2022년 1월 기준) ⓒ 이종호

 
성별 소득 격차는 한국에도 엄존한다. 아니, 더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성별 간 임금 격차는 31.1%다. 남성 직장인이 100만원을 받는 동안, 여성은 69만 원을 받는 데 그쳤다는 얘기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이래 26년째 부동의 1위다. 미국은 44개국 중 6위로 16.9%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자리의 구조적 특성이 성별 소득 격차를 초래한다고 봤던 골딘의 진단과 달리, 한국에서는 그가 상대적으로 배제했던 요인들 -젠더적 편견- 이 여전히 노동 시장에서 작동 중이다.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와 오병돈 연구원이 쓴 논문 '경력단절 이전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2019)를 보면 같은 스펙일 때도 대학 졸업 이후 2년 이내 여성의 소득은 남성의 82.6% 수준이었다. 골딘의 주장하는 바처럼 '성별 소득 격차'의 주된 시작점인 육아로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는 사회 초년생일 때부터 성별에 따른 소득 격차가 존재한다.

남성 합격자 비율을 정해놓고 여성 지원자들의 점수를 낮춘 기업들의 사례가 심심찮게 보고 될 만큼, 한국에서 채용 성차별은 낯선 일이 아니다. 직장인들이 직접 매긴 직장 내 젠더 감수성 지수가 100점 만점에 73.5점인 C등급(22일 직장갑질119 설문 결과)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직장 내 성차별은 한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골딘도 걱정하는 한국의 저출생... 해법은?
 

클라우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하버드 대학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AFP/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졸 여성들의 일‧가정 모두를 잡기 위한 분투를 100년에 걸쳐 시계열적으로 분석한 골딘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성별 소득 격차를 해소하는 세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 경제적 해결책으로서 시간 유연성이 있는 일자리의 생산성을 높인다. 둘째, 돌봄에 관한 정부 지원을 늘려 '돌봄의 사회화'를 꾀한다. 셋째, 인식적 해결책으로서 '온콜'에 관한 상충 관계가 발생할 경우 '여성은 가정, 남성은 직장'하는 식의 젠더적 규범을 바꾼다.

앞서 소개한 다솜 부부의 사연 또한, 골딘이 말하는 세 가지 방책이 모두 실현돼야 문제 해결이 가능해진다. 거기에 더해 한국 사회에서는 직장 내에서 작동하는 성차별까지 예민하게 감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0.86명'(2022년 1분기 합계 출산율 기준)에 불과한 한국의 기록적인 저출생을 두고 골딘도 "경제가 너무 빨리 발전하면 전통과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걱정을 표했다고 한다. '성별 임금 격차 1위'라는 오명을 26년째 이어가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분석과 함의가 더욱 예리하게 폐부를 찌른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클라우디아 골딘 지음, 김승진 옮김, 2021, <커리어 그리고 가정>, 생각의힘
김창환·오병돈, 경력단절 이전 여성은 차별받지 않는가? : 대졸 20대 청년층의 졸업 직후 성별 소득격차 분석, 2019, 한국사회학 제53집 제1호



커리어 그리고 가정 -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 2023 노벨경제학상

클라우디아 골딘 (지은이), 김승진 (옮긴이), 생각의힘(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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