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3 11:06최종 업데이트 23.10.2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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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눈이 한 시간 전부터 부옇게 흐려진다. 이제 시작인가? 김종옥은 창틀에 잡아매듯 굵은 커튼을 드리웠다. 형광등 밝기를 낮춘 거실은 어둑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욕실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현관 밖에는 멀어져가는 발소리. 그는 두 눈을 매만지다 햇빛 한 점이 실내로 들어오는 기미에 눈을 떴다.

안돼, 그는 나직하게 되뇌며 커튼 쪽으로 걸어갔다. 강한 햇살은 싫다. 빛줄기가 머리를 헤집어 놓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때 머릿속에서 쇠망치가 소리가 났다. 이마 높이의 오른쪽 옆머리를 때리는 저주의 손길. 드디어 시작했구나. 김종옥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머리를 싸맸다. 제발 짧게 지나가길, 너무 아프지 않길.


언제부터일까? 이놈의 편두통이 3주마다 찾아온 게. 엄마는 집안 내력이란다. 중학교 때였나 엄마의 여섯 자매가 모여 고스톱을 치는데 모두 머리띠를 동여맸다. 그 모습이 신기해 물어보니 "편두통이 우리 집안 내력이야"하며 엄마는 두통약이나 사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때는 웃어넘겼다. 편두통이란 말을 처음 듣는 데다가 심부름 값이라며 이모들이 주는 용돈이 쏠쏠했던 탓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심한 두통을 겪고 구토를 했다. 여름방학 때마다 찾아오던 녀석은 모습을 감췄다가 40대부터 김종옥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52회차 화요집회를 열다
    

화요집회의 사회를 보는 김종옥 김종옥은 화요집회를 1년째 꾸려오고 있다. ⓒ 민병래

 
김종옥은 9월 19일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다다랐다. 화요집회 시작을 30분 남겨놓은 10시 30분. 이날은 경북 문경지회와 울산 동구지회의 회원들이 멀리서 오는 날이다.

김종옥을 너른 세상으로 이끈 것은 첫째 성우다. 돌이 지나고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눈을 마주치고 싶은데 녀석은 자기 얼굴 너머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깊은 사색에 빠진 듯도 하고 초점 없는 공허함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17개월 무렵 아이가 후두염에 걸려 입원했을 때 담당 소아과 의사는 치료를 끝내고 발달장애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그때까지 "엄마 밥 줘" 소리는커녕 옹알이도 하지 않았던 성우, 늦될 수도 있지 하며 위로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서늘하고 불안감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럴 때 다가온 "자폐성이 있다"는 의사의 한마디가  폐부를 찔렀다. 마구 울었다. 흐르는 눈물 앞으로 안개 가득한 겨울 강이 펼쳐졌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차가운 바람이 세차고 온통 살얼음이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깨져나갔다.

이틀을 내리 울고 김종옥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 시간에 몇만 원씩 하는 인지 교육, 언어 교육을 받으러 치료실을 드나들고 소문난 병원을 허겁지겁 돌았다. 바우처 제도도 없던 시절이니 시간강사를 하는 남편 월급을 쪼개고 쪼갰다. 노력하면 언젠가 나아지리라 수없이 중얼댔다. 최면을 걸듯.

총신대부설 유치원에서 받은 통합교육은 좋았다. 하지만 초·중·고 시절 10여 년은 성우에게도 김종옥에게도 아픔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나. 교감이 장애 학생 엄마만 따로 불렀다. 격려의 자리일 거라 기대했다. 웬걸 교감은 "당신 아이들이 선생을 힘들게 할 테니 학교에 폐를 끼치는 셈이다. 당신들은 잘해야 한다"라고 야단치듯 말했다. 죄인처럼 손을 무릎에 올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설 때 봄볕이 가득했던 복도에 가시덩굴이 그득했다. 성우가 그 덤불을 헤치느라 피투성이가 될 생각을 하니 눈물이 마구 흘렀다.

양천에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5학년 여자아이의 엄마가 먼저 발언을 했다.

"저를 보면 언제나 방긋하던 아이가 12개월이 될 무렵 갑자기 눈 마주침이 없어지고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저와 아이의 길고 긴 치료실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위원장 김종옥이 사회를 맡은 화요집회는 최근 몇 년 동안 벌어진 발달장애인 가족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2020년 4월, 엄마가 4개월 된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같은 달 엄마가 숨지자 발달장애인이 7개월간 노숙을 한 사연이 사회복지사를 통해 알려졌다. 2021년 2월에는 서대문에서 발달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가 차 안에서 자기 목숨을 끊었다. 202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20대 발달장애 아들과 춘천 소양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끝도 없는 죽음의 행렬, 장애인부모연대는 상복이 일상복이 되었고 추도식을 멈출 수 없었다. 발달장애인 부모연대는 수십 년간 '발달장애인법' 제정 등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 왔다. 2016년에는 서울시청 후문에서 '장애인가족지원센터'와 같은 제도 시행을 요구하며 42일이나 농성을 벌였다. 2018년에는 1800여 명이 삼보일배를 하며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요구했다. 올해 6월 14일에는 '발달장애인 전 생애 권리 기반 지원체계 구축'을 내걸고 용산역부터 대통령실 인근 삼각지역까지 오체투지를 진행했다.

발달장애인 엄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삼보일배도 오체투지도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것에 비하면 어렵지 않다. 삭발로 된다면 오체투지로 된다면 평생을 할 부모들이다. 성과도 많았다. 평생교육센터, 주간보호서비스, 가족지원센터 등등.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코로나 3년은 가혹했다. 모든 기관이 닫히고 서비스는 중단됐다. 어떤 발달장애인은 마스크를 쓰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모든 어려움이 오로지 가족의 몫으로 던져졌고 이를 견디지 못한 끔찍한 선택이 계속된 것이다.

그래서 화요집회는 시작되었다. 병든 마음을 어루만지고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자리를 만들자고. 벼랑에 선 장애인 부모의 마음을 붙잡아주고 발달장애인 당사자도 나와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우정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자고.

장애인부모연대에 젊은 활동가가 많지만 취지를 살리려면 경험이 풍부한 회원이 진행하는 게 좋겠다고들 했다. 김종옥은 받아들였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맡겠노라 시작한 게 어느덧 52회차. 휴일이 겹쳐 건너뛴 것을 감안하면 1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눈물바다였다. 아이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죽겠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를 누가 돌보냐는 말은 언제나 가슴을 적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강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올리지만 아이를 돌보다 지쳐 제 몸에 암 덩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에 모두 목놓아 울었다. 세월호와 이태원 유가족이 참석해 위로의 말을 건네면 또 눈물바다가 되었다.

김종옥은 울음을 웃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내고 싶었다. 울음은 뒤로하고 희망을 갖자, 서로에게 힘이 되자라고 호소했다. 덕분에 지금은 웃음이 많아지고 발달장애 당사자가 직접 나와서 발언도 많이 한다. 1년 만에 일궈낸 변화다.

발작은 짧았으면, 되도록 심하지 않게 지나갔으면     
 

'장애인부모연대' 김종옥 중앙회이사 그는 문화예술특별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 민병래

 
김종옥은 소파에 누워 얼음 마사지를 하며 눈을 감았다. 고통의 끝까지 이르려면 한두 고비를 더 넘어야 한다. 수십 년째 되풀이해 그 주기와 양상이 너무나 익숙하다. 고통을 비껴갈 수는 없으니 되도록 짧고 가볍게 넘어가길 바란다.

그는 장필순 노래에 몸을 맡겨본다. "무지개가 피었네, 하늘은 꽃이 되었네..." 가사를 힘겹게 따라부를 때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는 변기를 향해 달렸다. 위층에서 또 내려오지 않을까 겁이 난다. 그저 죄송하달 밖에. 노란 물이 올라온다. 전조 증상이 시작되고 먹은 게 물밖에 없으니 게울 건 없다. 그럼에도 몸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구토. 젠장 사르트르는 왜 하필 그의 대표작에 '구토'라는 이름을 붙였담.

화장실을 나와 김종옥은 쓰러질 듯 소파에 누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너무 심한 구토로 탈수 증상이 나타나 경련이 일고 체온이 40도에 이르러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의 큰 병이 집안 내력인 편두통에 불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김종옥은 대학 졸업후 한문 공부를 하려고 국역연수원 2년 과정에 들어갔다. 수료할 즈음 얼굴의 통증 때문에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오른쪽 턱뼈에 종양 덩어리가 가득했다. 담당 의사는 턱뼈를 잘라내고 인공 보형물을 넣은 다음 엉덩이뼈를 이식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스물다섯 살 딸의 턱뼈를 자를 수 없다며 울며 사정했다.

긴 수술을 마친 후 첫 드레싱을 하는데 턱뼈 안에서 끝없이 거즈가 나왔다. 의사는 턱뼈를 잘라내는 대신 어금니 세 개를 뽑고 썩은 부위를 모두 긁어냈다. 남은 부위는 계란 껍질 두께의 턱뼈 아랫부분뿐! 의사는 자그만 충격에도 부러질 터이니 조심하라고 되풀이 당부했다.

파낸 부위에 피가 엉겨 살이 차오를 때까지 매일 소독하고 새 거즈를 넣었다 뺐다.  음식을 먹을 때 거즈가 씹히고 거즈에 음식물이 스며들어 입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뼈를 살리는 치료 방법 때문에 종양 세포가 남아 첫 수술 후에도 일곱 번을 더 파냈다.

2년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김종옥은 미뤄둔 공부를 하려고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대학원 4학기를 마치고 논문을 쓰려던 참에 병이 도졌다. '재발했네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당동까지 불과 몇 km인 집으로 가는 길이 수십 년을 에돌아 간 듯했다. 다시 입안에 거즈를 넣고 끔찍한 치료를 되풀이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여자친구와 카페에 가고 싶어요"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발달장애 당사자 홍기림 김종옥의 권유로 그는 마이크를 잡고 당당하게 발언했다. ⓒ 민병래

 
11시에 시작한 화요집회는 12시를 넘겼다. 9월 중순인데도 햇빛이 이글거린다. 지난여름은 특히 힘들었다. 1시간여 사회를 보노라면 강한 햇살에 온몸이 익다시피했다. 사실 집회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햇빛을 오래 쬐면 편두통이 주기를 무시하고 찾아올까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화요집회의 웃음과 기운이 김종옥을 지켜주었다.

외려 추위가 더 힘들었다. 성우에게 도움 된다고 아이가 여덟 살 때 복지관 프로그램으로 함께 수영을 했다. 수영장 물이 닿으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독기 강한 물냄새도 싫었다. 하지만 아이한테 좋다는데 마다할 수 있는가. 이때 기관지염을 앓았다. 제대로 치료를 못 해 그 후로 만성 기관지염과 기관지확장증을 몸에 달고 다녔다. 한때는 심한 각혈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지난겨울 혹시 폐에 염증이 생길까 조바심을 냈다. 다행히 잘 넘어갔지만.

이날 마지막 순서는 광주광역시에서 올라온 24살의 발달장애 청년 홍기림의 발언, 그는 엄마 손을 잡고 집회 내내 주변을 헤매듯 오갔는데 마이크를 잡더니 "여자친구가 생기면 좋겠어요. 함께 카페에 갈래요"하며 해맑게 웃었다. 참가한 부모들은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발달장애인부모가 가장 소망하는 부분이 아이들이 일터에 나가 자립하는 것과 함께 이성 친구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외롭지 않기를 절절히 바란다. 김종옥은 이 청년이 발언을 끝내자 더 뜨겁게 박수를 요청했다. 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 앞이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렸다. 

진통이 가라앉고
   

장애인부모연대의 김종옥 이사 그는 화요집회를 꾸려간다. ⓒ 민병래

 
김종옥은 심한 구토를 마치고 고통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예전에는 구토가 하루 종일 계속된 적도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처방 받은 약이 몸에 잘 들었다. 일 년에 딱 20알만 처방되는데 3주 간격으로 찾아오는 녀석에게 안성맞춤이다. 전조 증상이 오면 한 알을 먹고 짧고 가볍게 지나기를 빈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리 격하지 않게 넘어가는 셈이다. 마지막 구토가 끝나면 신기하게 편두통이 가라앉는다.

김종옥은 다시 장필순의 노래를 찾았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는 편두통이 할퀸 머릿속을 산들바람처럼 어루만졌다. 김종옥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닫았던 커튼을 제쳤다. 햇살이 거실 가득 들어온다. 그는 창문을 열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 몸이 아파 대신 들어온 옆 반 선생님은 뜬금없이 "눈물 젖은 빵" 얘기를 꺼냈다. 그 무렵 김종옥은 밤하늘을 보며 막연하게 우주의 허무를 느꼈다. 시간은 저 넓은 하늘 어디에서 왔을까? 저 별에도 죽음이 있을까? 그런 알 수 없는 질문을 품게 되었을 때 다가온 '눈물'과 '빵'이란 단어는 김종옥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철학'이란 학문이 있는 걸 알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이를 전공으로 택했다. 투병하느라 석사논문을 쓰진 못했지만 그는 2014년까지 일곱 권의 철학 교양서를 썼다. 자기와 같은 고민을 할 청소년과 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성우를 낳곤 장애인부모연대에 들어갔다. 동작지회장을 맡아 '효니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비행기를 자유로이 타지 못하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모아 비행기를 전세 내 3박 4일 제주도를 여행했다. 제주도가 들썩거렸고 가족의 행복감은 하늘을 찔렀다.

2018년에는 강서구에 서진특수학교를 세우려고 부모연대 동지들과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었으나 굴복이 아닌 그릇된 세상을 향해 든 채찍이었다. 그는 화요집회가 자리를 잡아 후배 활동가에게 바통이 넘어가면 무엇보다 '장애인부모 투쟁사'를 써 볼 생각이다. 2014년 <철학의 시작>을 펴낸 이후 집필 활동을 하지 못한 갈증을 끌어모아 '부모와 발달장애인 당자자가 남긴 소중한 기록'을 정리할 작정이다.

또 다른 포부도 있다. 가칭 '전국편두통환자연대', '세계편두통환자연합' 같은 단체를 꾸려볼까 한다.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수많은 편두통 환자의 그루터기가 되지 않을까 야무지게 꿈꿔본다.
   
김종옥 그가 매달린 철학 공부는 질문을 받을 뿐 좀체 해답은 던져주지 않는다. 그의 몸을 평생 따라다닌 편두통과 골종양도 인류를 오랫동안 괴롭혔으나 그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우에게 씌워진 발달장애도 아직 원인을 모른다. 김종옥은 하필이면 이렇게 '알 수 없는 일'들을 껴안고 살아왔고 살아가려 할까?

김종옥은 창문으로 들어온 신선한 공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 몸을 잘 추스르고 잠을 푹 자면 내일 화요집회를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테다. 그래 내일 마이크를 잡으려면 기운을 차려야지 김종옥은 냉장고를 열고 미음을 끓이려 손을 바삐 움직였다.
덧붙이는 글 '발달장애인법'의 정확한 명칭은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 외에도 발달장애인 부모연대의 투쟁으로 이뤄낸 성과는 '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장애아동복지지원법'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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