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4 07:16최종 업데이트 23.10.0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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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책, 인물, 역사 등 국내외 다양한 사건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8월 24일, 일본 도쿄전력이 2011년 3월 원전 폭발 사고 이후 발생한 방사성 오염수(134만 톤)를 바다로 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사성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가는 동안 바닷물 색이 변하는 걸 보면서 2020년에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상황과 비슷한 대목이 꽤 많거든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메인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배경은 지금부터 약 30년 전인 1995년, 주인공 이자영(고아성)은 '커리어 우먼'을 꿈꾸며 삼진그룹에서 일하지만 실상은 입사 8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재떨이를 비우고, 실내화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다른 직원들의 커피를 타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말단 사원입니다.

대졸 남성인 같은 부서 대리에게 조언을 해 주고, 보고서도 대신 써 줄 정도로 뛰어난 업무능력을 보여 주지만 고졸 여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일해도 진급이 안 됩니다.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진급을 위한 조건을 내겁니다. 토익 600점. 공고를 보고 말도 안 되는 점수라며 불평을 하는 것도 잠시, 8년 만에 찾아온 진급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영과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함께 영어 수업을 듣게 됩니다.


그런 어느 날, 새로 온 상무의 짐을 대신 정리해 주기 위해 공장을 찾은 자영은 공장에서 몰래 폐수를 방류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함께 간 대리를 설득하여 보고서를 올립니다. 그로 인해 회사에서는 팀을 꾸려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죠. 그런데 그 대책이라는 게 방류된 폐수에 문제가 없다는 가짜 보고서를 만들어 주민들을 입막음하는 것뿐임을 알게 된 자영은 친구들과 함께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고 고발하는 일에 나섭니다.

영화는 회사측의 악랄한 방해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영과 친구들이 끝내 승리하고, 폐수 방류를 지시하고 은폐한 이들이 벌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1991년, 두산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는 문제 해결 과정을 판타지스럽게 만들어 버리긴 했지만, 1990년대를 제대로 그려낸 미술과 주연배우의 맞춤 연기, 그리고 젊은 여성들의 연대로 사회 부조리를 이겨내는 모습을 경쾌하게 담은 장점들로 인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작품상도 받았습니다.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이 영화의 실제 사건,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이하 '페놀 사태')에 대해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대구시 수돗물사태 시민단체 대책회의 진상조사 위원회>에서 '대구시 수돗물 페놀 오염사태 백서'를 발간해 둔 덕에 당시 상황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는 1991년 3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의 두산전자에서 파이프 파열로 인해 페놀 원액 30톤이 대구시의 상수원인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1984년 영국 리버풀 근처의 디 강 (Dee River)에서 페놀 1톤이 유출되어 근처 주민들이 위장 장애를 호소한 적이 있을 정도로 페놀은 독성물질인데 낙동강에는 그 30배에 달하는 페놀이 유출된 겁니다.
 

대구시 수돗물 페놀 오염사태 백서에 포함된 당시 영남일보의 보도. ⓒ 영남일보

 
페놀이 섞인 수돗물에서 심한 악취가 나고 대구 시민들의 신고가 이어졌지만 취수장 측은 원인 규명 대신 여름철에 흔히 나는 악취로 여기고 염소를 추가로 투입했습니다. 페놀이 염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악취와 독성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퍼져 나간 페놀은 부산의 상수원에서도 검출이 되어 영남지역 전체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두산전자는 이 사건으로 30일 영업정치 처분을 받았으나, 고의성이 없다는 이유로 20일만에 조업 재개가 허용됐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 같은 공장에서 2차 유출이 발생해 페놀 1.3톤이 추가로 낙동강으로 흘러 갔습니다.

이 사건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우리 기업들의 탐욕과 공무원들의 무사안일한 일처리, 그리고 수돗물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무능을 모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두산전자는 1차 유출사고 발생 이전에도 페놀이 다량 함유된 악성폐수 325톤을 무려 5개월 동안 무단 방류해 온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를 단속해야 할 환경처 직원들은 현장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허위로 단속서류를 작성했고, 대구시 상수도 당국은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도 부족한 시설과 인원을 핑계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페놀 유출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매일 이뤄져야 하는 수질검사를 실제로는 평일에만 형식적으로 했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생략했습니다. 페놀에 대한 검사는 한달에 한 번만 실시했는데 그것도 취수 단계가 아니라 정수 단계에서 이뤄져 페놀이 유출되더라도 정상적으로 발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고 발생 이후 대구시는 정확한 원인 파악과 신속한 대응 대신 가장 적게 측정된 페놀 농도만을 공개하며 '페놀 농도가 음용수 기준치 이하로 악취가 나지만 인체에 무해'하다는 주장만 반복했습니다. 시청 직원은 하지도 않은 비상근무 지시를 한 것으로 일지를 조작하여 직무유기를 감추려 했다가 이후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두산전자에게 내려진 조업정지 조치가 수출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조업정지 기간을 줄여 주기도 했습니다.
 

유출사고 당시 측정한 페놀 농도. 3월 17일 옥계천 하류 하수에서는 0.8659ppm이 검출됐는데, 대구시는 다사수원지 원수에서 측정한 0.0035ppm을 근거로 기준치 이하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 대구시 수돗물 페놀 오염사태 백서

 
이러한 행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두산 제품에 대한 불매와 정부에 대한 비판 시위로 표출됐고 정부는 뒤늦게 환경처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민심을 달래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구지방환경청 공무원 7명, 두산전자 관계자 6명이 구속됐고, 관계공무원 11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두산전자에 대해서는 64일의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도 이 사건으로 사임했습니다.

이 사건은 환경문제가 시민의 삶에 직접적인 문제를 준다는 경각심을 일깨운 사건으로 녹색연합에서는 1999년 "50년대 이후 발생한 대한민국 환경 10대 사건" 중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1위로 선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유해물질을 고의로 배출한 경우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환경개선비용부담금법' 등이 제정됐으며, 공장 설립 시의 환경 기준도 강화됐습니다.

페놀 사태 이후 30년이 더 지난 지금, 기업들의 폐수 무단 방류 사건은 더 이상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해 1월 29일,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몇 달간 산성 폐수가 유출돼 강으로 흘러가서 물고기가 폐사하는 등의 환경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오스틴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팹에서 산성 폐수가 유출돼 인근 지류에서 물고기가 폐사하는 등 환경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 Bloomberg 보도 화면

 
또한 올해 3월 16일, <뉴스타파>는 삼성전자가 베트남 박닌 공장에서 휴대전화 제조공정에 사용된 각종 유해물질을 대기로 무단 방출하고 공장에서 사용된 폐수를 적절한 처리를 거치지 않은 채 무단 방류한 정황이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폐수 무단 방류와 같은 환경 오염 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다만 감시가 느슨한 곳으로 이전된 건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의 환경을 대하는 태도가 이 정도이니 다른 기업들의 경우는 찾아볼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비만 오면 중금속이 섞인 폐수를 무단방류하다 적발되는 기업들에 대한 뉴스를 종종 접할 수가 있습니다.

폐수 방류 최대 빌런 도쿄전력

누가 뭐래도 오늘날 폐수 방류의 최대 빌런은 일본 도쿄전력입니다. 일본 도쿄전력은 방사성 오염수 134만톤을 지난 8월 24일부터 바다로 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산도, 삼성도, 낙동강변의 영세기업들도 폐수를 몰래 방류하거나 사고로 인해 실수로 방류를 하긴 했지만, 일본 도쿄전력은 방사성 오염수를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당당히 드러내며 방류를 시작한 게 다른 점입니다.

태평양으로 방류된 방사성 오염수가 해류를 타고 우리 바다로 흘러드는 건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이건 두산의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두산의 경우 공장을 멈추고, 페놀 정화 시설을 갖춘 뒤 더이상 추가 방류를 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앞으로 30년간 계속 방류할 계획이고, 그 이후에도 방류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국민들은 이웃나라 일본에서 방류하는 방사성 오염수가 인체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오염수 방류 과정에서 방사능 제거에 대한 검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방류 과정에 제3의 기관에 의한 감시는 이뤄지는지, 우리 정부는 거기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 후쿠시마 이외의 일본 근해에서 잡힌 수산물은 먹어도 안전한지…… 등을 계속 묻고 있습니다.
 

지난 9월 7일 서울역에서 출발 대기 중인 KTX 열차 내에 정부가 배포한 '후쿠시마 오염수 10가지 괴담' 책자 홍보물이 비치돼 있다. ⓒ 연합뉴스


여기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후쿠시마 오염수 10가지 괴담'을 펴내고 국민들의 우려를 '괴담'이라 몰아붙이는 방식입니다. 정부는 "삼중수소 오염수를 배출 기준에 맞게 희석해 방류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처리방식"이라며 일본의 결정을 옹호합니다.

그건 정상 원전일 경우고 일본의 경우는 폭파되어 사람이 근처에 가지도 못하는 원전이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희석이 중요하지 어디서 나온 건지는 상관없다고 답을 합니다. 30년 전 두산이 이 발언을 들었다면 페놀을 그냥 방류하지 않고 낙동강물로 희석해서 버리지 않았을까요? 장마철에 공장 폐수를 무단 방류하면서 그게 곧 빗물에 의한 희석이라는 주장도 나올 법합니다.

일본의 방사성 오염수 방류를 옹호하고 국민의 우려를 괴담으로 치부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노력이 지나쳐서 우리가 일본보다 더 많은 삼중수소를 배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해마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배포한 자료에 포함된 도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삼중수소 연간배출량은 214조 베크렐(TBq), 일본은 175조 베크렐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는 기준 연도가 2022년이고, 일본은 2019년입니다. 같은 해 자료로 일대 일 비교가 안 되면 통계로서 의미가 없어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파괴된 원자로고 다른 모든 나라는 정상 가동중인 원자로라는 차이도 있습니다. 
 

여섯번째 괴담을 소개하면서 국가별 연간 삼중수소 배출량을 표시하면서 한국은 2022년 수치를, 일본은 2019년 수치를 이용하여 한국이 더 많은 삼중수소를 배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 대한민국정부

 
30년 전 페놀로 인해 오염된 낙동강물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생수를 사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수돗물의 수질이 제대로 관리가 된 이후에도 수돗물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생수를 찾고 있습니다. 페놀 방류가 없었다면 굳이 지출하지 않아도 될 추가 비용입니다. 일본의 방사성 오염수 방류로 인해 향후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중국은 일본의 방사성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자마자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전면 수입 금지를 선언했습니다. 이 정도는 해야 국내에 유통되는 수산물에 대한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텐데, 책임질 위치에 있는 우리 공직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수산물을 먹는 쇼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일본에게 방류 중단 및 피해 배상을 요구해도 부족할 판에 도리어 "괴담"이니 "선동"이니 "반국가 행위"니 하는 말로 우리 국민하고만 싸우려 들고 있습니다.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영화 속 대사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회사에서 커리어우먼이 되겠다던 이자영이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된 후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 회사가, 제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저는 하고 싶지 않아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30년 전 두산에서 페놀을 방류할 때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평택이든, 오스틴이든, 베트남이든 삼성전자의 폐수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계속 방류하고 있는 도쿄전력의 직원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꼭 나타나 더 이상의 파국을 막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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