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작년 EBS국제다큐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그림자 놀이>(2021)라는 다큐멘터리가 한 편 있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국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찾아 유럽 국경을 넘으려는 10대 난민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에서 북마케도니아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거쳐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향하기까지 걸리는 위험하고도 지난한 모습이 그려졌다.

아직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을 이 아이들은 현재의 고난과 두려움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가혹한 현실을 '게임'이라 부르며, 상대를 알 수 없는 이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도처에 깔린 지뢰밭과 철책,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야생 동물과 해충들.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세차게 내리치는 급류는 물론, 심지어는 밀수업자들의 배신과 위협, 국경 수비대의 무자비한 폭력까지 그들에게는 게임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경을 넘으며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난민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던 에이피어 블랑케보르트 감독과 엘스 판드리엘 감독은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승화시키기 위해 또 하나의 작품 <마인드 게임>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이번 작품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인물은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에 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사지드 칸 나시리'라는 소년이다.

탈레반 정권의 폭압을 피해 가족과 헤어져 홀로 유럽으로 향해야 했던 그는 유럽에 도착하기만 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온갖 고난을 이겨낸다. 여정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하지만 벨기에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게임'이다. 망명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 속의 불안과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되는 심리적 압박과 불안정한 상황 속의 두려움. 아직 끝나지 않은 한 소년의 지난한 게임이 이 작품에서 그려진다.

02.
나시리의 도피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세상을 떠난 아버지처럼 탈레반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엄마의 무서운 충고가 그 시작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로 엄마에게 받은 가방 하나만 들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집을 뛰쳐나왔다. 어린 나이에 유럽에 가는 게 쉬운 줄만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으로, 그리고 튀르키예로. 길 위를 전전하는 동안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훨씬 더 많았고, 아무리 무서워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었다.

그나마 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던 에이피어와 엘스 두 감독을 그리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천운과도 같았다. 세 사람은 때때로 연락을 주고받기로 약속을 하고, 이때부터 나시리는 자신이 길 위에서 겪는 일들을 짧은 영상으로 조금씩 남기기 시작한다. 이 작품 <마인드 게임>이 모두 회상 장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시리 본인의 증언과 당시의 상황을 담은 풋티지들로 구성되며 최대한의 현실성을 지켜낼 수 있게 되는 이유다.

고품질의 다양한 영상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국경에서 마주친 경찰이나 수비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할 때나 그들을 피해 혼신의 힘으로 도망을 칠 때는 카메라를 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폭력과 죽음이 발끝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영상을 촬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일들이 국제법상 불법에 해당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현장에서는 단지 종이 위의 쓰인 몇 줄의 문장에 불과한 말들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기록이 담긴 핸드폰 속에는 '꼭 성공하고 말겠다'는 두려움을 애써 감춘 밝은 다짐이 있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3.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국가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난민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는 분명히 전작인 <그림자 놀이>와 다른 지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두 감독의 의도에 해당하지만, 나시리 역시 겪게 되는 고행의 과정이 생략되지는 않는다. 이는 전작에서 그려졌던 난민 아이들의 힘겨운 시간에서 그 누구도 예외적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모든 고난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찾아오게 될 '마인드 게임'의 근원이 바로 이 지점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런 고난이 아니라면 사실, 입국과 난민 신청 심사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해도 실망은 할지언정 절망까지 할 일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석탄 화물 기차에 맨몸으로 오르기도 하고, 이름 모를 컨테이너 박스에 갇히기도 하고, 특정 국가에서는 난민 캠프를 향한 지역민들의 폭력적인 공격도 받게 되는 장면들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청결이나 안전과 같은 인도주의적인 문제는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길 위에서 목숨을 잃는 난민의 수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 나시르와 연락이 끊기게 되는 때에는 두 감독의 마음도 애가 탄다. 심지어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창궐하면서 말 그대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숱한 어려움 끝에 결과적으로 벨기에에 도착하게 되지만, 그와 같은 케이스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고 이 작품은 말한다.

04.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언제 죽을지 몰랐지만 유럽에 오고 나서부터는 매일 죽을 것 같다."

도착만 하고 나면 모든 게 편해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주어진 현실 속에서는 새로운 고난의 연속이다. 가장 처음의 문제는 망명 허가를 받는 일이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뚫고 유럽 국가에 도착한 이들의 정식 신분은 '망명 신청자'다. 아직 해당 국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뜻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추방까지 당할 수도 있는 불안정한 상태다. 특히 나시리와 같은 미성년자 난민의 경우에는 성인이 되기 전에 하루빨리 망명 허가를 받는 것이 중요한데, 미성년자에게는 후견인을 붙여주고 학교에도 보내주는 등 정착을 위한 여러 가지 권리와 혜택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험난한 길 위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빠르게 조숙해지고 실제 제 나이보다 훨씬 더 성장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 속 나시리 역시 망명 센터로부터 '의심' 판정을 받는다. 여권과 아프가니스탄 신분증을 제시해도 사본은 믿을 수 없으며, 현재의 모습이 절대 17세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다. 벨기에 정부는 그에게 서류 원본을 제출하고 의료 기관을 찾아 생물학적 나이를 판별하는 검사를 받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8개월만 지나면 성인이 되는 그가 다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서류 원본을 받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자살 행위에 가깝다. 의료 기관에서 받는 검사 역시, 대략적인 나이를 판별할 뿐, 정확한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불법 브로커와 같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 원본 서류를 제출한다고 해도 이 절차가 정확히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나이를 인정받는다는 것이 망명 허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피를 말리는 하루하루 속에서 어떤 난민 아이들은 정신적인 압박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을 길 위의 시간들조차 모두 이겨내 놓고 마지막 관문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지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 결코 쉬운 마음은 아닐 것이다.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마인드 게임> 스틸컷 ⓒ EBS국제다큐영화제


05.
고국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또한 이들이 '마인드 게임'으로부터 부여받는 시험 가운데 하나다. 나시리의 경우에는 탈레반의 폭도 아래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을 가족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가슴을 짓누른다. 유럽에 도착해 더 많은 정보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오히려 어려움이 된다. 여러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아프가니스탄 내의 소식들 가운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만약 자신이 망명 허가를 받고 벨기에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면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아직 먼 훗날의 일들까지도 지금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에이피어 블랑케보르트 감독과 엘스 판드리엘 감독의 두 작품이 정확히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이번 작품에서 '마인드 게임'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길 위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위협을 물리치고 난 이후에도 이들이 평화로운 시간을 결코 쉽게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에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시르는 길 위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벨기에 난민 센터에서 1년의 시간을 더 버틴 후에야 난민 자격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 문제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국경을 넘기 위한 길 위에서, 난민의 자격을 얻기 위한 각국의 난민 센터 안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과 내일을 담보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다큐멘터리 EBS국제다큐영화제 마인드게임 난민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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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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