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 18:09최종 업데이트 23.08.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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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딸 둘 엄마는 금메달이고, 아들과 딸 한 명씩 낳으면 은메달, 아들 둘 엄마는 목메달(?)이란다!"

아들만 둘을 둔 시어머니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렇게 한탄하신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처음에는 딸만 둘 낳은 나를 두고 아들 낳으라는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신호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말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자신의 아들을 향한 원망이 서려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들은 살갑게 마음을 챙겨주거나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지 않고, 쇠약해지면 병구완을 직접 하는 걸 기대하기도 어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딸에게는 이 역할을 당연하게 기대한다는 뜻인 셈인데, 나는 저절로 시어머니의 한탄을 함께 듣는 내 두 딸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다행히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몇 년 전 "딸들이 자기 나이대의 엄마를 만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화제가 된 적 있다. 1, 2, 3위가 바로 "나 신경 쓰지 말고 엄마 인생 살아", "아빠랑 결혼하지 마", "나 낳지 마"라는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기혼 여성들이 고통받았다는 흔적과 다름없다. 잘못된 결혼, 나를 낳는 바람에 깰 수 없었던 혼인 그리고 자식에게 헌신해서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었던, 불쌍한 엄마. 그 인생의 궤적이 저 답변에 다 들어있다. 대한민국은 엄마의 불행으로 굴러온 나라일까.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딸들의 이 답변은 오랜 세월 동안 엄마가 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고통을 공유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너 아니면 누가 들어주니'라며 시가와 남편 험담, 어려운 경제 사정 등의 하소연을 딸이 어릴 때부터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엄마가 많다.

문제는 딸들이 이 과정에서 엄마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연민 때문에 기꺼이 엄마의 영향력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착한 딸'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착한'은 사회적인 규범에 맞는 바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착한'에 '딸'이 붙으면 '자기 생각보다 엄마의 욕구를 우선시하고, 엄마의 마음에 순순히 자신의 행동을 맞춰주는 상냥함'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이 지나친 정서적 밀착이 딸의 정신적 독립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이 자주 지적한 바다. 정신과 의사 가야마 리카가 책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에서 진단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엄마 역시 딸에게서 독립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은 흔히들 간과한다. 착한 딸의 존재는 엄마에게 큰 자산이기에, 엄마는 딸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엄마의 분신으로 살다 간 잔느

잔느 보닌-피사로(1881~1948)와 그녀의 엄마 쥘리 벨레(1838~1926)도 그랬다. 그들은 '착한 딸'과 '불쌍한 엄마'라는 끈적끈적한 굴레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쥘리가 딸에게 들려줬던 자신의 가련한 인생 이야기는 "나는 네 할머니의 종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 시골 처녀였던 쥘리는 21살이 되던 해, 유대인 상인 집안 안주인의 하녀로 들어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자신보다 8살 많은 주인집 아들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그는 앞으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지만, 쥘리와 만날 당시엔 그저 서른 살 노총각일 뿐이었다.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쥘리는 자신이 모시던 마님에게 결혼 승낙을 받고자 했지만, 역시나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카미유의 어머니는 자신의 시중을 들던 하녀가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을 끔찍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쥘리와 카미유의 사랑은 꺾이지 않았다. 둘은 함께 산 지 11년이 되던 해인 1871년 마침내 혼인신고를 해버렸고, 이로써 부잣집 아들 카미유는 한 푼의 재산도 물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
 

카미유 피사로,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쥘리 벨레> 1877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애쉬몰리안 박물관. ⓒ 카미유 피사로


정해진 수순처럼 가난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쥘리는 그림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남편 대신 집안 경제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림으로 생계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평균 46프랑이라는 낮은 가격에 몇 점의 그림만 팔았을 뿐이었다.

결국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친척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닥쳤다. 이때 쥘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결혼을 결사 반대하던 시가 친척들 앞에서 차마 얼굴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카미유 피사로가 1877년에 완성한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쥘리 벨레>은 이러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에서 쥘리의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줄줄이 태어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꽃집의 일손을 거들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고생이 심했던 상황이었다.

잔느는 그런 엄마 쥘리 아래에서 7남매 중 6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유일한 딸이었다. 사실 언니가 있었지만, 잔느가 태어나기도 전에 9살의 나이로 죽었다. 언니의 이름도 똑같이 잔느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잔느의 어깨에는 언니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줘야 할 책임이 지워진 셈이다.

게다가 아들만 가득한 집안의 유일한 딸로서, 잔느는 엄마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착한 딸'의 임무까지 떠맡아야 했다. 시가에서 배척받는 슬픔,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끝없는 일 때문에 무너져가는 건강, 당장 내일의 밥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의 고통.

쥘리는 여느 엄마처럼 '너 아니면 누가 이해해주니'라며 딸에게 자신의 심정을 여과 없이 털어놓지 않았을까? 가난 때문에 자살을 결심했을 때에도, 어린 잔느까지 데리고 물에 뛰어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쥘리에게 딸 잔느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그러나 잔느도 엄마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니, 잔느는 오히려 아버지처럼 살고 싶은 아이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가 되는 꿈을 가슴 속에 간직했던 잔느는 아버지와 함께 미술관이나 다른 화가의 화실에 자주 들르곤 했다.

이런 잔느의 행동이 쥘리에겐 자신의 품 밖으로 탈출하려는 행동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쥘리는 잔느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일 때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깎아내렸다. 카미유 피사로는 딸의 꿈을 지지했지만, 아내의 거센 반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카미유 피사로, <잔느의 초상> 1893년, 캔버스에 유채,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 카미유 피사로


잔느가 12살이 되던 해, 카미유 피사로는 딸의 초상을 그렸다. <잔느의 초상> 속 그녀는 화사한 옷을 입었지만, 표정은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잔느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아버지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 것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허영을 자극할 수 있다'며 엄마의 성화를 샀을 수도 있다. 이때 잔느는 이미 죽은 언니의 나이를 넘어섰다. 특별히 사랑했던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을 대신 갚기 위해서라도, 엄마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됐을 것이다. 그녀는 '착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을 터. 잔느를 제외한 5명의 아들은 엄마의 반대 없이, 아버지의 격려만을 받으며 화가 수업을 이어갔고 화가, 에칭화가, 풍자만화가, 다양한 장식품 디자이너로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잔느의 공허한 눈동자는 마치 작별인사를 하며 서서히 멀어지는 꿈을 좇고 있는 것만 같다. 결국 잔느는 평생 엄마의 눈에 닿는 영역 안에서, 엄마가 능히 예측할 수 있는 '딸-아내-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엄마의 분신다운 생애였다. 잔느의 꿈은, 그녀가 낳은 아들 두 명이 대신 화가가 되는 것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요즘 딸들의 진정한 최선은

내게도 쥘리 벨레같은 엄마가 있다. 설문조사 결과처럼 "나 없었으면 아빠랑 이혼하고 잘 살았을 사람"이 바로 슬프게도 우리 엄마다. 그러나 나의 엄마는 쥘리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젊은 시절은 가난하고 불행했지만, 나의 엄마는 적어도 내 꿈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도 잔느같지 않았다. 나는 내 엄마에게 연민을 갖고 있었지만, 내 인생이 우선이었다. 하긴 19세기 사람과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모녀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있다. '친구 같은 딸'로 대표되는 정서적 지원에 대한 기대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딸에게는 더 가혹한 상황이 닥친 것일지도 모른다. 남아선호가 판쳤던 대한민국에서 갑자기 '딸 둘 엄마는 금메달이고, 아들과 딸 한 명씩 낳으면 은메달, 아들 둘 엄마는 목메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단순히 봉건적 사상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장경섭 교수는 책 <내일의 종언>(가족 자유주의와 사회 재생산 위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들을 통해 기대했던 세대 간 계층 상승 욕구가 딸을 통해서도 충족되면서, 양육과정의 정서적 보상감 뿐만 아니라 고령화로 급격히 연장될 노후의 자녀와의 관계 등이 반영됐다"라고.

저자가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는 곧 요즘의 딸은 '여자 얼굴을 한 아들'과 같다는 뜻이다. 아들보다 보상과 환수가 쉬우며, 남자만큼 돈도 벌면서 애교 있고 다정한 성격으로 효도하는 존재. 딸들에겐 '이중의 굴레'인 셈이다.

어느 벨기에인 한국불교전공 교수가 '효'를 어떻게 설명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다 "기독교의 원죄같은 개념인데, 대상이 부모다"로 정리하고 강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한, 엄마와의 관계는 벨기에 교수의 말대로 영원히 벌 받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때 나도 가엾은 내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렇게 속죄하듯, 내 전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최선은 그런 것이 아님을. 그것은 그저 '희생'일 뿐이라는 것을.

엄마와의 관계에서 딸의 진정한 최선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행복하게 사는 것일 터이다. 이는 얼떨결에 내 목에 걸려있던 '딸 둘 금메달'을 내려놓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주문하는 '엄마로서의 다짐'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피사로>, 정금희 지음, 재원, 2005
<내일의 종언(終焉)? 가족 자유주의와 사회 재생산 위기>, 장경섭, 집문당, 2018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가야마 리카 지음, 김경은 옮김, 걷는나무, 2018
<나의 가련한 지배자>, 이현주 지음, 코난북스, 2020
<내안의 여성 콤플렉스7>, 여성을 위한 모임 지음, 휴머니스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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