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파트 시대의 시작과 변모의 역사가 몽타주 영상을 통해 그려진다. 제 집 한 칸을 얻기 위해 온종일 모델하우스 인근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과 제 손에 달린 추첨공 하나를 덜덜 떨며 집어드는 모습. 이미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는 이들의 입으로부터는 이 콘크리트 공간 하나가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한지에 대한 간증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곳에 제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이들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다시 지어지는 아파트의 평수는 점차 넓어져간다. 그리고 유명 가곡인 '즐거운 나의 집'의 선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땅의 모든 아파트가 삽시간에 무너지고 만다. 대지진이다. 단 하나의 건물, 황궁 아파트만 빼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이 초토화되어버린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얼마나 넓은 지역이 폐허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국토의 전부가 쓸모 없어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절차도 체계도 모든 것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아파트의 주민들이 각기 보여주는 군상과 그들의 선택은 영화의 작은 블록이 되어 콘크리트 유토피아라고 이름 지어진 유일의 아파트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어떤 인물을 대표로 내세워 이 상황을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내부적인 문제에서부터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외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곳곳에 산적해 있다. 다만 디스토피아적 환경 속에 홀로 내던져진 유토피아가 실제로 아름다울 수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이 이 공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가진 유일하고도 가장 큰 문제다.

02.
영화가 처음 조명하는 인물은 민성(박서준 분)과 명화(박보영 분)다. 두 사람은 극이 나아가는 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군상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민성과 명화는 서로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수단과 방법보다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인 쪽과 정도를 따르며 이상적인 방법을 구하는 일을 놓지 않으려는 쪽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극단에 지점에 놓여 있지는 않다. 기준점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영화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초반부에서 세 차례의 장면을 관객에게 던진다. 집안에 남은 식량을 정리하던 두 사람의 모습에서 외부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명화와 현재의 자신들이 우선인 민성이 보이는 차이가 처음. 외부인 모자(母子)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민성과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는 명화의 모습이 다음. 그리고 민성이 어렵게 구해온 황도캔을 두고 이번 한 번만 눈을 꼭 감고 우리끼리 먹자는 민성과 그래도 외부인 모자와 함께 먹자는 명화의 차이가 마지막이다. 두 사람의 이 사소한 차이는 서로 평행을 달리지 못하는 열차와도 같이 극이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차 더 벌어지게 된다. 일단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다른 모습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함께 나눠먹자면서도 막상 제 입에 들어간 황도 한 점에 행복해마지 않는 모습.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03.
"아, 아파트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 이거 하나뿐인데."

두 사람의 시작과 달리 영탁(이병헌 분)의 등장은 꽤 극적인 부분이 있다. 1층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이후 그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등장에 계획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장면을 자신의 집으로 여겨지는 고층의 난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소화기를 품에 안고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모두다. (그는 이후에 명화가 아파트에 몰래 숨어든 외부인을 도와주는 모습도 동일한 모양새로 지켜본다.) 이후 입주민 대표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상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전부 처음부터 그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고, 처음 입주민 대표로 추대되기 직전에 혼자 구석에 앉아 귤을 까먹으며 꺼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것이 일종의 연기였다고 생각하면 무리가 있는 것일까.

이런 가정은 다소 지나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단에 서 있는 영탁의 모습에 조금씩 사욕이 서리고 자신조차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잘못된 믿음이 피어나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황궁 아파트의 잔치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사이에 드러나는 그의 실체와 별개로 혜원(박지후 분)을 소개한 이후 '아파트'를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가 처음으로 그의 욕망을 정면에서 비추는 장면이다. 날렵한 콧날을 기준으로 얼굴 양쪽의 한 면에 드리우는 그림자와 다른 한 면에 비추는 섬광, 그리고 아파트 외벽에 일렁이는 욕망의 그림자. 그의 존재는 욕망의 산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며, 이 공간의 곳곳에 그 욕망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내는 인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파트로부터 외부인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시도되는 첫 대결이 된다. 선두에 나서 아파트 단지를 떠나 달라는 영탁은 극심한 몸싸움 끝에 머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이는 그의 존재를 한층 더 부각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순간으로 남는다. 다시 생각해도 그의 등장으로부터 모두의 신임을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전쟁의 트로피를 움켜쥐고 모두가 환호하는 순간에, (영탁이 그랬던 것처럼) 명화가 홀로 그 장면을 멀찌감치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04.
앞선 세 인물이 극의 최전방에 서 있다고 한다면, 부녀회장인 금애(김선영 분)는 수면 아래에서 이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인물에 속한다. 분량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두의 앞에 나서서 스스로 이 아파트의 목소리를 자청하는 인물이지만 사실 결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큰 역할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다. 처음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변죽만 울리고, 드림팰리스라는 이웃 아파트의 사람들을 모함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편 가르기를 주도하는 역할 밖에 해내지 못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파트 단지의 바리케이트 너머로 향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영탁이 내부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라면, 금애는 모두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현혹하는 쪽에 속한다.

외부인과의 첫 대결 이후 이어지는 아파트 정비 사업 주간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 <설국열차>(2013)에 등장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실제로 그 인물의 이미지와 역할을 이어 내기라도 하듯이 선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외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녀의 내적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체의 상황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나아갈 때마다 그 욕망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모습을 보인다. 아파트 단지의 바리케이트를 기준으로 외부에서는 영탁이, 내부에서는 금애가 이 집단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이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험을 향해 직접 몸을 던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영화의 후반에서 '다들 이상하게 희망적이신 거 같다'며 비꼬는 혜원의 말에서 그녀 역시 비켜날 수 없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05.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앞서 설명한 네 인물(각각의 군상)이라면, 지지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부분이다. 외부 세력을 축출하여 제거하고 이들 세력에 맞서 아파트 단지를 지키고자 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내러티브가 하나, 내부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인물들 사이의 갈등과 영탁이 안고 있는 숨겨진 비밀에서 시작되는 내러티브가 또 하나다. 대체적으로 외부 세력과의 대결구도는 영화의 전반부에, 내부적인 대결구도는 후반부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작품의 톤 앤 매너가 아파트의 잔치 장면 이후 급격히 전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축은 거의 동시에 작동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의 축이 전면에 나설 때, 다른 한 축은 자신의 서사를 쌓고 있는 식이다.

가령, 아파트로 숨어든 외부자들에 대한 명화와 영탁의 갈등 구조가 축출 사건을 통해 하강하는 동안 보급품의 문제가 대두되며 영탁과 남자들이 외부 원정을 나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외부 세력과의 충돌이 발생하고, 영화는 다시 외부 세력과의 대결구도가 상승하는 동안 혜원과 명화가 영탁의 비밀을 발견해 내부 갈등의 서사를 완성시킨다. 이 두 축의 완벽한 설계와 적절한 타이밍의 교대는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지점과도 같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고 다시 빠지는 순간의 시점마저도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리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06.
잘 설정된 여러 군상의 인물에 완벽하게 설계된 두 축까지. 이 영화가 더 이상 해낼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일 법도 하지만 감독은 자신이 설정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위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는 일도 잊지 않는다. 관객들 각자의 시선에 따라 포착할 수 있는 내용은 더 늘어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세 지점의 메시지가 크게 다가온다.

그중 첫 번째는 인간의 폭력성과 관련한 부분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로 향했던 아파트 주민들이 마트를 털다가 주인을 살해하게 되는 장면은 인간의 모순과 폭력성, 그리고 딜레마의 문제가 모두 잘 표현된 부분이다. 자신의 마트를 지켜내기 위해 영탁 일행에 맞서 총을 든 마트 주인과 자신들의 목적(약탈)을 달성하기 위해 그를 제압하는 주민들 사이에 놓인 정의의 위치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정의와 이상이 생존의 문제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에서 인간의 간사한 면모도 찾아볼 수 있다. 모두의 손으로 내쫓은 외부인들이 추위로 인해 길거리에서 얼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꿈쩍도 하지 않던 이들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일에는 일말의 가책을 느낀다는 점이다. 모두가 함께 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의 차이, 대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는 것과 바로 눈앞에서 죽는 것의 차이가 여기에 놓여 있을 것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07.
두 번째는 아파트 내부로 숨어든 외부인들을 바퀴벌레라 칭하며 이를 소탕하고자 하는 영탁과 이에 반대하는 인물들 사이의 갈등 지점이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숨겨주며 선의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809호 청년은 결국 복도 바깥으로 투신하며 아무리 세상이 이래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하면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강변한다. 여기에서도 선택은 강요된다. 어떤 집단에 속할 것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꺾어서라도 그 집단의 공동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규칙을 어기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다.

한편, 그의 모습은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특별히 어떤 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하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명화와도 오버랩되며 같은 쪽에 놓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도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참 후에 이 장면은 영탁의 모든 비밀이 드러나고 정확히 입주민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발이 일어나는 지점으로 연결된다. 이로 인해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기에 주민만이 거주할 수 있고, 자신들은 입주민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고 자부심을 가질 것도 없다던 그의 말과 상황이 정확히 배치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 바리케이트를 허물고 쏟아져 들어오는 외부인들과 이들을 막으려는 내부인들 사이에서 영탁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혹은 양쪽 모두에 속할 수 있는 인물이 되며 경계인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08.
"걱정 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마지막인 세 번째는 민성과 명화의 마지막 장면과 관련이 있다. 영화는 내내 민성을 현실적인 쪽에 두고, 명화는 이상적인 쪽에 놓는다. 809호 남자와 명화만 놓고 보더라도 같은 쪽에 놓이게 된다는 것만으로 동일한 군상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민성과 명화는 단 한 번도 같은 쪽에 놓이지 않았다. 외부인에 대한 주민 투표를 하고 난 뒤에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는 암시가 등장하고, 외부인들을 몰아내는 투쟁 장면에서도, 외부인 무리를 대하는 모습에서도 두 사람은 항상 다른 선택을 한다. 심지어 민성은 명화의 선택으로 인해 영탁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게 되고 이후 더 위험한 상황들을 자신이 스스로 나서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명화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 민성이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망가지게 될까 봐 외부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이상적인 결정일뿐이다. 그의 위치(방범조 반장)나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가 손을 놓는 이상 두 사람이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계속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국 이 숱한 과정을 통해 영화는 민성과 명화를 각각 현실적인 선택과 이상적인 선택을 상징하는 인물로 완성해 내는데,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민성은 죽음을 맞이하고 명화는 살아남게 되는 것을 통해 '결국 이상도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고, 그런 현실의 희생을 통해 내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하나의 정확한 메시지를 완성해 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09.
이 수많은 인물과 장면, 메시지를 통해 결국 영화가 묻는 것은 하나다. 관객인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며, 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 쪽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스크린 내부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이상과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남는 것이 최선인 것일까.

영화의 끝자락에서는 콘크리트 선능을 따라 힘겹게 걷는 민성과 명화가 등장한다. 황궁 아파트 단지를 어렵게 빠져나온 직후다. 아래쪽에서 이들 부부를 유심히 지켜보던 외부인이 두 사람이 걷는 방향으로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그 표정이 묘하다. 어째 다친 민성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영화의 중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투신한 809호 남자의 시신을 불태우는 이유가 쓰레기장에 방치했던 시신들이 전부 배고픈 외부인들에 의해 사라졌다고. 이 장면이 굳이 여기에 놓인 이유 역시 그때의 암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정말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최선인 걸까?

어딘가에 유토피아는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여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콘크리트유토피아 이병헌 박보영 박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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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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