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16 18:37최종 업데이트 23.07.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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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지난 5일 경기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열린 유엔군초전기념 및 미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에 참석하여 주요 내빈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국가보훈부

 
윤석열 정부가 가짜 독립유공자를 찾아내겠다며 전수 조사를 벌이고 있다. 유공자들의 훈격(등급) 변경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 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독립운동을 했는가 안 했는가'보다는 '무슨 목적으로 했는가'를 근거로 유공자들을 재평가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목적이 있는 겁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한테 자유를 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다 이렇게 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전체주의 국가, 자유도 없는 그런 전체주의 국가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김원봉 같은 경우가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


우파건 좌파건,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목표는 한민족의 해방과 자유였다. 박민식 장관은 약산 김원봉에게는 그런 목표가 없었던 것처럼 말했지만, 의열단이 선포한 '조선혁명선언'은 이 단체 리더인 김원봉이 어떤 비전을 갖고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인 단재 신채호가 집필한 이 선언은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라며 이런 상태를 벗어나 민족의 자유를 얻는 것이 독립운동의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상당수의 항일투사들은 그런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같은 반제국주의 이념을 활용했다. 재벌 자본가들이 움직이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려면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무장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탄압한 '친일 경찰' 김면규
 

독립운동으로 붙잡힌 조선공산당 권오설 선생 등이 김면규 당시 종로경찰서 경부보등을 고발한 것을 보도한 1927년 11월 13일 자 조선일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적지 않은 수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런 동기로 반제국주의 이념을 학습했다는 점을 증언해 줄만한 인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와 서울(경성)에서 항일 운동권을 수사한 친일 경찰 김면규가 바로 그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 김면규 편에 따르면,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25년 현재 서울(경성)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이었고, 1930년부터 1938년까지 경기도경찰부 소속이었다는 점만 확인된다. 1930년에 경기도 양평경찰서로, 1931년에 용인경찰서로, 1937년에 경기도 경찰부 본부로 옮겼다가 1938년에 경기도 광주경찰서로 전근한 이력이 남아 있다.

그는 1925년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1938년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 일제 경찰로 부역하면서 제국주의국가의 녹봉을 받았다. 꽤 오랫동안 친일 재산으로 생활을 이어간 그는 1926년에 밥값을 톡톡히 하게 됐다. 순종황제의 사망이 계기가 된 6·10 만세운동 시기에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는 성과를 거뒀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3·1운동이 종교계가 중심이 된 운동이라면, 7년 뒤의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한 운동이다. 이 학생들의 핵심 그룹이 조선학생과학연구회라는 점은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역사 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박헌영과 함께 초기 공산주의운동을 이끈 강달영(강달용·강달룡, 1888~1940)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강달영은 경찰의 집중 추적 속에서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학생들을 접촉해 시위를 준비해나갔다"라며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고려공청의 지도 아래 사회과학 학습을 위해 1925년 9월에 결성한 반공개 조직으로 회원이 5백 명이 넘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서술한다.

이런 서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조선공산당에 속한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함께 6·10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26년 6월 10일 시위대의 선두에 섰던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이현상은 훗날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이 됐다.

김면규는 바로 이 시기에 6·10 만세운동 배후의 공산주의 항일투사들을 찾아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면규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종로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5년 6월 순종 인산으로 예상되는 소요를 미연하게 방지하고자 고등계 주임 미와(三輪) 경부와 함께 출장을 거듭하며 정탐과 수사에 집중하던 중, 8월에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최초로 적발하고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권오설 등 35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일제는 6·10만세운동에 대해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응수했다. 이른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하에 공안정국을 조성해 독립운동을 억누르려 했던 것이다. 이런 공안정국 속에서 김면규는 수사관뿐 아니라 고문 기술자의 면모까지 함께 보여줬다. "1926년 6월부터 8월까지 종로경찰서에서 제2차 조선공산당 관련자 권오설을 비롯한 강달영·전정관·홍덕유·이준태·박래원 등을 취조하면서 살인적인 고문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라고 위 사전은 기술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권오설(1897~1930)은 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6권에 따르면, 3·1운동 전년도인 1918년에 21세 나이로 전남도청 고용원이 됐다. 3·1운동에 참여해 6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르고 경북 안동으로 귀향한 그는 처음에는 사회계몽운동에 참여하다가 "1922년경 동향 출신의 민족운동가 김재봉·이준태·김남수 등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됐다. 처음부터 사회주의자로 출발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뒤 자연스레 그 이념을 갖게 됐던 것이다.

김면규에게 고문을 당해 정신병을 갖게 된 강달영은 32세 나이로 3·1운동 시위대를 지휘한 일로 인해 1년 6개월간 수감됐다가 석방된 다음에 노동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런 뒤, 38세 때인 1925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또 다른 고문 피해자인 박래원(박내원, 1902~1982)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했다. 그랬다가 노동운동 및 청년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에 뛰어든 다음에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다.

권오설·강달영·박래원처럼 항일운동에 뛰어든 이후에 반제국주의 이념을 갖게 된 독립투사들이 적지 않았다. 김면규는 그런 사람들을 취조하고 고문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반제국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일이 흔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을 계기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가 노동운동 등을 거쳐 사회주의자로 전환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김면규에게 물어보라

국가보훈처일 때인 지난 3월 7일, 보훈부는 독립운동가들의 훈격(등급)을 재조정하겠다며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민공감위원 17명 중에서 9명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될 만한 인물들이다.

일제 식민 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 뉴라이트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재심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인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근거 없는 폄하가 쉽게 나올 수 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김면규 같은 친일 형사들을 불러다가 '누가 독립운동을 가장 지독하게 했는가'라고 물어보는 편이 팩트 확인에 더 이로울 것이다.

보훈부장관은 사회주의 같은 반제국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독립운동을 낮게 평가했지만, 그들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보다 강력한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이념과 활동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친자본적 이념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고 이런 분들의 공로도 상당했지만, 이념과 활동이 불일치하는 경우보다는 일치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강한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가가 자본가나 대기업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게 당연하듯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사람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이념을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 이념을 공유하는 것이 항일 조직의 단결력 강화에도 도움이 됐다. 친일파 김면규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수사는 윤석열 정권의 독립유공자 재평가가 이런 실정을 도외시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김면규는 지금의 국가보훈부에 꼭 필요한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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