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7 21:27최종 업데이트 23.06.27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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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6월 24일 당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6·25 전쟁에 참전한 국군 및 유엔군 유공자 초청 오찬에 입장하며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전쟁 73주년인 지난 2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남긴 페이스북 글이 화제가 됐다. 문 전 대통령은 재작년 6월 25일에 KBS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발간한 책 <1950 미중전쟁>을 추천하면서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기념하는 이유는 비극의 역사를 뼈저리게 교훈 삼기 위한 것"이라고 한 뒤 이렇게 썼다.

"<1950 미중전쟁>은 한국전쟁이 국제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쟁의 시원부터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힘이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또한 문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작용한 국제적인 힘이 바로 대한민국의 숙명 같은 지정학적 조건"이라며 "이 지정학적 조건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가안보전략"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실제로 KBS 제작팀이 이 책의 기초가 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전사자들이 남북한 군인들뿐만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책 서문에서 제작팀은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고지들에 포크찹·티본·이리·노리·베티 등의 외국 지명이 붙은 것과, 한국 땅에서 남북한 군인들뿐 아니라 외국 군인들의 유해도 많이 나오는 점을 지적했다. 
 
"한반도에 묻힌 채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미군과 중국군의 유해와 전투 흔적들을 접하면서, 이들은 왜 머나먼 한반도에 와서 피를 흘렸는지, 미군과 중국군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에서 <1950 미중전쟁>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제작팀은 KBS에 보관된 영상뿐 아니라 해외에서 수집한 영상과 연구 자료도 참고했다. 이를 통해 느낀 소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압도적인 국제적 힘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즉 북한의 남침,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중국군 개입과 전선의 고착, 그리고 지루한 정전협상과 고지전이라는 흐름 속에서는 국제적인 힘의 실상과 한반도에서 이 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지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국제전이면 '참전군인 예우' 안 합니까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이 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열린 국가보훈부 출범식 및 취임식에 참석하여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국가보훈부

 
<1950 미중전쟁>을 읽은 문 전 대통령이 남북한뿐 아니라 미국·일본의 힘도 작용하고 중국·러시아의 힘도 작용하는 지정학적 조건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당연한 말'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말'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 전 대통령의 글에 대한 정부·여당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26일 자 논평에서 "6.25 전쟁일이었던 어제, 대한민국의 한 전직 대통령이 6.25가 북한의 침략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피로써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지 70년이 지났지만, 민주당만은 여전히 '북한바라기'에 매몰되어 있는 듯하다"라고 발언했다. 

한국전쟁에 투영된 지정학적 측면을 감안해 안보 전략을 수립하자는 발언을 두고 국민의힘 대변인은 "6·25가 북한의 침략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듯한 행보"라고 엉뚱하게 해석했다.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해 안보전략을 수립하자는 대목이 윤석열 정권의 취약점을 건드린 것일까?

이승만 재평가를 시도하며 그의 냉전 이념을 현대 한국에 구현하는 데 앞장서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비판에 나섰다. 26일 오후 그는 "6·25전쟁 73주년 행사가 열리던 날, 문재인 전 대통령께서 올린 글이 자칫 오해와 갈등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6·25전쟁을 국제전으로 부각하며 전쟁의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메시지에 참전 유공자들이 분노하고 계십니다."
"6·25 참전 유공자들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영웅답게 예우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이 전쟁의 책임을 모호하게 하거나 희석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뒤 박 장관은 "6·25 전쟁은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의 야욕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입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한국전쟁은 국제전이 아니라 동족상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동족상잔"이라는 표현은 문 전 대통령의 페이스북 글에도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지만 국제전 성격도 띠었다고 말했다. 그런 국제적 역학관계를 기초로 안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베트남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순수하게 일대일로 전개되는 전쟁은 그리 많지 않다. 전쟁이 벌어지면 주변 나라들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다수의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전쟁이 그처럼 국제적 성격을 갖는다고 해서 참전 군인에 대한 보상과 예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참전 군인은 소속 국가로부터 보상과 예우를 받을 수 있다. 한국전쟁의 한쪽 진영을 주도한 쪽은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었지만, 이제까지 남한 정부는 참전 군인들에게 일정한 예우를 해왔다. 국제전인가 아닌가는 한국전쟁 참전군인에 대한 예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전략적 착오? 문제는 그들의 '이념적 경직성'
 

윤석열 대통령이 정부 출범 1주년인 10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민의힘과 보훈부 장관은 한국전쟁의 국제전 성격이 부각되면 전쟁 책임이 모호해진다고 반발했지만, 한국전쟁에 그런 성격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런 성격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편이 훨씬 더 힘들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세계가 미·소 냉전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 전쟁이 오로지 남북한의 군사물자로만 전개된 것도 아니다. 미국·중국·소련의 지원이 컸다. 남북 대결로 축소하기에는, 이를 부정하는 객관적 지표가 너무 압도적이다. 

게다가 남한은 공식적으로 이 전쟁의 직접적 당사국도 아니었다. 남한은 휴전협정 당사국에 끼지 못했다. 남한은 작전 지휘권도 갖지 못했다. 전쟁 발발 3주가 채 안 된 1950년 7월 14일, 미군에 그것을 이양했다. 

북한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미군의 반격으로 정권을 잃을 뻔했다가 중국군(중공군)의 개입으로 한숨을 돌리게 된 김일성은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통해 펑더화이(팽덕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김일성은 지휘권 이양을 싫어했지만, 소련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11월 16일 자 서한에서 "중국 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라며 펑더화이 편을 듦에 따라 지휘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이 중국뿐 아니라 소련의 지시까지 받는 이런 장면에서도 이 전쟁의 국제전 성격이 드러난다. 

윤석열 정권은 현재 북한뿐 아니라 중국·러시아마저 적으로 돌리고 있다. 일본과 손잡고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최일선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런 대외전략 기조를 감안하면, 지금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국제전 성격이 부각되는 것이 윤석열 정권에 그다지 불리하지 않다. 중·러 압박을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동참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명분을 한국전쟁에서 끌어낼 여지도 없지 않다. 

역대 정권들은 김일성의 남침을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면서 북한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런 분위기를 기초로 국가전략을 수립해왔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와도 대결하는 쪽으로 한국을 이끌어가는 윤석열 정권 입장에서는 기존의 접근법이 불리하다. 중·러와의 대결을 합리화할 명분을 역사에서 찾아내는 것이 윤석열 정권 입장에서는 절실하다.  

그런데 국민의힘과 박민식 장관이 신속히 나서서 그 여지를 차단하려 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남북 간의 일대일 구도로 부각시키고 이승만 대 김일성 구도로 축소하려는 의중을 드러냈다. 전략적 착오로도 평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이 드러나는 데는 윤석열 정권의 이념적 경직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등은 미·소 세계전략이 투영된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를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기보다는 '악마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데 주력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대한 적개심도 어느 정도 고조시켰지만, 김일성에 대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전쟁을 국제전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동족상잔으로 축소해서 인식하는 경향을 한국 사회에 만연시켰다. '한국전쟁' 하면 '김일성'부터 혹은 '김일성'만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조명되는 것이 윤 정권의 대외전략 기조에 결코 불리하지 않는데도, 정권 관계자들이 발끈하며 나서는 것은 한국 보수정권의 이념적 경직성을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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