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1 20:37최종 업데이트 23.06.2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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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4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이 시범 운항하는 모습 ⓒ 연합뉴스

 
조선통신사선을 재현한 선박이 오는 8월 5일 대마도(쓰시마) 이즈하라항을 방문한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및 부산문화재단과 쓰시마시 및 이즈하라항축제진흥회가 이 행사를 위한 업무협약을 지난 17일 체결했다.

17일 자 <요미우리신문> 기사 '한국에서 복원한 조선통신사선,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8월 내항(韓国で復元した朝鮮通信使船、長崎県対馬市に8月来航)'은 "에도시대에 조선왕조가 우호의 사신으로 보낸 조선통신사를 태워 일본을 오가던 통신사선이 8월 나가사키현의 외딴섬인 쓰시마시에 내항한다"라며 "약 200년 만에 한국에서 복원된 목조선으로, 일본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조선통신사선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것은 순조 임금의 재위 11주년인 1811년이다.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거점을 둔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을 지배한 지 208년이 되는 해였다. 음력으로 순조 11년 윤3월 20일 자(양력 1811년 5월 12일 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통신사 김이교와 그의 부사(副使) 이면구가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난 것은 음력으로 윤3월 12일인 양력 5월 4일이다.

<순조실록>은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한 것이 당일 오후라고 말한다. 이튿날 도착했다고 적힌 국내 논문도 있다. 이들이 대마도에서 우호의 상징이자 예물 교환식인 빙례(聘禮)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것은 음력 7월 3일인 양력 8월 21일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최후의 통신사 빙례가 됐다. 1840년대에 오사카에서 빙례를 거행하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1811년이 마지막이 됐고. 이때의 통신사 방문이 오는 8월 대마도에서 재현된다.

그런데 1811년 빙례는 일본 역사에서는 통쾌한 기억이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다르다.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불쾌한 기억이었다. 치욕스러운 기억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하필이면, 윤석열 정권의 굴욕외교로 인해 한국 국민들이 정신적 상처를 입은 시점에 200년 전 행사가 재연되게 됐다.

도쿠가와막부 시대에 일본을 지배한 것은 교토의 일왕(천황)이 아니라 에도의 쇼군(將軍)이었다. 조선과 청나라는 무신정권 수장인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승인했다. 그래서 통신사가 방문해 빙례를 거행하는 곳은 당연히 에도였다. 광해군 때인 1607년에만 교토에서 빙례가 열렸다.

그렇기 때문에 대마도는 빙례를 치를 장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역을 바꿔 대마도에서 거행했다. 그래서 1811년 빙례는 역지(易地)빙례로 불린다. 양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비정상적인 빙례였다.

조선통신사의 대마도행은 왜 문제적인가
 

역지빙례를 기념해 세운 비석. 2008년에 대마도에서 촬영. ⓒ 김종성

 

조선시대에 대마도의 법적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이 섬의 지배자는 조선으로부터는 대마도주 책봉을 받고 일본으로부터는 대마번주 책봉을 받았다.

대마도는 혈통적으로는 일본과 가까웠지만, 위 <요미우리신문>의 표현처럼 "외딴섬"이다 보니 일본과의 교류만으로는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과 일본 양쪽을 상대로 신하국을 자처하며 무역상의 이익을 얻어냈다. 대마도는 두 나라에 제공하는 조공 이상의 회사(回賜)를 답례로 받아내 무역흑자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경제를 이끌어갔다.

그러다 보니 대마도는 조선·일본 양측에 속국이 되는 양속(兩屬) 상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 양쪽에 속했다가 1879년 일본에 강제 병합된 유구 왕국(지금의 오키나와)과 비슷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흘 뒤인 1948년 8월 18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것은 대마도가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의 일원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양속 지위를 활용해 조선과 일본의 중재자, 또는 일본의 대리인으로 활약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수직적인 사대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교린관계였음에도, 조선이 일본을 낮춰보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이 조선과 직접 교류하기보다는 조선의 신하국인 대마도를 자국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일이 많다 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됐다.

대마도가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도 사대를 했다는 것은, 1811년에 빙례가 열린 장소가 엄밀히 말하면 일본 땅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땅에 들어가 막부를 방문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이때는 양국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에 머물다가 돌아왔던 셈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뒤 하급 무사들이 정변을 일으켜 막부를 무너트리고 일왕을 복권시킨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기운이 일본을 감돌게 되자, 1869년에 대마도는 스스로 일본에 편입됨으로써 조선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 이전까지 대마도는 양국의 공동 속국이었으니 1811년에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접대한 곳은 대문 바깥이라는 말이 된다. 문전박대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일이었다.

역지빙례에 숨어 있는 '조선 멸시'
 

대마도 이즈하라항의 풍경. 2008년 촬영. ⓒ 김종성

 
역지빙례는 일본 막부의 아이디어였다. 정조 임금 때인 1787년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나리 쇼군 시대의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제안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거론된 역지빙례가 정조 임금 사후인 1811년에 실현됐다. 시간이 오래 경과된 것은 조선 측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자국 사신이 에도가 아닌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역지빙례를 끝끝내 관철시킨 핵심 동기는 돈 문제에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환영 행사를 열고 선물을 증정해야 했기 때문에, 통신사의 방문은 일본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됐다.

2009년 1월 31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주최한 '17~19세기 동아시아 지식 정보의 유통과 네트워크' 국제학술대회에서 제임스 루이스 옥스퍼드대학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통신사가 에도까지 방문하면 일본 농업생산량의 3~12%에 상당하는 비용이 지출됐다. 이로 인한 부담감도 1811년 역지빙례의 원인이 됐다.

그렇지만 일본이 오로지 재정 부담 때문에 역지빙례를 제안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그 이전에도 재정 부담을 감내하며 조선통신사를 대접했다.

조선 후기에 일본이 국교를 체결한 나라는 조선과 유구뿐이었다. 청나라·네덜란드와는 통상관계만 맺었을 뿐이다. 조선이 유구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으므로, 일본이 국교를 맺은 나라 중에 가장 중요한 나라는 당연히 조선이었다. 일본이 비용 문제를 감수하면서까지 조선 사신을 환대한 것은 조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일본이 도쿠가와 이에나리 시대에 역지빙례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비용 문제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두드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문화를 전달해 주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앞섰던 조선이 '이제는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인식이 18세기 후반에 퍼진 결과다.

1991년 12월에 학술지 <경제사학>에 수록된 정성일의 '역지빙례 실시 전후 대일무역의 동향'은 "당시 막부 쪽이 내세운 것처럼 역지빙례안은 단지 재정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라며 "전과 달리 막부 안에서 조선을 점차 가볍게 보거나 심지어 멸시하기도 하는 이른바 조선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난 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2006년에 일본어문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한기승의 <역지빙례와 정한론>은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유학자 나카이 지쿠잔의 <초모위언(草茅危言)>에 담긴 아래 대목들을 소개했다.
 
"천년이나 속국이었던 소이(小夷)를 시세에 따라 인교를 맺고 예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원래 보잘것없는 사절을 지금은 속국이 아니더라도 이렇게까지 천하의 재속(財粟)을 기울여 응접할 필요는 없다."
 
한민족이 왜국의 속국이었다는 거짓 역사를 기초로 해서 "한민족을 어찌 예의로 대할 것인가", "보잘것없는 나라를 위해 재물과 곡식을 이렇게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글이었다.

위 발표문에 인용된 또 다른 문헌인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의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에는 "조선을 어찌 예의로 대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논조들은 이전에도 일본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로 유럽·중동·동남아와의 교역을 통해 일본 경제력이 크게 상승한 18세기에 막부의 조선 정책과 맞물려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같은 조선 멸시론이 역지빙례 실현에 영향을 주게 됐던 것이다.

한국을 멸시하는 그 같은 풍조는 19세기 중후반의 한국 정복론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기승의 <역지빙례와 정한론>은 "노골적인 조선 멸시와 정한론은 이미 역지빙례의 의도 속에도 숨어 있었다고 보여지며"라고 평했다.

역지빙례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통신사선이 대마도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크게 바뀌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재정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을 중시하던 일본이 대놓고 조선을 무시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나온 현상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일본 역사에서는 통쾌한 기억이었고, 조선 역사에서는 불쾌한 기억이었다. 그런 불쾌한 기억이 하필이면 윤석열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 하에서 오는 8월 재현된다. 

조선통신사선은 대마도 동쪽 일본 본토까지 갔다 오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 역사를 무시한 채 대마도에서 돌려보내는 의식을 또다시 재현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왕에 재현하는 것이라면, 일본 본토까지 갔다 오도록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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