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5 21:01최종 업데이트 23.06.15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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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이 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열린 국가보훈부 출범식 및 취임식에 참석하여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국가보훈부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모색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이번에는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 가능성을 띄우면서 이승만기념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민식 장관은 14일 보도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열린 자세로 죽산에 대해 한번 재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인 인물에게 그림자가 있더라도 빛이 훨씬 크며 후손들이 존중하고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접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꺼낸 말이 이승만기념관 문제다. "아울러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조봉암의 빛이 그림자보다 훨씬 커 조봉암을 재평가해야 하듯이, 이승만도 그런 식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봉암은 굳이 이승만과 함께 거론되지 않더라도 당연히 독립유공자로 지정돼야 한다. 조봉암과 이승만을 함께 언급하는 것은 이승만기념관 건립 반대 여론을 약화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보수정권이 거부한 독립운동가 

1898년생인 조봉암은 독립운동으로 인해 말도 못 할 고난을 겪었다. 1919년 3월 18일 강화도에서 21세 나이로 만세 시위에 참여한 그는 이날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 뒤 다음 달에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한 이듬해에도 일제 경찰에 붙들렸다. 기독청년회 관계자들과 함께 김원봉식 독립운동을 시도했다는 거짓 혐의 때문이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폭탄 수십 개를 감춰두고 기회를 봤다는 것이다. 그는 1957년 5월호 <신태양>에 기고한 <나의 정치백서>라는 짧은 회고록에서 "열닷새 동안 가지각색의 고문을"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1921년에 조봉암은 세이소쿠영어학교와 주오대학에 유학했다. 돈이 없는 그는 일본 땅에서 엿장수를 해가며 고학을 했다. 이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김원봉 친구 김약수(김두전) 등과 함께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1922년 이후에는 국내와 중국·소련 등지에서 공산주의 조직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끌려왔다. 이때 고문으로 다친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었다.

1937년에 석방된 그는 일제 패망 7개월 전인 1945년 1월에 예비구금령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위 회고록은 "허둥지둥하기 시작한 왜놈들은 국내의 모든 혁명분자, 반일본적인 모든 민족주의자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작정을 하고 모조리 검거하기 시작"했다고 한 뒤 "나는 일본 헌병사령부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8월 15일 오후에 출감"됐다고 회상했다.

한국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고 고난도 많이 겪었지만, 그동안 국가보훈부는 조봉암에 대한 독립유공자 인정을 거듭거듭 거부했다. 친일 혐의가 있다는 이유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1년 12월 23일 자 <매일신보>에 장병 위로금인 휼병금 150원을 납부했다는 기사가 그 근거가 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과 조사가 필요하다. 아시아 약소민족들을 침략한 일본군에 성금을 납부한 일은 가볍지 않은 일이다. 동시에, 그 일이 있은 뒤인 1945년 1월에 그가 체포·구금됐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헌병사령부 구금 중에 8·15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은 독립운동가 신분으로 일제강점기를 마쳤음을 의미한다. 그의 독립운동과 친일 혐의를 비교·형량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런 혐의가 그의 독립운동 이력에 범접하지 못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도 그의 이름이 없고, 이 보고서보다 훨씬 많은 친일파 이름을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사실, 누가 봐도 조봉암의 '공'은 '과'를 단연 능가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유공자 지정을 거부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뒤에 전향하기는 했어도 한때는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중 하나였다는 점, 해방 뒤에 보수진영의 미움을 사서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받은 점과 무관치 않다. 대중의 편에 서서 이승만 보수정권에 맞섰다는 점이 그에 대한 보수 정권들의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처럼 역대 보수정권이 비토해 온 조봉암을 두고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재평가 여지가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승만기념관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조봉암을 죽인 이승만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 위키 퍼블릭 도메인

 

윤석열 정권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이상으로 우경화하고 있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반영하는 직위인 경제사회노동위원장·진실화해위원장·국가교육위원장에 극우적 인물들을 앉혔다. 보수를 뛰어넘어 극우에까지 노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극우의 지지를 받는 자민당 정권과 '러브샷'을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윤 정권은 동유럽 극우를 뺨치는 일본 극우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윤 정권이 조봉암 재평가의 필요성과 이승만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연결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과거로 회귀시키는 윤 정권의 정책 기조로 볼 때, 보훈부 장관의 발언은 조봉암 재평가보다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겨냥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봉암을 하필이면 이승만과 엮는 것은 조봉암에 대한 중대 모독이다. 그의 일생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도 짓밟혔지만,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도 짓밟혔다. 이는 조봉암이 1952년 및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에게 연패한 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일본은 조봉암을 고문하고 구금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대선에서 연패한 그의 목숨을 빼앗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것도 모자라 조봉암 재판에까지 간여해 그를 죽음으로 확실히 몰아갔다. 제4대 총선(1958.5.2)을 앞두고 진보당 열풍을 잠재울 목적으로 그해 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진보당 지도부를 대거 구속한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에서 조봉암 문제를 계속해서 거론했다.

1990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 '제1공화국 국무회의' 제8화에 따르면, 1958년 3월 11일 국무회의 때 "유력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임이 틀림없습니다"라는 홍진기 법무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이제 (와서) 확증이 생겨 유죄라면, 전에는 증거 없는 것을 기소한 것 같이 들린다"라며 "외부에 말할 때 주의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1심 재판장인 유병진 판사는 사형을 선고해달라는 검사의 구형을 무시한 채, 7월 2일에 간첩 혐의를 무죄로 인정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자 7월 4일 국무회의 때 이승만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법관들만 무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며 "이러한 판사들은 처리하는 방법이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암시성 발언을 했다.

결국 그해 연말 유병진 판사는 법복을 벗었다. 이렇게 대통령이 재판에 직접 개입하는 상황에서 조봉암은 사형이 확정돼 1959년 7월 31일 61세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파괴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를 악용하고 농락하기까지 했다. 전직 공산주의자인 그를 대한민국 정부하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38도선 이북을 관할하지 못하는 '반쪽 정부'가 된 현실, 남한 내의 진보 진영이 총선에 대거 불참한 상태에서 정부가 구성돼 '반의 반쪽 정부'가 된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조치였다.

1973년 5월 12일 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제18화는 이승만 비서를 지낸 윤석오가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조봉암을 입각시킴으로써 좌우익을 중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라고 발탁 배경을 증언했다. 이렇게 조봉암을 이용했던 이승만이 나중에는 그를 빨갱이로 몰아 생명을 빼앗았던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 여론을 가라앉히고자 하필이면 조봉암을 끌어들이는 것은 두 인물의 악연을 무시하는 일이다. 조봉암은 이승만과 함께 거론될 필요도 없이 당연히 독립유공자로 지정돼야 할 인물이다.

이승만은 헌법 전문의 4·19 이념 문구가 개정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 땅에 발붙이기 어렵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이승만기념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물을 미화하는 일에 조봉암의 진보적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봉암을 악용한 이승만 정권을 답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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