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4 05:07최종 업데이트 23.06.1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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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한국인 환자의 알 수 없는 노래, 도쿄도가 금지한 까닭>에서 이어집니다.

<인 메이츠>의 촬영 무대는 가와사키항 해저 터널에서 차량이 다니지 않는 인도 구간. 서너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곳,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지만 어둑해서 몸피만 눈에 들어오고 가까이 가야 얼굴을 알아챌 수 있는 침침한 곳이다.


1165m에 달하는 긴 터널은 1923년의 관동 조선인 대학살로부터 백여 년의 시간을 나타내기에 적합했다. 축축한 조명은 학살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인의 마음 상태 같았다. <거리를 둘러싼 11가지 이야기>라는 전시 취지에도 어울리는 장소였다.

후니는 가와사키 교회에서 만난 친구와 조선인 환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노래를 만들었다. 터널에서 영상의 첫머리에 모습을 나타낸 후니는 몸을 이리저리 앞뒤로 흔들며 신세 타령인 듯 랩인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소리를 길어올린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가 랩을 하는 사이 어디선가 가슴을 파고드는 소리가 화면 가득 퍼진다. 형광등은 껌벅이고 후니의 랩은 끊어질 듯 이어진다.
 
제발 나를 내보내주세요. 내 이름은 오카모토 신키치.
난 일본에서 살 거야. 난 일본에서 살아갈 거야,
여기서라면 살아갈 수 있어. 난 여기서 살아갈 거야.
난 일본 사람이니까 조선 사람은 모두 말살이야.
난 일본인이니까 조선 사람 다 죽여버릴 거야.

후니가 감정을 억누르고 부른 이 대목, 도쿄도는 바로 이 부분의 가사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헤이트 스피치라고 지적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도쿄도의 말은 앞뒤를 살피지 않은 주장이다. 당시 겪었을 혹은 들었을 조선인의 고통과 의식에 대해 신세 타령처럼 노래하는 노래를 한두 글줄만 잘라내 차별을 선동한다고 딱지를 붙인 것이다.
 

<인 메이츠>의 촬영 무대에 선 이이야마 유키와 후니. 두 사람의 만남은 일본과 자이니치 예술가의 만남이다. ⓒ 이이야마 제공

 
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선인의 심리 상태는 어땠을까? 태어나 처음 지진을 겪고 사랑하는 가족이 맞아서, 찔려서, 베여서 죽는 모습을 보았다면, 살아남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물속에서 산속에서 몇 날 며칠을 지새워야 했다면, 제정신일 수 있을까? 일조(日朝)협회 도시마(豊島) 지부가 펴낸 <민족의 가시>에 후쿠시마 젠타로(福島善太郞)가 남긴 유명한 회상이 있다.
 
1일 정오를 조금 지났을 때 나는 이 치가와의 동네 어귀에서 10초 정도 떨어진 길을 배급받은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며 걷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형 육군 비행기가 여러 차례 열기로 가득 찬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고노다이의 기병대가 계속해서 피난민 대열을 제치고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조선 놈들을 군대가 때려죽이고 있다네."
"폭동을 일으키려 한 패거리야!"
"뻔뻔스러운 놈들! 개새끼들!"
"우와아!"

지금까지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걷고 있던 피난민들이 큰소리를 외치며 기세 좋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만 이끌리듯 달렸습니다. 그리고 100m 가까이 달렸을 때 군중들의 머리 너머 왼쪽 논 가운데서 무섭도록 참혹한 참상을 보았습니다. 조잡한 무늬가 있는 홑옷을 입은 사람, 불에 그을린 청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 등 일곱 명이 뒤로 손이 묶인 채, 게다가 염주 꿰듯이 엮인 채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조선 사람들이었는데 창백한 얼굴로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시부렁거리지 마, 새끼야!" 갑자기 한 사람의 군인이 총검의 개머리판을 크게 휘둘러 올리는가 싶더니 맨 끝에서 마구 몸부림치던 남자의 머리를 퍽 하고 내리쳤습니다. "앗!" 군중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슬금슬금 시선을 돌렸을 때는 두개골이 바스러져서 새빨간 피가 부근에 튀어 흩어지고 손발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하하하, 꼴 좋다!"
"이 새끼들! 모두 때려죽여버려!"
"좋아! 이 개새끼들!"
"야! 이 불령선인 놈들! 뒈져버려!"

10여 명의 군인들이 일제히 총과 개머리판을 휘둘러 댔습니다. 2일 오후 2시 전후에 이치카와로 건너가는 다리 몇 초(町)되는 곳에서 이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가슴을 찔려 흐릿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숨이 끊어진 자, 거의 끊어질 정도로 팔이 잘린 채 진흙밭에 머리를 처박고 버둥거리던 자, 넓적다리가 석류 벌어지듯이 갈라져 터질 듯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던 자, 끊어지려는 숨을 진흙과 함께 들이마셨는지 가슴에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자 등의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합니다.
 
이 사례는 조선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숨죽이고 지켜본 사람, 그런 조선인의 정신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조선인 환자A를 표현한 노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미역국에 밥 말아먹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번 먹고 싶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조선인 환자의 간절한 염원이었으리라. 환자A의 노래에 이어 환자B의 노래를 후니는 좀 더 빠르게 좀 더 격하게 부른다.
 
난  3월 1일에 태어났어. 전라남도, 전라남도.
독립운동의 날에 태어났어.
태어난 곳은 조선 전라남도.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땅은 어디인가.
 
환자B는 환자A처럼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자기 생일이 3월 1일이라고 기억한다. 후니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 시를 쓰고 곡을 만들었다.

검열 사태의 본질

<인 메이츠>는 이런 작품이었다. 26분의 짧은 단편으로 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조선인 환자에게 남은 상처를 드러낸 작품이다.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외친 후니의 랩은 가슴 절절한 조선인의 한을 표현하고 재일 조선인의 처지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인 메이츠>의 포스터. 조선인 환자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이다. ⓒ 이이야마제공

 
그런데 차별을 선동하고 있다고 딱지를 붙여 상영을 금지하다니... 이는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을 덮기 위해 억지 논리를 끌어온 것에 불과하다. 올해 관동대학살 백주기를 맞아 일본시민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도쿄도는 인권플라자에서 "조선인 학살이 사실이었다"는 <인 메이츠>의 목소리가 퍼져 일본 안팎에서 진상 규명의 열기가 높아지는 게 두렵고 불편했던 것이다. 이것이 <인 메이츠> 검열 사태의 본질이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본 문부성에서 검인정을 받은 많은 교과서가 이 사실을 역사의 진실로 기록하고 있다.

1977년 출판사 자유서방에서 발간한 <개정판 신일본사>는 "이 혼란 속에서 여러 악소문이 일어나 다수의 죄없는 조선인과 노동운동가 등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 등도 헌병대에서 살해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다나카 아키라(田中彰) 등이 공저한 2003년판 <일본사A>는 "학살 사건이 계속되었던 것은 민중 속에 뿌리 깊은 조선인, 중국인 멸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원인을 분석했다.

이 외에도 1968년판 제국서원의 <고등학교 신일본사>, 1973년에 산천출판사에서 나온 <정선일본사>, 2011년에 청수서원에서 발행한 <신중학교 역사 일본의 역사와 세계>등에서도 조선인은 학살당했고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도쿄도의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무엇이 사실인지는 역사가가 밝혀야 한다"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도지사로 취임한 이듬해부터 도쿄 스미다구의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해마다 9월 1일에 열리는 추도식에 추모사를 보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인 메이츠> 검열 사태는 고이케가 직접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도쿄도 총무국 직원이나 산하기관이 도지사의 생각을 헤아려 벌인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도쿄도의 궁색한 논리

2022년 10월 28일 이이야마는 후생노동성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열 사태를 세상에 공개한 후 줄기차게 도쿄도에 <인 메이츠>의 상영을 촉구했다. 도쿄도의회에서 상영된 <인 메이츠>를 보고 도의원들 일부도 도쿄도에 시정을 요청했지만 도쿄도와 인권플라자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이이야마는 이에 굴하지 않고 2022년 말부터 서명 운동에 들어갔다. 2023년 3월 1일까지 모은 3만 138명의 온라인 서명서를 도쿄도 인권부에 전달하고 <인 메이츠>의 상영을 다시금 요청했다. 그는 "인종 차별주의와 역사수정주의에 반대한다"라는 문구를 수 놓은 니트를 입고 도쿄도 청사에서 기자회견도 열었다. 이날 회견장에는 많은 언론사가 왔지만 도쿄도 측은 미디어의 참여 없이 요망서를 받으려 했다. 또 인권부 담당과장은 의견을 듣되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도쿄도의 인권 조례를 담당하는 인권부가 맞나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2023년 3월 1일 도쿄도 인권부에 <인 메이츠> 상영 요망서를 전달하는 이이야마와 후니. 후니가 들고 있는 것은 3만 138명의 서명문이다. ⓒ 이이야마제공

   

이이야마와 후니는 도쿄도에서 <인 메이츠> 상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이이야마는 역사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문구를 수놓은 니트를 입었다. ⓒ 이이야마제공

  
한편 도쿄도는 이이야마의 이런 저항에 여론의 눈치를 보아서인지 인권플라자에 지침을 내리며 강조했던 논리를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대신 "재일코리안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면 일본인이 반감을 가진다", "<인 메이츠>가 '장애인과 인권'이라는 기획전의 취지를 벗어났다"는 점을 강조하며 언론과 시민사회에 자신들의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재일코리안의 어려운 취지를 알리면 일본인이 반발한다"는 도쿄도의 말은 일본시민사회에서 궁색한 변명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식이면 도쿄도가 내세운 인권과제 "장애인, 노숙자, 어린이, 여성, HIV' 등과 같은 12가지 정책에 대해서도 반발을 우려해야 하기에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정책은 영원히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전시취지'에 <인 메이츠>가 부적합하다는 설명에 대해 3월 1일 도쿄도 기자회견에 함께한 사회학자 아케도 타카히로(明戸隆浩)는 "'조선인 환자'는 정신질환자여서 차별 받고 조선인이어서 차별받았다.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은 것이다. <인 메이츠>가 담고 있는 가장 큰 메시지가 바로 이런 복합 차별에 관한 문제다. 그렇기에 <인 메이츠>는 '장애인과 인권'이라는 전시 취지에 가장 깊이 다가간 작품"이라고 반박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두 사람에게 내민 손길

이이야마와 후니는 검열 사태 후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어디든지 달려가고 있다. 이들의 용기에 일본의 청년학생, 시민사회, 예술가 단체들은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는 2022년 11월 2일 "도쿄도 인권부는 검열을 중지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한국인 학살이 없었다면 증거를 대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23년 3월 18일에는 일본의 미술평론가연맹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에게 <인 메이츠>는 인권플라자에서 정당하게 상영되어야 하고 이것이 인권플라자의 취지에 맞다는 의견문을 전달했다.

한편 상영금지가 되자마자 그의 모교 도쿄예술대학 그리고 와세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이이야마를 초청해 <인 메이츠> 상영회를 열고 응원을 보냈다. 2023년 3월 4일에는 가와사키시 일본영화대학 하쿠산(白山) 캠퍼스에서 <인 메이츠>를 상영하고 '예술과 검열'이라는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자리에는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른 한국 가수 '이랑'도 참여해 한일 예술가가 연대하며 굳게 손을 잡았다.  
     

2023년 3월 4일 일본영화대학 하쿠산 캠퍼스에서 열린 '예술과 검열' 토론회 포스터. 이 자리에는 한국의 가수 이랑도 참석했다. ⓒ 이이야마제공

 
<인 메이츠>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가 열릴 때마다 참가자들은 많이 놀란다. 이이야마와 후니가 배경도 재능도 서로 다른데 어떻게 힘을 합쳐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신기해하며 많은 격려를 보낸다.

관객들이 이이야마에게 빼놓지 않는 질문 중 하나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가이다. 이이야마는 "국적이 다르다고 보통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연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부조리에서 작품의 동기를 발견한다. 또 장애인의 권리가 있다, 인권이 있다, 존엄성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용기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술이 장애 문제를 어떻게 껴안고 갈지를 고민한다. 이런 만남, 이런 깨달음이 내게 소중했다"라고 말한다.

이이야마는 관객의 응원에 고마워하면서 "예술가의 수입이 워낙 들쭉날쭉인데 지금은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없어서 생활이 더 불안하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과거의 역사를 감추고 없애버리는 그런 행동은 민족 차별, 인권 무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힘으로 막으려는 권력에 맞서 한국을 비롯해 세계의 형제들과 연대하고 싶다"라고 씩씩하게 말한다.

한편 후니도 "이이야마상과 이 작품을 하면서 시인으로서 래퍼로서 거듭났다"며 "나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노래를 가지고 어떻게 밥 먹고 살아가느냐, 그런 노래로 저항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런 압력을 많이 받았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솟아 나오는 에너지를 멈출 수 없어서 이 자리까지 왔다"라고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래퍼의 활동이 극영화나 다큐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체험했다. 이제까지의 작업은 내 감정을 랩으로 바꾸는 것에 머물렀으나 <인 메이츠>를 통해서 역사 문제, 민족 문제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뉘우치지 않은 역사, 잘못을 빌지 않은 역사는 그 모습을 잠시 감추거나 구석지고 그늘진 곳에 숨길 수도 있지만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잊힐 수도 없다. 100년 전 조선인 대학살의 상처는 왕자뇌병원의 책장에 묻혀 있었다. 어쩌면 사라질 수도 있었던 이 기록은 일본인 감독과 자이니치 두 청년 예술가에 의해 <인 메이츠>로 햇살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 세상 앞에 진실을 말하고 우레처럼 증언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외롭고 힘들 뿐이다.

도쿄도 인권플라자 기획전시실에서 <인 메이츠>가 당당하게 상영되는 날은 언젠가 올 터이다. 다만 그날이 빨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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