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0 17:53최종 업데이트 23.04.20 17:53
  • 본문듣기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3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63주년 4·19 기념사는 어딘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준다. 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그는 "이곳 4·19민주묘지에는 오백일곱 분의 4·19민주영령들께서 영면해 계십니다"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해 횃불을 높이 들었던 학생과 시민의 위대한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그는 4·19의 주역들을 4·19의 적들과 대비시키지 않고 엉뚱하게도 '사기꾼'을 꺼내 들었다. "거짓 선동, 날조, 이런 것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은 독재와 전체주의 편을 들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는 경우를 세계 곳곳에서 저희는 많이 봐왔습니다"라며 "이러한 거짓과 위장에 절대 속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이런 다음, "4·19 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4·19가 만들어 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승만 같은 독재자들에 의해 농락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위선적인 민주주의 운동가나 인권운동가들에 의해 농락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위선적인 운동가들을 당연히 경계해야겠지만, 4·19 영령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겨냥하지 않고 '사기꾼'들을 겨냥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생각하게 된다.

이날 기념식의 주제는 '자유의 꽃이 피련다'였다. 국가보훈처는 18일 보도자료에서 "독립유공자이자 4·19 공로자이신 이희승 님이 4·19혁명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쓴 비문의 일부"라며 이 문구를 택한 이유에 관해 "4·19 혁명에 참여한 정의로운 학생과 시민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가 꽃피울 수 있었음을 전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지켜낸 4·19 혁명의 가치를 계승·발전시켜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윤 정부는 자유의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었다고 4·19를 평가하면서도 모순된 모습도 함께 보여줬다. 4·19에 즈음해 게재된 <월간 조선> 5월호 기사 '인터뷰: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추진하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도 그중 하나다.

보훈처장이 4·19 영웅들이 아닌 4·19의 적을 찬미하는 인터뷰 기사다. 이런 기사가 하필이면 4·19에 즈음해 발행됐다. 발행 일시를 결정하는 것은 언론사의 몫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런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4·19에 대한 보훈처장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인터뷰에서 박 처장은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샛별 같은 존재"라고 이승만을 평가한 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이미 민주공화정을 지향했던 분"이라고 칭송했다. 대통령이 되어 민주주의를 파괴한 측면은 언급하지 않고 청년 시절 잠깐의 독립협회 활동을 근거로 터무니없는 호평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박 처장은 "역시 노년에 이르러 주변 관리를 잘못한 부분이겠지요"라며 "그것이 권위주의 정치로, 또 결국은 그분이 하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생물학적인 연령, 노쇠함 이런 것이 영향을 많이 줬을 것 같고"라며 말을 멈췄다. 나이 들어 주변관리를 못 한 것이 이승만 폭정의 원인이라는 해석이다. 윤 대통령이 추모한 "오백일곱 분의 4·19 민주영령들께서"는 그런 생물학적 고충도 이해 못하고 이승만을 매정하게 몰아낸 분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킬링필드에 버금가는 민간인 학살의 주역"
 

지난 3월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 연합뉴스

 
국가보훈처는 460억 원을 들여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노무현(115억)·김영삼(59억)·박정희(200억) 기념시설에 소요된 비용보다 훨씬 많은 돈을 4·19의 적을 위해 쓰고자 하는 것이다.

19일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긴급토론회 때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발표한 내용을 들어보면, 이승만에게 그만한 돈을 쓰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민주당 이용빈 의원실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이승만 우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이승만: 두 번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이준식 전 관장은 이승만을 '한국판 폴 포트'에 비유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공한 발표 자료에 따르면, 이 전 관장은 "1970년대 중반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킬링필드에 버금가는 민간인 학살의 주역"이 바로 이승만이라고 강조했다. 장기독재·부정선거나 친일청산 방해 외에 이승만의 또 다른 악행인 양민 학살을 근거로 한국판 폴 포트를 언급한 것이다.

이 전 관장은 파블로 피카소의 1951년 작인 '한국에서의 학살'도 파워포인트에서 제시했다. 황량한 들판의 왼쪽에는 임산부 등이 포함된 알몸의 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서 있고, 오른쪽에는 무장한 남성들이 여성과 아이들에게 총칼을 겨누는 장면이 있는 그림이다.

위 인터뷰에서 박민식 처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윤석열 정부가 정말 큰 결심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기자의 말에 대해 "적절한 기회에 대통령께서 공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밝히실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이승만 띄우기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의지를 전했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이승만은 오른쪽에 섰던 악당이다. 자유의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피로 물들인 자유의 적이었다. 그런 이승만을 숭배하며 세금을 쏟아붓는 윤 정부가 4·19 영령들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토론의 두 번째 발표자인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이승만 기념사업의 현황과 대응'이라는 발표에서, 4·19 혁명과 하와이 망명으로 곤두박질친 이승만의 위상을 다시 세우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시점이 1994년이라고 평가했다.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와 1987년 한국 6월항쟁에 뒤이어 1989년에 베를린장벽 붕괴가 발생하고 1990년에 독일 통일이 이뤄지는 탈냉전 속에서 한반도에도 일시적으로 온화한 바람이 불었다. 1991년 9월 18일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동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그로부터 12일 뒤 냉전의 한 축인 소련이 붕괴했다.

이런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논의가 오가다가 1994년 6월 28일에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날짜(7.25~27)가 발표되는 역사적인 상황들이 발생했다. 이 회담은 김일성의 7월 8일 사망으로 무산됐다.

극우세력의 이승만 띄우기
 

1994년 3월 13일 <조선일보> 기사 '원로 정치인 이철승씨 반공재야로 바쁘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방학진 실장은 "1994년 7월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반공 세력의 위기감이 고조됐다면서 이 시점에서 이승만이 반공의 아이콘으로 다시 부각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극우의 이승만 띄우기를 보도한 그해 3월 13일 <조선일보> 기사 '원로 정치인 이철승씨 반공재야로 바쁘다'를 소개했다. 이 기사는 그해 2월 4일 이철승·백선엽·오제도 같은 대표적인 반공주의자들이 '건국원로 대표 긴급 시국대책회의'를 결성한 동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철승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했다.

"여야 정치인 할 것 없이 전범의 테러리스트인 김일성을 못 만나 안달을 하는가 하면, 공영방송에서 건국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하고···."

남북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극우세력이 이승만을 구심점으로 내세우는 일은 그해 한 해 동안 긴박하게 진행됐다. 6월 30일에는 이승만 아들인 이인수씨를 중심으로 200여 명이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우남 이승만 기념사업회 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 7월 15일에는 <우남회보> 창간호가 발간되고, 8월 26일에는 제1회 우남 아카데미 강좌가 열렸다. 9월 8일에는 기념사업회 회장단이 결성되고, 9월 26일과 10월 26일에는 우남 아카데미 강좌가 거듭 열렸다.

위 자료에 "4·19혁명 후 34년 동안 잠잠했던 이승만 기념사업의 활성화"라는 문구가 있다. 이승만이 국민들의 분노를 피해 하와이로 달아난 이후 34년간 한국 극우들은 감히 이승만을 당당히 내세우지 못했다.

그런 그들이 용기 내어 이승만 기념사업을 노골적으로 추진한 것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 교류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다. 냉전과 반공을 걷어내는 온풍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자유나 민주의 적일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적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에서도 당시의 극우세력이 이승만을 적극 띄웠던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이승만을 적극 띄우는 것은 이 정권이 자유나 민주, 한반도 평화나 통일 등에 무관심함을 드러낸다. 윤 대통령의 4·19 기념사가 개운치 않게 들리고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띄우기로 분주한 것은 이 정권이 4·19의 적들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