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7 11:55최종 업데이트 23.04.1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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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권우성


지난 2월 24일 국회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으로 선출된 허상수 재경4·3희생자유족회 공동대표가 대통령실 심의 과정에서 인사 검증 결과를 이유로 뒤늦게 탈락한 사실이 알려졌다.

지난 14일 <한겨레>는 허상수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신임 위원에 대한 인사 발령이 20일 전후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는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의 말을 소개했다.


16일 <제주일보>는 허상수 대표에게 적용된 결격 사유가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에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위반한 전력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허 대표는 40년 전 국보위 조치법으로 금지한 노조 결성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라며 "허 대표는 1년 8개월 전 재심 재판을 통해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고 전했다.

허상수 대표는 지난해 1월 19일 <경향신문>에 실린 '잘못 부인하는 과오를 넘어'라는 기고문에서 "필자는 박정희 체제가 영구 집권할 목적으로 제정, 시행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헌법 위반 법률에 의해 40년 동안 범죄 전과자로 남았었다"라고 한 뒤 "1981년 봄 검찰은 1980년 4~5월 서울 한복판에서 집단해고 철회 집단행동을 했다면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필자를 구속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실이 허상수 대표의 결격 사유로 적용했다고 알려진 국가보위 특별조치법은 1980년 당시 노동권을 터무니없이 제약한 악법이었다. 이법 제9조 제1항은 "비상사태하에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 관청에 조정을 신청하여야 하며, 그 조정 결정에 따라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국민의 헌법적 권리인 노동권을 일개 관청의 임의적 판단에 맡겼던 것이다. 제11조 제2항에서는 "제9조의 조치 또는 규정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노동권을 심각히 침해하는 이런 악법이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다. 2015년 3월 26일 헌법재판소는 "이는 모든 근로자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사실상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근로 3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구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11조 제2항 중 제9조 제1항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특별조치법 제9조 위반은 정당한 탈락 사유가 될 수 없다. 

전두환 집권기에 노조 활동은 극도로 억압받았고 이 시기 노동운동은 민중 생존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를 이유로 국회에서 진실화해위원으로 선출한 인물을 대통령실이 탈락시키는 것이 정당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 규명이 진실화해위 업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4조 제1항은 "위원회는 상임위원 3명을 포함한 9명의 위원으로 구성한다"고 했고, 제2항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1명과 국회가 선출하는 8명을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진실화해위 구성에서 대통령의 실질적 지분이 9분의 1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나머지 8을 선출하는 것은 국회다. 그런데도 9명 전체를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한 것은 조직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다. 8명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권은 형식에 불과하므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한 8명을 그대로 임명하는 게 원칙이다.

만약 임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유가 확실해야 한다. 전두환 집권기의 노동운동과 이로 인한 전과가 합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전두환 시절의 노동운동·민주화운동·통일운동이 정당했다는 것은 1987년을 뒤덮은 6월항쟁의 함성으로도 판가름 났다.

허상수 대표를 포함한 6명이 진실화해위원으로 선출된 2월 24일, 국민의힘 의원들은 날 선 반응을 보이며 국회 본회의장을 퇴장했다. 국민의힘이 화를 낸 것은 이 당이 추천한 극우적 인물인 이제봉 울산대 교육학과 교수가 탈락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추천한 세 명의 후보 가운데 이옥남·차기환 후보는 국회 표결을 통과했으나 이제봉 교수는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날 윤 대통령 최측근인 권성동 의원은 "여야가 서로 추천한 사람에 대해 동의해주는 게 관행이고 묵시적 합의"라며 불만을 표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날 하기로 예정됐던 정부조직법 처리마저 사흘 뒤로 연기됐다.

진실화해위의 핵심 기능은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죄악을 규명하는 일이다. 과거사 정리법 제2조 제1항 제4호는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를 규명하는 것이 위원회 업무라고 규정했다.

이제봉 교수는 2022년 6월 5일과 7일에 올린 유튜브 동영상에서 장기독재와 민간인 살상 및 친일청산 방해 등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정부'로 미화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한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던 미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돼 친이승만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1948년 내각에 들어간 사실을 근거로, 이승만 정권에 대해 그런 터무니없는 평가를 내렸다.

이제봉 교수는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권인 이승만 정부를 미화하는 동시에, 권위주의 이후의 정권인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흑색선전을 퍼부었다. 세 정권의 문제점을 합리적으로 지적하지 못하고, 김일성주의자들이 세 정권에 영향을 미쳤다는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이는 이제봉 교수 선출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이 너무도 당연함을 보여준다.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적극 추진하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의 행보에서도 드러나듯이, 윤석열 정부는 4·19 때 쫓겨난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세우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봉 교수는 극우적 관점에서 이승만 재평가에 가세하고 있다. 이런 인물을 진실화해위원으로 만들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허상수 대표에 대한 대통령실의 조치에 반영됐을 여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전두환이 정치 잘했다"는 낡은 사고 버려야

허상수 대표는 이제봉 교수뿐 아니라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과도 대비되는 인물이다. 김광동 위원장은 2014년 4월호 <한국논단>에 '제주 4·3 폭동은 반한·반미·반유엔·친공 투쟁'이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제목만 봐도 그가 제주 4·3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드러난다.

제주4·3연구소 이사를 지내고 재경4·3희생자유족회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허상수 대표는 김광동·이제봉과 달리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는 길을 걸어왔다. 노동운동 현장에서뿐 아니라 학문 영역에서도 권위주의에 맞서왔다.

지난 2월 24일 국회 표결 당시 민주당은 국회에 제출한 추천서에서 "한국 민주주의 운동 및 노동문제, 인권 등에 관한 남다른 학문적 업적"을 갖고 있으며 "1988년 한국사회연구소를 설립하며 민주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허상수 대표를 평가했다.

그는 4·3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4·3 학살에 대한 미군정의 책임도 주저 없이 지적했다. 일례로, 2010년에 <4·3과 역사> 제9호·제10호(합본)에 기고한 '민주화와 이행기의 정의 그리고 인권-제주도민 피학살사건의 중대한 인권침해 죄상을 중심으로'에서 그는 "제주에서는 미군 장교들이 도리어 학살 만행을 감싸고 그 지휘자의 공적을 치하하여 훈장 수여를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런 뒤, "미군정의 학살범죄 혐의는 해소되기 어렵다"라며 "미군정의 정치적 책임, 군사적 책임과 아울러 법적 책임을 추궁해야 마땅하다고 사료"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학문적 결과물은 그가 진실화해위원이 되기에 적합함을 보여준다. 전두환 집권기에 노조 활동을 한 이력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인물을 빼놓은 채 신임 진실화해위원을 임명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정한 조치다.

전두환 손자인 전우원씨도 광주를 찾아가 할아버지의 죄악을 사죄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는 낡은 사고를 버려야 한다. 전두환 시절의 악법을 위반한 이유로 허상수 진실화해위원 임명을 무산시키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낡은 정권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충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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