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그림은 훌륭한 업적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가 배출한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어록이다.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일컬어주는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대표하는 화가이면서, 생전보다는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은 '비운의 거장',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광인'까지,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고흐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2월 2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87회에서는 '스스로 귀를 자른 광인? 고흐의 숨겨진 이야기'편을 통하여 고흐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인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등장했다.
 
고흐가 등장하던 19세기 서양미술사는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과 사진기의 최초 등장으로 '눈에 보이는 사실 그대로의 그림'은 설 자리를 잃었다. 사진기에 밀린 화가들은 직업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등장하며 훗날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후대까지 사랑을 받게된 인물이 바로 고흐였다.
 
고흐는 네덜란드과 독일의 접경지(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 지역)의 지명이었고, 반 고흐라는 말의 의미는 '고흐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의 준데르트라는 마을에서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안나 카르벤투스 부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흐는 어린 시절 다소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엄격했던 목사 아버지와 폐쇄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 고흐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살부터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외톨이 기질로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입학-전학-자퇴를 반복했다. 결국 어느 한 곳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좌절감, 부모로부터의 애정결핍은 이후로도 고흐의 삶에 뿌리깊게 박힌 어두운 감정을 남기게 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방황하던 고흐는 16세때 동명의 큰아버지 빈센트의 도움으로 아트딜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미술과의 인연을 시작한다. 학교생활조차 적응하지 못했던 고흐가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가졌던 직업이 바로 아트딜러였다고. 고흐는 7년간 화랑에 근무하며 수준높은 그림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사는 동네를 묘사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고흐는 장 프레수아 밀레의 걸작 '만종'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게된다. 농민들의 화가로 불리우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밀레와 삶과 작품은 고흐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밀레의 영향을 받은 고흐는 23세에 아트딜러를 그만두고 돌연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25세에 임시 선교사가 되어 벨기에 보리나주를 찾은 고흐는 탄광촌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을 구제하는데 발벗고 나서면서 '탄광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초기작인 '석탄을 나르는 사람들' '눈속에서 석탄부대를 나르는 사람들'도 이 시기 탄광촌의 실제 모습을 조명한 것이다.
 
하지만 선의와 별개로, 지나치게 광적이었던 고흐의 행동은 주변의 우려를 자아냈다. 심지어 고흐의 지병인 우울증이 악화되면서 목사인 아버지는 고흐를 정신병원에 넣을 것까지 고려했다. 이에 반발한 고흐는 가족들과 한동안 연락을 끊었고 주변의 지인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며 고립되기에 이른다.
 
외로운 고흐에게 평생의 은인이자 유일한 후원자가 되어준 것은 바로 동생 테오 반 고흐였다. 성공한 아트딜러로 자리잡은 테오는 형에게 경제적인 지원까지 해주며 오직 걱정없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만 650통이 넘을만큼 두 형제의 관계는 끈끈했다.
 
고흐는 27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던 네덜란드로 돌아온 고흐는 그림에 집중하며 부모와의 관계도 잠시 회복되는 듯 했다.
 
그런데 고흐 가족의 일상에 또다른 풍파가 찾아온다. 바로 고흐가 '금단의 사랑'에 빠진 것. 고흐의 친척인 사촌누나 케이 보스는 7세 연상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까지 키우고 있었다. 고흐는 사촌누나에게 스토킹과 자해까지 일삼으며 집착했다. 가족들의 결사반대로 결국 포기했지만, 이 사건으로 고흐는 아버지와 관계가 악화되며 다시 집을 떠나 헤이그로 향했다.
 
고흐는 헤이그에서는 이번엔 시엔이라는 매춘부를 만나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고흐의 1882년작 '슬픔'은 바로 시엔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다. 나체의 여성이 주저앉아 두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좌절하는 듯한 모습, 매춘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배 가 부른 여인의 모습은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낸다. 
 
양 교수는 "고흐의 사랑은 아름다움이나 찬란함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고 분석하며 시엔에 대한 감정도 '측은지심'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고흐는 시엔에 대하여 일종의 구원 환상(곤경에 처한 이에게 삶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심리)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환상과 달랐다. 가족들은 고흐의 사랑에 반대했다. 고흐는 수입이 없었고 동생 테오가 준 생활비로 시엔의 가족들까지 보살펴야하는 상황이었다. 시엔은 생계를 위하여 다시 매춘에 나서야 했고 이에 분노한 고흐는 시엔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30세가 된 고흐는 가족과 연인에게 버림받고 홀로 고립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1885년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감자먹는 사람들'은 사실상 고흐가 사실상 "나의 첫 작품"이라고 할만큼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고흐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식사 풍경을 통하여 "그들이 노동을 통하여 어떻게 그들의 음식을 얻었는지 그리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이후로도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주제는 고흐의 그림인생에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고흐의 만족과 달리 그의 그림은 당시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고흐는 파리로 떠나서 동생과 함께 살게 됐다. 1880년대 후반 파리는 당대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부상했고, 고흐는 예술가들이 몽마르트 언덕 일대에서 정착하며 '압생트와 카페 테이블(1887)'등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색'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파리 일대에서 활동하던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카피유 피사로 등의 유명화가를 중심으로 강력한 색채와 초현실적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면서 미술계를 뒤흔들게 된다. 고흐 역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그림 세계에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전과 달리 화려한 색채가 강조된 '클리시대로' '몽마르트의 풍차와 시민농장' '쿠르브부아의 다리(1887)'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은 '오이란' '가매이도의 매화정원' '꽃핀 매화나무' 등에서 고흐 스타일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파리에서 보낸 2년 간의 다양한 경험은 고흐가 화가로서 자신의 자질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시기로 꼽힌다.
 
1888년, 화가생활 8년째이자 어느덧 35세가 된 고흐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 정착하며 화가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화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안식처이자 작업실이었던 '노란 집'을 얻게 된다.
 
고흐의 또다른 대표작중 하나인 '카페 테라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1888)'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고흐는 기존 미술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보색을 사용하여 밤을 따뜻하게 묘사해 낸 최초의 화가로 꼽힌다. 물감을 두툼하게 올려 밤하늘이 움직이듯 표현해내며 보색대비와 함께 질감이 잘 느껴지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아를에 정착한 고흐는 파리에 있는 화가들에게 초청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또다른 천재 화가인 폴 고갱(1848-1903)도 있었다.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두 사람은 파리에서 처음 만났고, 고흐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던 고갱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테오는 화가 공동체에 큰 관심이 없던 고갱에게 생활비 지원을 조건으로 아를행을 제안했다. 고흐는 고갱을 위하여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아메리카의 향수를 자극한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하지만 두 사람의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차츰 성격차이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은 그림을 대하는 세계관이 너무나 달랐고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고흐는 고갱과 대립할 때마다 종종 흥분과 발작을 드러냈다.

고흐와 고갱의 불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 화가(1888)'였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는 기대감으로 들떴지만, 고갱의 그림에서 고흐는 술에 만취한듯 피곤하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인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는 고갱이 고흐를 낮춰보는 심리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림을 본 고흐는 "내 모습은 맞지만 미쳐버린 내 모습"이라며 분노외 실망감을 드러냈다.
 
고갱은 다시 파리로 떠나고 싶어했고, 고흐는 그런 고갱에게 집착하며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했다. 급기야 고갱과의 다툼 끝에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고흐는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는 끔찍한 기행을 저지르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까지 들으며 모두가 자신을 떠난다는 절망감이 고흐의 우울증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있다.
 
고흐는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오직 그림을 통하여 한 가닥 위안을 얻었다. 자해 이후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1889)'은 절망 속에서 화가로서 다시 일어서려는 고흐의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고흐는 다시 재기를 위하여 노력했지만 이미 손쓸 수 없이 깊어진 정신질환이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고흐는 결국 36세였던 1889년 5월 스스로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당시 동네 주민들이 고흐의 거듭된 발작으로 피해를 입으며 불안감으로 탄원서까지 제출할만큼 상황이 심각해진 상태였다.
 
고흐는 입원 후에도 불안과 발작은 계속되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고흐의 말년에 그려진 1889년 '별이 빛나는 밤'은 병실에서 동이 트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고흐의 비참했던 상황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그림체가 돋보인다. 고흐는 여기서 파란색과 노란색의 보색대비로 생생한 밤하늘을 표현해내며 후대의 극찬을 받았다.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보낸 1년반 동안 작품활동에만 몰두하며 무려 150여 점의 그림을 완성해냈다. 고흐가 다작을 쏟아낸 데는, 평생 자신을 정신적- 경제적으로 후원해준 동생 테오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는 미안함도 작용했다.

테오 역시 형에 대한 우애가 깊어서 자식의 이름을 형과 같은 빈센트로 짓기도 했다. 조카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조카가 행여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일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기념하며 남긴 작품이 '꽃피는 아몬드 나무(1890)'로 활짝핀 아몬드 나무를 통하여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90년 건강악화에 시달린 고흐는 자신을 치료한 가셰 박사가 있고 동생 테오와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오베르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고흐의 작품들은 기대와 달리 판매 소식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동생 테오마저 건강이 악화되어 경제적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고흐는 더욱 벼랑끝으로 몰린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미리 준비한 총기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당시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빗나갔고 고흐는 피를 흘린 채 일단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흐의 상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뒤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테오 앞에서 고흐는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도 실패하다니"라며 자책했다고 한다. 고흐는 그렇게 평생 자신을 지켜준 동생 테오 앞에서 끝내 숨을 거둔다. 향년 37세였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테오마저 불과 6개월 뒤에 형을 따라 하늘의 별이 됐다.
 
1890년대부터 미술계에서도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고흐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탓에 빛을 볼 기회를 생전에는 잡지 못했지만, 사후에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의 공이 컸다.
 
요한나는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고흐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고흐 사후 15년만에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회고전에서는 480점에 이르는 고흐의 유작들이 소개됐다. 요한나는 '해바라기'같은 고흐의 대표작을 더 많은 이들이 접할수 있도록 국립미술관에 판매했으며, 고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는가 하면, 떨어져 있는 형제의 묘를 같은 곳으로 이장하며 형제애를 부각시킨 '스토리텔링 마케팅'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한 요한나의 아들이자 고흐와 동명의 조카인 고흐 주니어는 1973년 삼촌의 이름을 딴 '반고흐 뮤지엄'을 개관했다.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고흐의 생전 소망은, 남겨진 가족들의 노력으로 사후에 뒤늦게나마 이룰 수 있었다.
 
고흐는 10여년에 불과한 화가경력과 짧았던 수명에도 그림에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다 바치며 오늘날에는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불멸의 화가로 남을 수 있었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격언은 고흐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림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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