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포스터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포스터 ⓒ ㈜더쿱디스트리뷰션

 
한 편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방학시즌 중에 개봉한다. 제목은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썩 와닿지 않는 아동용 만화영화 티 풀풀 나는 작명센스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런 영화도 개봉했었나 하고 스치듯 지나치게 될 그냥저냥 양산 형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될 지점이 아주 많은 작업이다. 간절히 응원하고 싶어질 만큼 말이다.
 
해당 작품은 근 반세기 만에 극장에서 개봉하게 된 '국산'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 지금이 무슨 민족주의나 애국심 마케팅이 먹힐 시즌이냐 하고 볼멘소리 툭 튀어나올 법하다. 그런 반응이 충분히 예상되지만 굳이 강조하려는 이유는, 인정해 줄 건 인정해 주고 평가받아 마땅한 건 걸맞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요즘엔 애니메이션도 대개 컴퓨터 그래픽(CG)을 활용해 작업한다. 예전에 직접 손으로 그리거나 소품을 움직이던 방식에 비해 수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거장 신카이 마코토의 출발 역시 기술발전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테다. 게임회사에 다니면서 근무시간 외에 홀로 남아 (개인은 장만하기 불가능한) 회사 장비를 활용해 혼자 작업한 중편 애니메이션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데뷔했기 때문이다. 바로 감독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기념비적 작업인 26분 분량의 풀 3D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 이야기다.
 
하지만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은 다른 영화 장르들 못지않게 많은 품과 공이 투여된다. 일일이 1초에 24장 필요한 원화를 수작업으로 손수 그리거나, 인형과 소품을 제작하고 사람이 붙어서 동작시켜야 완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들어가야 할 시간과 비용이 만만찮다. 그런 제약을 상당부분 극복한 CG 활용 작업들 역시 제약이 한가득이다. 그런 조건 탓에 상업적으로 '가성비'를 고려해야 하는 극장 개봉용 장편에서 옛 작업방식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특히 수작업이 기본전제인 스톱모션 분야는 더욱 희귀해진 상황이다. 물론 상업성보다는 작가적 태도로 작업하는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은 계속 등장하고 있지만 대중과 만날 기회는 영화제나 온라인 상영 외엔 지극히 드물었다.
 
그런 가운데 근래 들어 2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품을 반갑게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은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거장 길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한 <피노키오>다. 그리고 다른 한편이 바로 이번에 소개하려는 박재범 감독의 <엄마의 땅>이다. 두 작품은 대략 100배쯤 규모에 차이가 난다. 제작사가 공개한 델 토로 판 <피노키오> 제작비는 대충 3천만 달러다(이것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치고는 많지 않은 예산이긴 하다). <엄마의 땅>을 작업하는 데에 쓰인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예산이 대충 3억 원쯤 된다 하니 실제로 비교가 민망한 규모 차이다. 그렇게 체급도 차이가 팍팍 나고 다루는 소재도 다르지만 두 작품은 세상의 마이너리티들을 응시하는 따스한 시선과 작가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몽실몽실 다가오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다. 신기한 동질성이다.
 
45년 만에 돌아온 국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위업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 ㈜더쿱디스트리뷰션

 
본 작품을 연출한 박재범 감독의 세상에 알려진 작품들을 의도한 건 아닌데 지금까지 전부 다 봤다. 감독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던 초기작들부터 어느새 이름을 보고 볼 영화 넘치는 영화제에서 선택하게 된 현재까지 감독의 이름값은 일관된 색채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감독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2015년, <더미 : 노 웨이 아웃>이라는 7분여 단편이었다.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용되느라 파괴되어 가던 마네킹이 짝을 데리고 시험장을 탈출하는 여정을 뭉클하게 다룬 작업이다. 그때만 해도 감독 이름은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의 이름을 처음 기억하게 된 건 2017년 선보인 8분 분량의 <빅 피쉬>다. 폭풍우 속에서 어린 딸을 삼킨 바다괴물을 찾아가는 엄마 (성경의 해당인물을 떠올릴 법한) '요나'의 이야기는 4.16의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의 은유로 적지 않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후속 작품으로 2019년, 22분으로 대폭 늘어난 분량의 <스네일 맨>을 선보인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중동 사막을 배경으로 어린 손자 '아람'과 함께 할아버지 '롯'이 죽은 아들(이자 아빠) '모압'을 찾아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다. 전작에 이어 실제 중동의 현실과 성서에서 따온 이름의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룬다. 전작들이 특별한 대사에 의지하지 않고 이미지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면 <스네일 맨>은 현실 역사를 기반에 두고 보다 확장되고 보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취한다. 그런 변화에 기존의 스톱모션 기법과 로드무비 요소를 유지한다. 이 감독은 일관된 기준과 세계관이 있구나 하고 주목하게 된 시점이다. 그런 신뢰 속에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장편영화 데뷔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 사이에 2020년, 코로나19 관련 영화인 지원대책 일환으로 작업한 <지혜로운 방구석 생활>이 추가로 존재한다)
 
<엄마의 땅>은 감독의 전작 <스네일 맨>은 물론 전전작인 <빅 피쉬>에서부터 연결되는 정서와 주제의식을 담아낸다. 하지만 장편의 규모는 기존의 감성과 이미지 위주로도 족했던 단편에 비해 확장된 서사와 문법을 요구한다. 단편에서 두각을 보였던 적잖은 감독들이 그 허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봐온 터라 하필 국산 애니메이션 지형 안에서도 마이너리티가 된 지 오래인 스톱모션 장르로 과연 그 벽을 넘어설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기대와 염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엄마의 땅>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극지방 툰드라에서 펼쳐지는 엄마를 구하기 위한 모험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 ㈜더쿱디스트리뷰션

 
쉽지 않은 도전이 각고의 노력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순간은 항상 짜릿한 쾌감과 뭉클한 뒷맛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 영화를 볼 때가 딱 그랬다. 고생 참 많이 했을 거라는 단상이 절로 들 지경이다. <엄마의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시나 전체관람가에 아직은 유명한 원작이나 별도의 화제성 요소를 갖추지 못한 극장용 오리지널 애니메이션들이 받는 제약들을 고려해 그리 복잡하지 않은 아동 모험물의 외피를 쓰고 있다. 북극에 면한 영구동토의 툰드라 지방이 배경이다. 작은 마을에서 부모님과 어린 동생과 함께 사는 순록 유목민 소녀 그리샤는 근심에 차 있다. 엄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위독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샤먼 할머니에게 들은 바대로 엄마의 병환을 고칠 수 있다는 영약을 얻기 위해 그리샤는 전설 속의 존재인 붉은 곰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하지만 아빠는 소녀의 무모한 도전을 만류하며 도시로 백인들의 약을 구하러 떠난다. 그런데 중병에 신음하는 엄마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리샤는 아빠의 말처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 시베리아 원주민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인 동시에 친구와 같은 반려순록 세메데토와 함께 붉은 곰이 지키는 치유의 영약을 찾아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위험천만한 여정을 출발한 썰매에는 철부지 남동생 꼴랴도 몰래 숨어든 상황이다. 오직 밤하늘의 북극성이 가리키는 방향을 길잡이로 삼아 어린 남매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이어간다.
 
하지만 붉은 곰을 찾는 일행은 이들 남매뿐만이 아니다. 러시아 군인 블라디미르와 원주민 사냥꾼 바자크도 붉은 곰을 찾아 나선다. 이들은 무한궤도 설상차를 타고 원주민이 영물로 여기는 붉은 곰을 사냥할 참이다. 그렇게 두 일행의 목적은 정반대로 다르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결기와 집요하다는 점은 동급이다. 두 일행은 마침내 전설 속 붉은 곰과 대면하기에 이른다.
 
감독은 어릴 적에 봤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최후의 툰드라" 속에 등장하는 원주민 네네츠 족의 삶이 유독 유년시절 기억 중에도 깊숙하게 각인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이 종종 빠져드는 '고귀한 야만'을 향한 매혹인 셈이다. 전작인 <스네일 맨>에선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를 모티브로 전란이 끊이지 않는 중동 사막에서 죽은 아들이자 아빠를 찾아 헤매던 노인과 손자의 여정을 담았던 감독은, 후속 작품인 <엄마의 땅>에서는 광활한 북극권을 배경으로 문명과 자연, 탐욕과 믿음이 부딪히는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
 
시베리아 정복 역사를 환기하는 영화의 행간
 
감독의 주제의식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아 정복 역사를 소환해야만 한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이나 보는 거라 했나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그만큼 <엄마의 땅>이 풀어내는 이 알려지지 않은 극지방의 역사는 꽤나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시베리아 원주민은 근 천년에 걸쳐 러시아 세력의 개척(보다는 정복에 가깝지만)에 직면해 왔다. 러시아의 고문헌인 "원초연대기"가 작성된 서기 1153년부터 해당지역과 민족에 대한 서술이 존재하니 실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사변이다. 하지만 험난한 불모의 대지는 역설적으로 오랫동안 제국의 침입을 저지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욕망은 그 모든 제약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된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영토적으로 시베리아 정복이 완료된다. 여전히 개척할 구석이 가득하지만 너무나 척박한 환경 덕에 자유를 누리던 시베리아 원주민은 자신들이 초대한 적 없는 거대한 제국에 종속되고만 것이다.
 
영화 속 원주민 가족 내에서도 시류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어른 톡챠와 아직 순수함에 기운 그리샤가 아내이자 엄마 슈라를 구하려는 해법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인간의 이성과 기술의 결정인 약품을 구하려는 합리성과, 샤먼이 전승해 온 전설 속 영약을 찾아 나선 믿음이 충돌하는 대목은 원주민들의 삶이 놓인 주전장의 압축과도 같다. 여기에 척박한 극지방 환경에서 만물을 존중하고 협동하는 법을 배우며 이어가려는 네네츠 부족의 전통적 가치와 자연을 정복하고 개발해 인간들의 번영을 꾀하는 제국의 방향성이 격돌한다.
 
영화 속에서 전통적 악역 포지션을 담당하는 블라디미르와 바자크의 캐릭터는 흔히 상정되는 천편일률적 '빌런'과는 거리가 멀다.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정복역사를 상징하는 블라디미르는 여전히 샤머니즘에 얽매인 원주민들의 미몽을 깨부수기 위해 붉은 곰이 전설이 아닌 야수에 불과한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의 표독스러운 집요함은 나름대로의 신념과 임무 수행을 향한 것인 셈이다. 그를 돕는 바자크는 그리샤 이전에 소녀가 품었을 소망을 공유하는 존재다. 하지만 과거의 바자크는 그리샤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묘사된다. 간절한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기에 바자크는 좌절과 불신에 망가져 부족의 전통을 거부하고 증오한다. 둘은 원주민의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신앙과 가치를 파괴하려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 그 완성은 붉은 곰의 척살이다.
 
그런 집념에 가득 찬 둘이 끌고 온 설상차는 탱크나 불도저의 이미지 그 자체로 모든 전통적 가치와 소박한 믿음을 무자비하게 돌파해 버린다. 영화 속에서 설상차의 파괴적 위력은 그만큼 압도적이다. 그에 대응하는 그리샤의 썰매는 미미하기 짝이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 도저히 물리력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다. 초자연적 존재인 붉은 곰이라도 이들의 설상차를 물리치기란 불가능하다. 영화는 <아바타> 시리즈가 데우스 마키나 격으로 막판에 풀어내는 액션영화적인 복수와 쾌감에 기대지 않는 현실성을 택한다. 대신에 지금 현재도 묵묵히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전통을 간직하려는 원주민들의 지혜와 인내를 닮으려는 방향을 고수한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지켜주고 지지하고픈 작품의 가치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스틸 이미지 ⓒ ㈜더쿱디스트리뷰션

 
비록 규격 상으로는 <엄마의 땅>이 다른 개봉용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과 동일한 틀을 택했지만, 이렇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품은 정보량과 함의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풀어내듯 일일이 해설을 붙이지는 않는다. 대신에 주인공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전통을 가능한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하려 전심전력을 쏟아낸다. 이를 위해 환상성 강조에 극대화된 방식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을 택한 셈이다. 그 구현을 위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공들인 정교한 인형과 배경장치들은 따스하고도 정교하게 북극의 풍경을 실사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질감으로 재현한다. 영화 속에서 보는 이들을 매혹시킬 마법적인 황홀경은 그런 수고를 전제한 것이다.
 
그 놀라운 황홀경과 함께 독립영화계를 넘어 상업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확장 중인 강길우, 김예은 배우가 목소리 연기로 힘을 보탠다. 여기저기에서 '씬-스틸러' 노릇을 톡톡하게 해내는 두 배우의 연기영역 도전 또한 주목할 지점일 테다. 그저 유명세에 편승해 대충 한다는 악평을 듣기도 하는 기성 연예인 참여와는 차원이 다른 목소리 연기가 착착 귓가에 감싸고 들어온다(강길우 배우는 전작 <스네일 맨>에도 목소리 출연한 바 있다).
 
<엄마의 땅>에서 감독과 제작진이 전하고픈 소박한 진심과 함께 이에 호응하는 출연진들의 공감은 지구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서서히 사라져 가는 환상 세계를 진하게 전한다. 이 작품이 전달하고픈 진정성에 동의하는 이들이라면 현재진행형인 시베리아 난개발과 자유롭게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게 된 원주민들의 권리문제에 관심 한 스푼쯤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한 귀결일 테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작품정보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Mother Land
2022|한국|애니메이션
2023.01.25. 개봉|69분|전체관람가
감독 박재범
출연 이윤지(그리샤 역), 김서영(꼴랴 역), 이용녀(붉은 곰 / 샤먼 할머니 역),
김예은(슈라 역), 강길우(톡챠 역), 이관목(블라디미르 역), 송철호(바자크 역)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배급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영화진흥위원회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공식초청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특별언급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박재범 감독 이윤지 김예은 강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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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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