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6

나의 첫번째 '슬램덩크', 30년 만에 코끝이 찡해졌다

[리뷰]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완벽한 '퍼스트' 극장판

23.01.16 10:01최종 업데이트 23.01.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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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 에스엠지홀딩스(주)


1990년대는 그동안 억눌렸던 변화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문화가 태동하던 시기였다. 댄스뮤직과 랩으로 대표되는 서태지와 아이들(가요)이 등장했고 <쉬리>(영화)의 성공은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기폭제가 됐다. PC통신(컴퓨터) 상용화는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밑그림을 제시했으며 스타크래프트(게임) 열풍은 PC방의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왔다. 그리고 <슬램덩크>(만화)는 NBA, 농구대잔치,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함께 당시 10, 20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농구 붐을 일으켰다. 오죽하면 예쁜 여자 친구와 빨간 차를 갖기보단 덩크슛 한 번 하는 게 소원이라는 가사의 노래 <덩크슛>까지 나왔을까.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일본의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한 만화 <슬램덩크>는 <드래곤 볼> <유유백서>와 함께 일본 만화 주간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현재까지 일본 누계 단행본 발행 부수는 1억 7천만 부에 달하고 TV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재탄생하며 연재된 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판본으로 출간되어 1500만 부 이상의 누적 판매고를 올렸으며 "포기를 모르는 남자", "왼손은 거들뿐" 등 명대사와 명장면이 각종 패러디와 밈의 형태로 회자하는 중이다. 21세기에도 <슬램덩크>의 문화적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작가는 의도한 대로 결말을 냈을지언정 독자 입장에서 보면 <슬램덩크>는 '미완결'의 작품이다. 대다수 만화가 연재를 무리하게 이어가다 원래의 재미와 개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빈번하다. 이와 달리 <슬램덩크>는 느닷없이 끝났다. 당시 <슬램덩크> 마지막 화엔 '1부 완결'이라 적혀 있어 한동안 다음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원작의 표현을 응용하자면) '후속 편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후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는 숱한 후속 편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에 폐교를 빌려 칠판에 후일담 23장을 그린 기획전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와 송태섭과 이한나가 등장하는 단편집 <피어스>(1998)를 선보여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을 뿐이다.

그런 이노우에 아케히코 작가가 26년 만에 <슬램덩크>로 돌아왔다. 무려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감독 겸 각본까지 맡았다. 그는 10년 전부터 극장판 제의를 받았지만, 파일럿 영상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 번번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4년에 접한 파일럿 영상을 보고서 자신이 참여한 첫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생각을 바꿔 먹는다.

"캐릭터들의 얼굴에 영혼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제작을 결심했다. 기술이나 영상의 수준보다 감정적인 부분이 와닿았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 에스엠지홀딩스(주)

 
3D, 2D, 로토스코핑 기법을 총망라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기술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를 연상케 할 정도로 혁신적이다. 제작진은 경기 장면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실제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원작을 재현한 모션 캡처 3D 영상을 만들어 현장감을 얻었다. 다음엔 데이터 가운데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장면을 선택하여 손으로 그린 느낌과 펜 선의 질감을 살리는 리터치 작업을 반복해 종이 위에 그린 그림처럼 느껴지는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모션 캡처로 얻은 앵글은 실제 경기를 보는 느낌을 주고 여기에 실사에서는 불가능한 앵글을 추가해 '만화 같은 실사'이면서 '실사 같은 만화'로 보이게끔 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두 가지 이야기를 축으로 펼쳐진다. 하나는 원작에서 가장 개발하지 않았던 캐릭터인 송태섭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이 <피어스>에서도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원작에서 내적 묘사가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줄곧 남았던 모양이다. 또한, 송태섭을 화자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는 건 큰 틀에선 원작을 따르되 다른 시점으로 재해석하겠다는 의미다.

이것은 작품의 현실감을 살리는 선택이기도 하다. 원작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드래곤볼>, <원피스>, <나루토>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만화 캐릭터다. 반면에 형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방황하는 송태섭은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아픔을 안고 사는 10대 소년에 가깝다. 원작과 달리 이번에는 가족에 초점을 맞춘 이유에 대해 이노우에 아케히코 감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슬램덩크>를 연재할 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고등학생의 관점에서 더 잘 그릴 수 있었고 그것밖에 몰랐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시야가 넓어졌고 그리고 싶은 범위도 넓어졌다. <슬램덩크>를 그린 이후, <베가본드>나 <리얼>을 그려온 것도 영향이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 에스엠지홀딩스(주)

 
<더 퍼스트 슬램덩크> 전개의 다른 한 축은 원작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영상화한 적이 없었던 북산고와 전국 최강 산왕공고의 인터하이 32강전이다. 영화는 송태섭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 그리고 심리 변화를 교차 편집의 형식을 통해 북산고 대 산왕공고의 경기 흐름과 조응시켜 하나의 서사로 합친다. 산왕공고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 북산고의 위기는 곧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송태섭의 마음인 셈이다. 그리고 "피하지 말고 돌파하라"는 형의 조언대로 강한 압박을 이기고 드리블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성장을 북산고 농구부의 성장으로 연결하며 우리가 처음 보는 <슬램덩크>를 완성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엔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북산고 농구부 5인방을 하나씩 소개하는 오프닝 장면을 꼽겠다. 일본의 인기 록 밴드 'The Birthday'의 노래 < Love Rocket >는 하나의 음으로 시작해서 점점 여러 가지 소리로 늘어가는 화음인 듯 불협화음인 듯한 불온한 분위기를 전한다. 여기에 맞춰 연필 스케치로 송태섭, 정대만, 채치수, 서태웅, 강백호가 차례로 완성되며 걸어오는 장면은 친구를 오랜만에 재회한 느낌을 주고 청춘의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서 코끝도 찡했다. 아마 1990년대에 만화 <슬램덩크> 또는 애니메이션 <슬램덩크>를 즐겼던 '슬램덩크 세대'라면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뛰어넘은 놀라운 체험이자 소중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참여한 첫 번째(first)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을 보았던 팬들이 애니메이션으로 가장 만나고 싶었던 북산고 대 산왕공고 경기를 처음(first)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서사 구조로 펼쳐서 처음(first) 보는 <슬램덩크>를 만들었다. 많은 이의 내 인생의 첫 번째(first) 만화가 완벽한 첫 번째(first)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시절 <슬램덩크>를 처음(first) 보았던 때로 돌아가 작품이 던진 첫(first) 질문이자 전체를 관통했던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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