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 tvN STORY, ENA

 
엊저녁엔 참 오랜만에 일찍 집에 갔어요. 식사를 하며 TV를 틀었는데, 샘 해밍턴씨, 당신이 화면에 나오더군요. 웃통을 시원하게 벗어던지고 우람한 뱃살을 출렁이면서요. 대충 누군지 알 만한 남자들이 나와 씨름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단 한 명의 제왕을 가려내기 위한 예선전이었나 봐요. 스무 명 중 4명이 탈락하는 방식이라 하더군요.

당신은 캐나다 출신의 연예인이자 격투 선수 데니스 강의 동생으로도 유명한 줄리엔 강과 맞붙었어요. 오 그 선수, 키가 195cm에 몸무게가 100kg이라더군요. 게다가 군살 없이 온통 거대하고 탄탄한 그 근육 덩어리의 몸매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 들기에 충분했어요. 방송 중 누군가가 '피지컬(physical) 깡패'라고까지 하더군요.

게다가 그는 앞선 두 판에서 모두 졌다고 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지면 탈락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지요. 그 좋은 몸 가지고 결선도 못 가면 무슨 망신이겠어요. 그의 두 눈이 승부욕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당신은 그런 그를 보며 '(내가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장난스레 항의하기도 했죠.

이윽고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당신은 그만 첫 판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무섭게 몰아붙이는 줄리엔 강이 마지막에 밀어치기로 마무리한 겁니다. 참 아쉬웠지만 이상한 결과는 아니었죠. 그는 충분히 강했으니까요. 두 번째 판, 줄리엔 강은 또 거칠게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영리하게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배지기로 그를 넘겨버렸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밥풀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죠. 월드컵 때 한국과 포루투갈 전의 마지막 순간과도 같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거 있잖아요. 약자들을 응원하는, 언더 독의 반란을 내심 기대하는 그런 심정 말이죠. 어쩌면 출중한 실력에 유독 당신에게 승부욕을 드러내는 줄리엔이 얄미웠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 판 후에 당신 인터뷰가 나왔어요. 당신은 "동네 아저씨가 나와서 (줄리엔을) 넘어뜨리는 것 자체가 씨름의 매력"이라고 했어요. 자기가 잘 해서 이겼다는 걸 강조하기보다 약자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씨름의 의외성을 강조한 겁니다. 당신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었어요. 평소엔 그저 당신의 한국말처럼 약간은 어리숙한 캐릭터의 예능인인 줄만 알았거든요.

매력덩어리 '동네 아저씨'
 
 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 tvN STORY, ENA

 
당신이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유격훈련 받을 때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나요. 로프 타고 웅덩이 건너다가 어이없이 물에 빠진 후 일어서는데 흔들거리던 밧줄이 당신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던 장면처럼 말이죠. 아들들하고 TV에 나와 가끔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거나 괜한 승부욕을 보이는 장면 등이 당신의 전부인 줄 알았던 거죠.

아, 그런데 당신에겐 의외의 매력과 미덕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특히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한 대목이 참 좋았어요. 인터넷을 뒤져보니 당신은 올해 마흔다섯이더군요. 뭐 그 정도면 아저씨긴 하지요. 풍만(?)한 몸매도 분명 아저씨의 그것이었구요. 그래요, 당신은 우리들 아저씨들의 대표로 경기에 임했던 겁니다.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눈치제로의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그 꼰대들 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 순간 전국의 우리 꼰대 아저씨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우리도 줄리엔 강 같은 '멋짐이 작렬하는 젊은 선수'들을 당장이라도 자빠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저씨들의 대표로, 명예대사로 임명받을 자격이 차고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저도 밥 먹다 말고 당신의 이름을 연호했지요. 물론 속으로만요.

그러나 더 이상의 이변은 없었고, 마지막 판에서 다시 한 판을 내줘 줄리엔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쉬웠지만 경기 결과가 뭐 중요할까요.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한 건데. 게다가 당신은 또 아쉽지 않다며, 줄리엔을 한 번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며 의연함까지 보여주었어요. 그건 우리 아저씨들이나 할 수 있는 멘트였습니다.
 
 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tvN STORY, ENA <씨름의 제왕>의 한 장면. ⓒ tvN STORY, ENA

 
그 후 당신은 씨름판의 헤라클래스라는 황충원,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뱃살 대신 복근이 생겼다는 김환 선수에게 잇달아 패하며 결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매 판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야말로 '졌잘싸'였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근성을 보여주었어요. 특히 김환 선수와의 마지막 판은 줄리엔 강을 이길 때보다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첫 판을 내주고 둘째 판을 가져왔습니다. 다섯 살이나 어리고 키는 5cm 이상 큰 김환을 모래판 밖으로 내동댕이친 거죠. 그리고 마지막 판. 오른쪽 방향으로 빙빙 돌던 김환은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배지기로 당신을 들어 넘겼습니다. 당신은 끝까지 샅바를 놓지 않았죠. 이미 등이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도 당신은 샅바를 꽉 잡고 김환을 뒤집어 넘기려 했습니다.

당신 말대로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는' 그 절박하고도 강력한 의지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걸 보며 저는 울컥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끝까지 포기 못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건 바로 당신의 아들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신을 지켜볼 당신의 아들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나요.

당신은 당신 말대로 결코 쉬운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자랑스런 아저씨들의 상징이자 당당한 두 아들의 아빠입니다. 아, 그런데 당신의 마지막 그 한마디는 하지 말았어야, 살짝 편집해 줄리엔 강을 넘어뜨리는 장면만 아들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다 보여 줘도 됩니다. 당신의 똘똘한 아들들은 그걸 더 자랑스럽게 생각할 테니까요.

모처럼 우리들의 기를 펴게 해 준 당신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2022년 12월 7일
인천 사는 늙은 아저씨로부터
 
※ 추신 : 아, 이건 고백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사실 저는 당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습니다. 내 나이를 알면 친구나 되는 척했던 게 기분 나빠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연금 받으려면 아직 몇 년 더 남았습니다. 그냥 아저씨라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샘 해밍턴 씨름 제왕 줄리언강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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