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6 07:08최종 업데이트 22.12.06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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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스포츠 선수들에게 병역은 특히 큰 고민거리다. 선수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도 있는 20대의 나이에 겪게 되는 2년 안팎의 공백은 기술적 정체나 퇴보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도태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의무 이행 과정에는 대중적인 관심이 집중되며, 잘못된 선택으로 팬들의 신망을 잃은 선수들도 적지 않았다.

1950년대, 군인팀의 전성시대

프로야구가 창설되기 전까지 야구선수들이 병역을 이행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군에 입대해서 야구를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후인 1953년에 육군이 야구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 해군, 공군, 해병대가 각각 야구팀을 창설해 입대 적령기를 맞은 야구선수들을 대부분 흡수했기 때문이다.

육군은 해방 직후 고교야구의 1세대 스타플레이어 트로이카인 장태영, 김양중, 박현식을 영입해 국가대표팀과 다름없는 최강의 선수진을 구축했고 용산 국방부 영내에 천연잔디가 깔린 야구장을 건설해 전용구장으로 사용하는 호화로운 훈련 여건을 제공했다. 특히 '3총사'를 비롯한 선수단 핵심 전력들은 장교나 부사관으로 특별임관시켜 장기복무시키며 안정적인 생활 여건을 제공했기 때문에 1950년대 내내 육군야구부를 이길 수 있는 야구팀은 나타나기 어려웠다. 
 

육군 야구부 4총사 육군은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장교와 부사관으로 특별임관시켜 장기복무시키며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제공해 1950년대 최강의 야구팀으로 군림했다. 왼쪽부터 김정환, 박현식, 장태영, 김양중. ⓒ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육군야구부는 1960년 4.19 이후에 해체되기도 했지만 1961년 5.16 직후 박정희 의장의 특별 지시에 의해 곧바로 부활했고 1978년 경리단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꾸준히 실업리그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그 외에 1953년 4월에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에서 열린 '서울 수복기념 3군 친선야구대회'를 계기로 1954년에 창설된 공군과 해군, 1956년에 창설된 해병대 야구부 역시 우수한 군 입대 선수들을 끌어들여 육군야구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한국 야구를 이끌어갔다. 각 군의 야구팀들은 합병과 이관, 재편 등을 거친 끝에 1984년 국군체육부대 '상무'의 야구부로 통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납치, 혹은 체포... 거칠었던 스카우트

실업 야구팀의 수가 적고 훈련에 전념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군 야구팀은 가장 많은 야구선수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훈련에 투자하는 야구팀이었다. 따라서 전력이 강했고, 각 군의 라이벌 의식이 반영되어 스카우트를 비롯한 운영과정과 경기 진행도 치열했다. 그래서 군 입대 적령기를 맞은 야구선수를 경쟁적으로 납치하거나 나름의 혜택들을 제시하며 영입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의무복무기간이 각각 다르고 생활 여건도 조금씩 달랐다는 점은 각 군이 선수들을 유혹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해군과 공군은 외출과 외박의 기회가 더 자주 주어진 것을 비롯해 일과 시간 이후의 자유가 보장되는 등 생활 여건이 나은 편이었고 매달 지원에 의해 입대하기 때문에 대학야구나 실업야구의 시즌에 맞추어 입대와 제대 날짜를 맞추기 편한 이점이 있었다. 반면 육군과 해병대는 복무 기간이 시기에 따라 적게는 3개월부터 많게는 6개월까지 짧았다.

그런 차이 때문에 생긴 문제들도 종종 있었다. 1973년에는 해병대 야구부가 해체되어 공군으로 이관되면서 선수들의 복무 기간이 갑자기 6개월씩 늘어나게 됐는데, 마침 전역을 2개월 앞두고 있던 국가대표 포수 우용득은 야구부를 탈퇴하고 야전의 해병 부대로 옮겨 복무를 마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명단을 넘겨받은 공군 수뇌부에 의해 깔끔하게 무시당한 채 8개월이 지난 뒤에야 군문을 나설 수 있었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출신 대통령의 비호 아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육군은 종종 '납치'라는 방식으로 우수한 선수들을 스카웃하곤 했다. 1948년 청룡기 고교야구 우승의 주역인 김양중이 공군에 입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육군 민사사령부 헌병이 체포한 뒤 육군훈련소에 집어 넣어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 이후에도 1977년에는 상업은행의 김일권이 역시 갑자기 육군 지프차에 실려 논산훈련소로 직행했고, 1979년에는 장효조가 역시 공군 선발시험에 응시했다는 소식을 들은 육군에 납치되어 '신병훈련을 면제해주겠다'는 회유를 받은 뒤 야구부 훈련에 합류했다.

1979년에는 2년 전 한국화장품에서 전무후무한 공격부문 전관왕에 오르며 신인왕과 MVP를 휩쓴 김재박이 요추분리증상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육군이 역시 지프차로 납치해 육군통합병원에 입원시킨 뒤 정밀검사를 거쳐 현역복무판정을 받게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을 나선 김재박은 곧장 공군으로 입대해 그 해 실업리그 2,3차 리그에서 공군(성무)를 우승으로 이끌며 육군(경리단)에 복수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 군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야구선수들은 대개 선택권을 가진 입장이었고, 어차피 감당해야 할 병역 의무를 수행하면서 야구선수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빠른 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구력 불안 때문에 실적을 내지 못했던 연세대 투수 박철순이 자퇴서를 던지고 입대한 성무에서 고교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 남우식을 후임병으로 만나 전담지도를 받은 끝에 최고의 투수로 올라선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김재박의 복수 병역 면제 판정을 받은 김재박은 육군에 납치돼 통합병원에서 다시 정밀검진을 받은 끝에 현역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김재박은 공군(성무)에 입대해 육군(경리단) 격파의 선봉에 나섬으로써 나름의 복수에 성공했다. ⓒ 경향신문

 
병역특례의 시대

하지만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엘리트 스포츠를 육성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이 발표되면서 야구 선수들에게도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1981년 11월 7일 <병역의무의 특례 규제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3위 이내로 입상하면 보충역에 편입하고 5년간 현업에서 활동하면 그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면제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인 1982년 12월 11일에는 프로선수로서의 활동도 '현업 활동'의 범위 안에 포함하도록 규정을 확대하고, 시행령 개정 이전까지 소급적용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최동원, 선동열, 박노준, 한대화 등이 병역 고민을 덜었고 1980년 도쿄에서 열린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했던 이만수, 김용남, 박용성 등까지 소급적용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 무대로 진출한 선수들에게 병역문제는 한층 곤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는 국제대회가 없었고, 1984년에 상무로 통합된 국군체육부대에서도 프로선수들에게는 입대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방부장관 출신인 서종철 KBO 총재의 강력한 요구와 그의 부관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의 적극적인 화답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방위병으로 복무할 경우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해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배려가 있긴 했다. OB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으로부터 시작해 이종범과 양준혁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선수들이 각자 소속 구단을 응원하는 향토사단 지휘관과 간부들의 전폭적인 협조와 지지 속에서 위수지역 내에서 벌어지는 홈경기만이라도 출전하는 생활을 이어가며 군 복무를 마쳤고 별다른 공백 없이 전역 후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역병으로 입대한 선수들의 경우에는 그마저 해당되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14승을 기록하며 탈삼진왕에 오른 롯데의 첫 에이스 노상수와 그 해 OB의 3루수로서 우승에 기여한 3루수 양세종 같은 이들이 33개월간의 현역 군복무를 마친 뒤 선수 경력의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은 그런 고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나마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인 1995년 국방부가 방위병 신분으로 프로선수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군인은 영리활동을 하거나 겸직할 수 없다'는 복무규율에 저촉된다는 점을 지적했고, 논란 끝에 이듬해인 1996년부터 전면 금지되는 일도 있었다.

드림팀, 상무, 그리고 현역

숨통이 트인 것은 1998년이었다. 그 해 겨울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부터 프로선수들의 출전이 허용되었고 상무에서도 프로선수들의 입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해 아시안게임에는 미국에서 뛰던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을 비롯해 김동주, 박재홍, 조인성 등 병역미필 프로선수들이 대거 출전해 결승전에서 일본을 7회 콜드게임으로 누른 것을 비롯해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금메달을 따내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고, 한화의 임수민이 프로 출신 최초의 상무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후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 해결 방법은 세 가지 경로로 나뉘게 됐다. 첫째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국제대회에서 특례 수혜의 자격을 갖추는 것, 둘째는 상무나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운영된 경찰청 야구팀에서 야구 활동을 하며 복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현역(혹은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해서 복무하는 것이다.
 

예비역 병장의 '분유포' 군기 세기로 유명한 수도방위사령부 제 1경비단에서 군복무를 마친 기아의 유격수 박찬호는 빠른 발과 역동적인 수비 외에도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여를 하고 있다. 2022년 6월 8일 LG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뒤 사흘 전 태어난 첫 딸을 향한 '젖병 세리머니'를 선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그리고 최근에는 현역병으로 복무하고도 무사히 복귀하는 사례들도 점점 늘고 있다. 현역복무기간이 줄어들면서 입영 시기만 적절히 조절하면 1시즌 정도만 거르고 복귀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복무 중에도 개인 시간이 보장되고 운동 시설 확충돼 기초체력을 보강하고 간단한 기능 훈련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절대 다수는 소총을 든다

세 가지 길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국제대회 입상을 통해 병역 특례를 노릴 수 있는 것은 각 포지션에서 국내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선수들 뿐이고 상무 입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대부분 프로팀 1군에 포함되어 있거나 언제든지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선수들이다.

따라서 프로팀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건강한 신체를 가졌지만 이미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프로에서 통할 만큼의 탁월함을 가진 천재는 아닌, 그래서 하루하루 가능성을 보여주어 프로선수로서의 기회를 이어가며 성장해야 하는 20대 초중반의 선수들 대부분은 현역으로 입대해 배트 대신 소총을 들고 그라운드 대신 연병장과 능선을 달리며 18개월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들에게 그 18개월은 FA 기회를 2년 늦추거나 전성기의 연봉 몇 억을 손해 보는 문제가 아니라, 주전의 기회에서 한 발 멀어지는 동시에 방출의 위협에 한 걸음 다가서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앞에서 무작정 미루거나 혹은 회피하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로구단들의 노력이 핵심 선수들의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조력이나 상무와 사회복무요원 입대를 위한 시기 조절에만 쏠려서는 곤란하다. 현역으로 입대해야 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조바심을 이해하고, 그것을 덜어주기 위해 선수의 입장에서 입대 시기를 조언하고 군 생활 중의 준비를 위한 지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각자 '병장' 혹은 '해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라운드를 누빈 권오준, 최향남, 권용관, 윤요섭 등이 있었고, 지금도 롯데의 정현, 한화의 김태연, 기아의 박찬호 같은 예비역 병장들이 역시 현역 복무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장한 활약을 야구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각자 마운드와 타석에서 거둔 성적 외에도 입대 영장을 받아든 많은 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증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훈의 박격포 스윙 81mm 박격포병으로 복무했던 롯데 정훈의 여전히 생생한 허리 힘을 바탕으로 호쾌한 스윙을 하기로 유명하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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