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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개인으로는 모두 똑똑하고 우수하지만 뭉치지 못하는 게 탈이다.'

오랫동안 자조섞인 목소리로 스스로를 폄하하며 민족성까지 들먹여 왔던 터다. 일제가 만들어놓은 통치 프레임이라며 반발하는 흐름들이 존재했지만, 분단에 길들여진 탓인지 가르고, 갈라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겨온 듯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같은 인식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민족의 '못난이 자화상'이 상당부분 허구였음을 보여준 사건은 1992년 LA폭동이 발생했을 때였다. 남녀 노소 자경단을 조직해 지역 한인업소들과 거주지를 지키겠다고 나섰고, 한인회와 한인 매체들도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이를 적극 돕고 나선 일은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이번에는 플로리다 한인사회가 허리케인 '이언'으로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자 미주 전역의 한인회들이 그야말로 '들고' 일어섰다. 모금액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든 한인회장의 서툰 '카톡질'로 시작한 모금운동은 많은 동포사회 지도자들을 불러냈고, '뭉치면 산다'는 오랜 경구를 소환해 냈다.

지난 9월 28일 플로리다에 상륙한 4등급 허리케인 이언은 수려한 해변 풍광과 자연환경으로 미국 최고의 은퇴지로 꼽히는 플로리다 남서부(한반도 전라 남북도 위치)를 휩쓸었다. 풍속 131마일~155마일(210km~249km)에 이르는 이언은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때마침 밀려온 해일로 수천 채의 주택이 파괴되었고, 30여 가구의 한인들도 적게는 수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십 만 달러에 이르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초대형 허리케인 이언이 휩쓸고 지나간 지 3주 후 한 한인가족이 거주하는 플로리다 남서부 네이플스 동네 모습
 초대형 허리케인 이언이 휩쓸고 지나간 지 3주 후 한 한인가족이 거주하는 플로리다 남서부 네이플스 동네 모습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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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플로리다 지역(올랜도, 한국의 서울 위치) 한인들은 1등급(풍속 74마일~95마일)으로 약해진 허리케인 탓에 그다지 피해가 크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속속 들어오는 남서부 피해 소식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초순 허리케인 이언은 사상 초유의 사망자와 피해를 남기고 플로리다 반도를 빠져나갔다. 인명 피해 119명 가운데 플로리다에서만 109명이 사망했다. 재산 피해도 750억 달러(1천조 원 이상)에 이른다. 1990년 이후 플로리다에 가장 큰 상처를 입혔다는 허리케인 앤드류가 44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5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힌 것에 견주면 역대급 피해라고 할 수 있다.

수일 만에 3만 달러 모금… "뭉치면 뭐든 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발빠른 움직임을 보인 사람은 플로리다 한인회연합회를 이끄는 박석임 회장(83세)이다. 숨을 돌린 박 회장은 미주 전체 한인회연합회인 미주한인회총연합회(공동회장 국승구·김병직, 이하 미주총연)에 도움을 청했고, 미주총연 사무처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미주총연 박경덕 사무총장은 총연 카톡방에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의 에스오에스(SOS)를 올리고 즉시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이후로 모금운동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먼저 박 사무총장이 300달러 기부금을 내놓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300달러씩 기부해 2만 3450달러가 모금되었다.

이후로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가 2900달러, 민주평통마이애미협회도 900달러를 보탰고, 피해지역인 남서부플로리다한인회도 5670달러를 자체 모금해, 총 금액은 3만여 달러에 이르렀다. 모금 시작 열흘이 채 되지 않아 80여 명이 참여한 결과다.
 
83세 한인 할머니(Unchung)가 홀로 살던 2층 가옥. 허리케인 강풍과 해일에 휩쓸려 처참하게 아래층 거실이 무너졌다.
 83세 한인 할머니(Unchung)가 홀로 살던 2층 가옥. 허리케인 강풍과 해일에 휩쓸려 처참하게 아래층 거실이 무너졌다.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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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도움을 호소한 박석임 플로리다연합회장은 예상치 못한 호응을 보고는 "그동안 자리다툼이나 하는 줄로만 여겼던 한인 사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라고 했다.

"꿈도 꾸지 못한 일입니다. 글쎄 머리 터지게 싸움만 하는 줄로 여겨왔죠. 이번 일을 보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실제 위기가 닥치니 너도나도 한마음이 되는 걸 보고 감격했습니다. 뭉치면 뭐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회장은 모금에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단시간에 반응을 보인 것은 순전히 '통합' 덕분이었다고 보았다.

미 전역 150여 개 한인회의 전·현직 회장들의 집합체인 미주총연은 10여년 동안 둘, 셋으로 쪼개져 저마다 정통성을 주장하며 딴살림을 차려오던 터였다. 걸핏하면 법정싸움이 벌어진 적도 여러 차례였다. 이 때문에 재외동포재단이 매년 주최하는 세계한인회장 대회 등 정부 행사에 미주총연을 초청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미주총연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2월 하나로 통합, 현재 국승구·김병직 공동회장 체제로 새출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화합 분위기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한인사회의 위기에 발빠른 대처를 하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총연 차원 최초 모금운동, 좋은 선례 될 것"

지난 18일 관계자들과 함께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한 국승구 총연 회장은 "모금 액수로 보면 구제금 아닌 위로금 정도"라고 쑥스러워 했다. 그러면서 "개별 한인회가 아닌 총연 차원에서 다수 회원들이 참여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며 총연의 역량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모금 과정만큼이나 집행이 투명하게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허리케인 피해자 돕기 모금운동 과정에 얽힌 고무적인 선례들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30여 남서부 한인 피해 가정들 가운데 20여 가정은 '피해가 더 큰 가정들에게 양보하겠다'며 위로금을 사양해 박석임 회장을 감동시켰다.
 
미주총연 국승구 공동회장이 지난 18일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에 허리케인 모금액을 전달하고 있다. (좌측부터 미주총연 박경덕 사무총장, 국승구 공동회장,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 박석임 회장, 장익군 이사장)
 미주총연 국승구 공동회장이 지난 18일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에 허리케인 모금액을 전달하고 있다. (좌측부터 미주총연 박경덕 사무총장, 국승구 공동회장,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 박석임 회장, 장익군 이사장)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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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는 12월 3일 오후 올랜도에서 10여 개 피해 가정을 대상으로 모금액 배분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연합회는 이 과정에서 또하나의 선례를 남길 듯하다. 연방재난청(FEMA)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상봉 전 남서부 플로리다 한인회장이 제시한 '분배계산법(Money Distribution Calculations)'을 기준으로 피해자의 연령, 경제력, 피해 정도, 보험 커버 여부 등에 따라 차등 배분한다는 계획이다.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는 이에 앞서 지난 18일 탬파 스시닌자 식당에서 국승구 총연 회장으로부터 모금액 전액을 전달받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계한인언론인협회(www.okja.org) 홈페이지에도 올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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