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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의 저는 면접과 수능이라는 대입의 모든 관문을 마친 고3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고3이 모든 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공부에서 해방된 자유를 즐기기보다는 왠지 모를 헛헛함과 결과에 대한 불안함이 휩싸여 새해를 기다리곤 합니다. 작년의 저도 그랬습니다. 면접까지 마친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던 어머니는 "어디든 여행을 가보자!" 하셨습니다. 어머니 특유의 즉흥성으로 12월, 갑작스레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저는 겨울이 싫습니다. 겨울에 바다라니, 바람이 쌩쌩 부는 제주도를 이때 간다니 사실 그렇게 기대한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 비행기를 타서, 제주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에 그리 신나지도, 설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첫 식사로 계획했던 몸국 집을 찾아갔지만 그날따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급격히 침체된 제 기분을 읽으신 부모님은 즉흥적으로 절 여행에 데려오셨듯 아무데서나 일단 차에서 내려보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용연계곡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21년 12월 여행 당시 찍은 용연계곡의 모습이다. 정말로 용이 나올 것만 같은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 제주도 용연계곡 2021년 12월 여행 당시 찍은 용연계곡의 모습이다. 정말로 용이 나올 것만 같은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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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연계곡은 용의 놀이터였다는 전설에 의해 붙여지게 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푸르고 깊은, 또 바다와 계곡이 만나는 그 지점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는 일들이, 가령 계곡에 살고 있는 용과 같은 일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게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연계곡은 한 코스로 잡고 오기에는 볼 거리가 많이 없습니다. 10분-20분 보면 오래 본 것이죠. 제가 짠 계획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이곳을 오지 않았다면 기분 좋게 제주여행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SNS에서 본 언젠가 가보리라 다짐했던 카페와, 한담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감정이 가득 찬 저를 발견 했습니다. 반짝거리는 바다, 사람의 키만큼 높이 쳐 오르는 파도를 보며 자연이라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편안하고, 벅차 오르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깨닫았습니다. 바다를 걸으며 부모님과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릴 때는 매달 적어도 한 번은 부모님과 여행을 가곤 했는데 학생이 되면서 부모님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습니다. 두 분의 사진을 찍어드리는데 내가 이만큼 자라는 동안 부모님의 세월도 많이 흘러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치열한 경쟁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쉽게 오르지 않는 성적에 낙심하고 있을 때 부모님도 저와 함께 그 긴 싸움에 동참하고 계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튿날은 제가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코스인 용머리 해안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건만 그날은 만조로 인해 용머리해안 산책로로 들어갈 수도, 그 지형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계획 변경에 탁월하신 어머니가 신나게 산방산 산책로에 올라갔다 오자고 하셨습니다. 산책로에 올라가 전망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용머리 해안과 제주 마을의 조화로운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목적지 없이 차를 타고 가던 중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신 아버지는 이곳에서 일몰을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탐탁치 않아 했던 제가 무색하게도, 그 날 본 일몰은 제 짧은 인생 최고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2021년 12월, 차를 타고 달리던 중 만난 제주도의 일몰.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 제주도 일몰 2021년 12월, 차를 타고 달리던 중 만난 제주도의 일몰.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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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뜻밖의 풍경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여행을 즐기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 없는 제 고3 시절과 여행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수능 최저를 맞추기 위해 9월 모의고사까지 열심히 준비하던 저는 3일만에 자소서를 완성하여 수능 점수가 필요 없는 전형에 지원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준비했고, 꿈과 가장 가까웠던 대학에 합격하였지만 현재는 그 대학이 아닌 6차 추가합격 전화를 받은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뜻 밖의 여정에서 만난 학교와, 전공은 제게 또 다른 꿈을 꿀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제 대입의 과정을 서서히 마무리해가고 있는 고3 여러분들, 먼저 지금까지 여러분의 길에 동행해주신 주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길 바랍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앞으로도 함께 걸어 주실 그분들의 소중함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고3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치열한 학생 여러분들, 우리들의 인생에서 우리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여러분이 계획한 길을 못 가게 되더라도, 예상치 못한 점수에 낙심 되더라도 잠시 아쉬워하다 발걸음을 옮기길 바랍니다. 여행에서의 제가 예상치 못한 그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만났듯, 그 길에서 인생 최고의 만남을, 새로운 꿈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이루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의 속박을 잠시 벗어 두고 어디로든 떠나십시오! 한국의 남쪽 지방은 아직 따뜻합니다. 12년의 긴 학생 생활을 견뎌온 자신을 격려해 주는 시간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태그:#제주도, #12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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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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