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5 05:09최종 업데이트 22.11.1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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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5일 오후 1시 28분]
 

지난 10월 21일 평택역에서 SPC 파리바게뜨 평택공장 산재사망노동자를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 공공운수노조

 
소설가 김훈은 2019년 5월 19일 <한겨레> 칼럼에서 "아,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져서 부서지고 으깨진다"며 울분을 토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김용균이라는 빛> 백서 발간 기념 북 콘서트에서 "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 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한다"고 통탄했다.

올해도 가을이 깊어지는 시간 속에서 이 죽음의 숫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지난 5일에는 한국철도공사 소속 노동자가 근무 중 기관차에 치여 숨졌다. 지난 7일에는 삼성전자 협력업체 공장에서 작업하던 청년 노동자가 숨졌다.


10월 15일에는 SPC 계열 SPL 제빵 공장에서 노동자가 배합기에 끼여 사망했다. 사고 기계에는 안전 센서와 자동멈춤 장치도 없었고 2인 1조 작업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12시간 주야 맞교대로 일하면서 올해만 42일간 특별연장근로를 했다고 한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고강도 노동 속에서 안전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존엄한 노동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휴식권과 건강권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SPC 공장의 주야 맞교대, 장시간 근로 체제로 인해 노동자의 일 주기 리듬과 일-휴식의 균형은 파괴된다. 결국 건강이 위협받고 사고 위험은 켜져서 존엄한 노동의 원칙이 전면 부정당한다.

게다가 이튿날에도 회사는 사고 배합기를 흰 천으로 가려 놓은 채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고 한다. 대체 사업주에게 노동자들의 목숨이 얼마나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하였기에 양심과 공감의 결핍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소방관 10명 중 1명 우울증

이는 도덕적 비난에 그칠 일이 아니다. 이러한 행위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해야 할 사업주로서의 책무를 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동료 노동자의 사망이나 부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에게서 발생하는 외상후 스트레스(PTSD)의 위험은 매우 크다. 적절한 치료와 심리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방치될 경우 불안, 공포, 슬픔 등의 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삶이 파괴될 수 있다.

그러므로 SPC에 대해서는 인명 피해를 발생하게 한 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재해 현장 노동자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예방과 악화 방지를 위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용자는 재해 현장 노동자들에게 심리적 회복 기간을 부여하고 상담과 치료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재해 트라우마와 정신적 외상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사용자의 책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지난달 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로 현재까지 15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참사 현장에서 소방관, 경찰관, 구급대원들은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몸과 마음을 다 던져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작가 한강의 언어를 빌리자면 개개인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는 이타성과 용기에 의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공공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소방공무원과 경찰공무원의 안전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의 작업환경은 상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2021년 10월 정의당 이은주 의원의 국정감사 보도자료에 의하면, 경찰공무원의 공무상 뇌심혈관계질환 사망률이 공무원은 물론 민간부문 직업군 중에서도 가장 높다. 또한 소방공무원은 공무원 중 순직자와 공무상 질병 사망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지난 9월 16일 대구MBC 보도에 따르면 소방관 10명 중 한 명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최근 5년 사이 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병원 진료를 받은 소방공무원은 79%나 증가했고 68명의 소방관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경찰공무원도 최근 5년 사이 우울증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인원이 45% 늘었고 109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이 숫자가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소방관·경찰관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사용자로서 이행해야 할 기본 책무이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는 저서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에서 상시적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직종의 사람들이 일하다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당할 때 조직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다시 대구MBC 보도를 인용하자면 소방청이 실시한 '2016-2020년 소방공무원 마음건강 설문조사'에서 5년간 우울증과 PTSD를 호소한 소방공무원은 각각 1만 527명, 1만 744명이었다. 그러나 실제 진료로 이어진 경우는 우울증 2596명, PTSD 249명이 전부였다. 일하다 몸과 마음을 다친 소방공무원들에게 적절한 조직 차원의 지원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용자로서 정부와 공공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현장 출동 소방공무원의 PTSD 예방을 위해 소방청은 전문 심리 상담사를 긴급 파견하는 등 심리지원에 나서고 있다. 상담인력 증원 및 상담검사 진료비 예산 증액 편성계획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참사 이틀 뒤 출동했다가 폭행당하기도
 

10월 30일 오전 1시 10분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참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관들이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이와 같은 계획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미흡해서도 안 된다. 대구MBC 보도에 따르면 2021년 소방청 본예산 2208억 중 소방공무원 보건안전 지원 예산은 겨우 1.5%에 그쳤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예산이다. 향후 사각지대 없는 심리 상담 및 치료 지원이 이뤄지려면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적정인력을 확보하고 존엄한 노동시간을 편성함으로써 PTSD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심리적 회복의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 필자가 몇 해 전 수행한 콜센터 감정노동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화장실 갈 시간도 보장하지 않고 정량적 콜 목표 달성을 압박하는 테일러주의적 직무환경으로 인해 감정노동에 의한 심리 손상이 더욱 극대화된다.

이태원 참사 현장 출동 소방공무원과 경찰공무원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태원에 출동했던 소방관들은 참사 이틀 뒤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기도 전에 현장 구조를 위해 출동했다가 취객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소방공무원과 경찰공무원이 만성적 인력 부족 상황에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불규칙한 교대제 근무 형태, 초과근무와 과중한 업무부담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파도 치료를 받거나 쉬지 못해 번아웃이 만연해 있다. 인력 부족과 과노동에 시달리며 아파도 일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PTSD 증상과 우울증이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소방관과 경찰관의 존엄과 생명·안전은 이제 국가와 사회가 지켜야 한다. 상담과 치료 지원을 위한 예산과 인력을 대폭 늘리는 동시에 인력 증원을 전제로 한 교대제 개선과 쉴 권리 보장이 시급한 이유이다.
 

권혜원 / 동덕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권혜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권혜원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 영역은 노동시장 이중화 해소, 노동권과 성평등의 의제를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산업노동학회 부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남시 생활임금위원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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