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도 채널을 돌린다. 각종 프로그램에서 김헌식 문화평론가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20여 개의 방송프로그램에 고정출연을 하고 있다. SBS, KBS TV 옴부즈맨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하고 있으며, YTN 웹진 칼럼과 머니투데이, 강남라이프, 굿모닝충청 등에 사회나 정책적 관점에서 대중적 내용으로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교육인 김헌식 문화평론가. 그를 만나 고향 서산과 함께 서산 지역 역사의 중요성과 내포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학창시절, 선생님께서 '서산은 충남의 아프리카라'고 했고, '악마의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셨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유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갯벌이 많으니 다 매립해 육지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런 인식이 대호만과 천수만을 잃게 했고, 가로림만도 위험에 빠지게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서 "올해부터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없이 값진 일"이라며 "내포에 특화되어 좀 더 많은 사업이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
▲ 김헌식 문화평론가 .
ⓒ 최미향

관련사진보기

 
- 서산 출신의 몇 안 되는 문화평론가시다. 고향에 얽힌 이야기를 부탁한다.

"나는 대산읍 운산 1리 망일산 밑에서 태어났다. 운산 1리는 예전엔 산후리라고 불렸고, 금생동리에 속했다. 지사 마을이라고도 했는데 그 연원을 찾아보니 우리말로 지샛골이었다. 지새는 기와의 옛말로 즉,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대호만 물결이 넘실대는 곳이 우리마을이었다. 나는 그에 접한 운산리 3구 소재 청운초등학교 17회 졸업생이다. 교사에 '망일산 아침 햇빛 그 기상 받아 드넓은 황해 물에 가슴을 펴고~' 라는 대목은 학교의 위치를 잘 알게 해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규모 학교 통폐합 결정으로 지금은 폐교가 됐다. 주민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었던 학교가 사소한 결정 하나에 힘없이 폐교되니 안타깝다. 특히 모교를 교육 단체가 아닌 종교 기관에 팔아 버렸다. 다시 학교가 문을 열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참고로 대산중학교 3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 부모님 그리고 가족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김병준)는 젊은 시절부터 농촌 활동과 농업 진흥에 투신하신 분이다. 서산 지역에 '고추 전열 온상 재배와 멀칭재배 방법'을 확산시킨 공로로 1987년 서산시민대상 지역개발 부문 상을 받은 바 있다. 

할머니(송창례)는 낙지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하게 낙지 잡는 데 도사셨다. 대호만이 막히면서 여왕은 그냥 동네 할머니가 돼 버렸다. 낙지 잡는 비법을 전수받지 못한 게 아쉽다. 하지만 함께 갯지렁이 잡아 팔고, 냉이 캐어 팔던 그 시절 경험들은 삶의 방편을 마련하는데 소중한 경험이 됐다. 티끌조차 모으면 산이 된다는 단순하지만, 진리에 가까운 명제를 생각하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할머니다.

할아버지(김재성)는 잔소리조차 거의 없으신 조용한 분으로 짚신을 싣고 묵묵히 장작을 패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는 땔나무를 마련하기 위해 온산을 뒤져야 했다. 또 농사일에 고생 많이 하신 우리 어머니(조영희)는 대죽리 2구 출신으로 명지초등학교를 다니셨는데, 아파트에 사시는 게 꿈이셨다."
 
.
▲ 할머니(송창례)와 함께 자택에서  .
ⓒ 최미향

관련사진보기

 
- 28살 때부터 책 두 권을 내고 그 뒤에는 50여 권의 책을 썼다.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말해달라.

"문학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진로와 생계 활동에서 중요한 좌표가 됐다. 고등학교 때 환경 미화란에 2~3일에 한 번씩 만평을 게재했는데 그때 문학 선생님께서 항상 보시고 평을 해주셨다. 졸업할 즈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대학에 가거든 호프 아르바이트 이런 거 하지 말고 대학 신문에 만평을 그려라. 학교 신문사에서 원고료를 주거든. 나는 대학 신문에 문학 비평을 해서 원고료를 받았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자기 능력을 살려서 학비를 벌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게 좋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선생님 말씀이 계기가 되어 대학에 가서 만평과 함께 기자 생활을 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맥 컴퓨터를 이용할 수가 있어서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에 만평을 그려 만평 상도 받았고, 관련 만화책도 출간했다. <오마이뉴스>와 인터넷 한겨레에서 글을 쓰고 오름상과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학부 졸업 후 바로 대학원을 거쳐 박사과정을 했기 때문에 학비는 논문 공모 전이나 원고료를 통해 벌었다. 학부 대학원에서 논문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20여 개다. 박사 과정을 세 곳을 거치느라 면학 기간이 길었다. 이후에는 주로 연구원에 적을 두거나 학교 강의를 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쓴 것 같지만 하나의 공통된 주제에 일관됐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 문화평론이란 범위가 매우 넓다. 주로 하시는 작업과 연구에 대해 말씀해 달라.

행정학을 전공했다.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책학 전공 박사과정을 다닐 때까지 행정과 정책만 생각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전공을 공부하다 보니 의문이 생겼고, 특히 애초에 생각했던 정책학 전공의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이 담긴 곳이 어디일까 생각을 해봤다. 그것은 문화 현상이다.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람들이 원하는 심리는 뭘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문화 심리에 관해 책을 많이 쓰게 됐다. 무엇보다 새로운 문화 현상 속에서도 살아남고 진화하고 있는 이유 그것이 우리 한국의 전통문화 정신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징어 게임,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이 한국적인 스타일로 주목을 받은 이유일 것이다.

한류가 세계 속에서 인기를 끌수록 우리 것에 대해서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시 지역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문화콘텐츠학 박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지향점은 정책이다. 정책은 시민과 주민의 이익과 행동을 위한 민주적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 책을 읽다 보면 고향 서산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표현하고 계신다. 서산시민들과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리가 너무 모르는 사실들이 많다. 그것을 함께 공유하면서 지역의 가치를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2009년부터 내포 문화시민 네트워크 모임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

몇 년 전 서산에 있던 평신진 첨사 박윤묵(朴允默, 1771~1849) 선생이 남긴 문집에 당시 남긴 200편의 한시를 번역하게 됐다. 그동안 몇 편의 시가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서산에 관한 200여 편의 시를 남겼더라.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선생도 시를 대거 남겼다. 박윤묵 선생의 시를 번역하니 자구 해설을 포함 600쪽 정도가 됐다. 당시 서산의 풍경과 정서, 생활 풍속을 알 수 있는 한시들아다. 이런 한시를 일단 같이 공유하고, 그 시를 지은 창작 장소들을 함께 투어하고 싶다.

서산 지역은 많은 인물이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런 인물의 활동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정신적 가치와 삶의 양식을 줄 수 있다. 옛날 시대는 물론이지만, 근현대 시기에도 그랬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표지석조차 남아 있지 않다. 기억하는 민족이 미래가 밝다고 했는데 지역도 마찬가지고 서산은 말할 것도 없다. 인물과 스토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된다.

또한, 서산은 삼면이 바다로 시인 묵객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이제 산업과 만나는 새로운 미래 생태학적 가치가 충만한 곳이다. 대호만, 가로림만, 대호만의 진정한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 생태, 문화가 지역 경제발전을 이루고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에 이바지하고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주민들이 중심이 되는 일을 같이 하고 싶다."
 
대산 운산 1구에는 고려시대 왜구에 맞서던 부부가 신랑바위 각시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 이곳 산 위 신랑바위에서 내려다 본 고향마을 전경
▲ 대산 운산 1구에서 바라본 마을풍경 대산 운산 1구에는 고려시대 왜구에 맞서던 부부가 신랑바위 각시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 이곳 산 위 신랑바위에서 내려다 본 고향마을 전경
ⓒ 최미향

관련사진보기

 
- 내포 지역, 특히 서산 지역 역사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을까?

"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좌절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서산은 충남의 아프리카라'고 했다. 또 '악마의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셨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갯벌이 많으니 다 매립해 육지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인식이 대호만과 천수만을 잃게 했고, 가로림만도 위험에 빠지게 했다.

서산 지역은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예술 등도 훌륭하다. 그런데 백제, 신라, 고려 시대까지 전성기를 누리지만, 조선 시대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의 지역 모습을 상고이래 서산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바닷길이 열리면서 서산의 본질적 가치를 발현하기 시작했다. 지정학적 위치상으로 통신 레이더 기지와 공군 부대의 존재는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길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해미는 단지 읍성이 아니라 충청 병영성이었던 것이다.

서산의 정체성은 바다에서 시작한다. 서쪽 바다로 툭 튀어나와 있고 동쪽으로써 바다가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성연면까지 바닷물이 들어찼고, 사실상 남쪽에도 바닷물이 들어차 서산 시내까지 밀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닷개, 내포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서산이다. 예로부터 전통 풍수에서 흐르는 강이 북쪽으로 있는 지역은 매우 길하다고 했다. 서산의 좌우가 그렇다. 서산은 육지와 바다,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상과 문화의 시배지이자 발효 공간이다. 산업과 경제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서산은 반독립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반독립적인 환경은 언어와 음식, 예절, 생활 방식에서 내포 가운데에서도 특색이 있다. 어느 특정 사상이나 세력이 독점적 권력을 누리지 않고 균등한 관계를 유지해온 이유다. 반독립성은 21세기에도 매우 중요한 가치 지향이며, 새로운 생산의 원동력이다."
 
.
▲ 대산 운산리 고향 마을에 생긴 버스 정류장 .
ⓒ 최미향

관련사진보기

 
- 지역의 역사, 문화, 전통 등을 발굴하여 시민들에게 알리고 잘 보존하는 일은 지역 언론의 의무이기도 하다. 박사님이 바라시는 지역 언론의 향토문화, 역사, 전통에 대한 역할은 어떤 것이 있으며, 박사님과 함께할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지역 언론은 여러 어려움이 가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항상 기대가 크다. 그만큼 그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의 역할은 한 번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다. 계속 지속해서 다뤄줘야 한다.

시민과 주민들은 바쁘다. 생업은 전쟁과 같다. 전투에서는 다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서산에 관한 역사, 인물, 이야기들은 지역 언론에서 한 번쯤은 다뤘던 내용일 것이다.

타 언론에서 다뤘다고 다루지 않을 수 없으며, 다룬 내용이라고 해도 심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알고 있는 내용과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그런 내용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관해서는 신문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다. 그 내용을 묶어 책으로 발간하고 시민, 주민과 함께 나누는 자리에 참여하여 소통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김헌식_문화평론가, #서산시_대산읍_운산리출신, #기억하는민족이미래가밝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자문위원, #청운초17회졸업_대산중31회졸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