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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한 지 열흘 정도 지나자 안 아픈 한에서 30도쯤 침대를 세워도 된다는 의사의 말이 떨어졌다. 설렜다. 침대를 조금 세우니 주로 천정만 바라보던 눈에 건너편 침대가 들어왔다. 그리고, 가슴에 그릇을 놓고 20여 일 만에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짬뽕밥을 떠먹었다. 입맛을 잃은 상태였는데, 얼큰한 맛이 속을 어루만져주듯 반가워서 국물은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물론 여기저기 흘려가면서.

그리고 입원 이후 내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어쩌다 얼굴을 만져보면 관자놀이와 턱 부위가 좀 아프기도 하고, 눈을 세게 감으면 묵직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했다. 조금씩 살만해져 가니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약간 궁금해졌다. 침대 세운 날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사진도 보내고 얼굴도 확인할 겸 사진을 찍었다.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간병사님 얘기를 들으니 처음엔 얼굴도 붓고 멍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새 많이 가라앉았는지 나름 멀쩡해 보였다.

'퇴원 상담'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막 몸이 아물어가기 시작할 때 '퇴원' 얘기가 조금씩 나왔다. 나는 그 단어를 들으면서 '아! 조금 있으면 내가 목발에 의지해서라도 집으로 갈 수 있는 몸이 되나 보다. 그렇게 집에 계속 있기는 힘들 테니, 다시 입원 준비를 해서 다른 병원에 입원해야겠지? 양방병원보다는 한방병원에 입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등등의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퇴원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퇴원이 아니었다. 이 병원에서 수술은 잘 끝냈으니 이제 수술 후 관리할 수 있는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앰뷸런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병원의 시스템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몸도 움직일 수 없는 내가 퇴원을 해야 한다는 말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알아보는 것이 발등의 불이었기에 당황스러움 같은 감정은 서둘러 치워야 했다.

그래도 상황을 조금 이해는 해야 마음이 편해지니 애써 이해를 해보았다. 긴급 환자들의 수요를 감당해야 하는 종합병원에서 수술과 같은 긴급 처치가 끝나고 최소한의 시간이 지나면, 환자는 또 어딘가로 옮겨야 되는 건가보다 라고 대략 스스로에게 이해를 시켰다.

급한 불을 끄느라 깊게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나는 아마 '퇴원 상담' 같은 서비스 제도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병원이라는 환경과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들은 병원이나 의사의 말 한마디에 휘청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라는 존재 없이는 불가능한 병원에서 환자는 마치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수술이 잘 된 것만으로 회복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기에 환자의 여러 상황에 맞게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주고 얘기 나눠줄 상대가 있었으면 했으나 없었다.

'의료연계서비스'라고 해야 할까? 그런 서비스는 큰돈과 많은 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작은 정보와 도움이 아픈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작은 도움의 결과가 큰 도움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따뜻한 '효율성'을 품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환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보니 그런 것들은 환자 개인이나 가족의 몫이었고, 환자들끼리 이런저런 정보와 서비스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돕고 의지하고 있었다. 도울 가족이 없거나 주변과 소통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환자라면, 몸이 아픈 것 이상으로 이런 상황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한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방치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와 가족들 역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음 입원 병원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 달 조금 넘게 입원했던 수술병원에 이어 가게 된 두 번째 병원은 한방병원이었다. 기본적으로 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치료를 받는 층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한방병원으로 가다 보니 창문으로 조금 익숙한 바깥이 보였다. 가끔 시내에 나올 때면 걸어 다니곤 하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고,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식사시간이 행복하다

이렇게 시작된 한방병원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편안했다. 깔끔한 새 건물인데다 종합병원처럼 북적대지도 않았고, 4인실의 방에서 환자 두 명과 간병인 두 명, 이렇게 4명이 침대 하나씩 썼다. 간병사님은 간병일을 하면서 침대에 자본 적은 처음이라며, 침대를 쓰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화장실, 샤워실 등도 너무 많고 좋다며 연신 감탄했다.
 
그동안 간병일을 하면서 간이침대나 바닥에 주무섰던 간병사님이 처음으로 침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 간병사님의 침대 그동안 간병일을 하면서 간이침대나 바닥에 주무섰던 간병사님이 처음으로 침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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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옮기기 전 일주일간 해열제를 계속 투여해도 잡히지 않는 37.5~38도의 미열이 계속됐다. 몸이 괴롭지는 않았으나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긴 것 아닐까 등 여러 걱정이 오갔다. 병원을 옮기고 열을 잴 때부터 정상 체온이 되어있었다. 처음엔 체온계의 차이인가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정상 체온이 나왔고, 그 이후 열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전 병원 분위기가 위급한 것을 치료해야 하는 긴장되고 분주한 응급실 분위기였다면, 이 병원에서는 그런 긴장과 복잡함에서 벗어나서 심신이 치유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약과 침 등으로 그동안 시달린 몸이 달래지는 듯했다. 처음보다는 입맛도 회복되었는데, 밥맛까지 좋아서 식사시간도 행복했다. 시내에서 산으로 조금 올라간 곳이라 열린 창으로는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이 병원으로 옮긴 다음 날,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었다. 머리를 감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밀기로 진작 결정은 했는데, 새로운 병원으로 올 때 첫인상이 너무 안 좋을까 싶어 옮긴 후에 하기로 미루어 두었다. 잘려 나간 머리만큼 마음도 시원해졌고 머리 감는 일도 훨씬 편해졌다.

앞으로 한 달 후인 6월 중순에 수술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는데, 아마 그날 침대를 벗어나 일어서는 연습을 시작할지 결정을 내려줄 것이다. 한 달 후 '이제 일어서는 연습 시작해도 돼요'라는 의사의 말을 상상해보며 이제 또 한 달을 잘 살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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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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