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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수송동 소재 군산원협공판장(군산원예농협)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축산물 유통시설이다. 그 역사는 1915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군산식료품 판매조합’에서 시작된다. 광복의 달을 맞아 지역 주민의 삶과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는 조선인 상거래 장악을 목적으로 <시장규칙>을 제정한다. 이어 본래 전통시장을 제1호 시장(상설 또는 정기 재래시장), 제2호 시장(지정된 건물 내에서 곡물 및 식료품을 파는 식료품시장), 제3호 시장(위탁이나 경매로 거래하는 농수산물 경매시장) 등으로 분류하고 관청 허가를 받도록 조치한다. 제2호와 제3호 시장을 합해 '신식시장'이라 하였다.

그중 군산식료품시장(군산청과물시장)은 강호정 모시전거리(현 죽성로)를 경계로 영정 1정목(현 영동)과 마주보고 있었다. 부근에는 신탄시장(장작거리)을 비롯해 군산좌(군산극장 전신), 호남농구주식회사(쌀가마니 짜는 기계 제조회사), 와타나베제염소(소금 만드는 회사), 군산동부금융조합, 경마구락부, 안동병원(원장 권태영), 소화권번 등이 자리하였다.

1918년 '군산부 식료품시장' 설치
 
일제강점기 ‘군산부영 청과물시장’
 일제강점기 ‘군산부영 청과물시장’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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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부사>(1935)에 따르면 식료품 시장은 본래 일본인 석전구태랑(石田龜太郞)을 포함한 12명이 1915년 6월 17일부터 '군산 식료품 판매조합'이란 이름으로 경영하였다. 그러나 주감(主監)인 석전구태랑이 파산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진다. 1916년 11월 영업인가가 취소되고 1918년 10월 14일 '군산부 식료품시장'으로 개칭, 이후 부(府)경영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해(1918) 군산부는 강호정에 공사비 4800원을 투입해 식료품 시장을 설치한다. 운영자는 이등충효(伊藤忠孝)였다. 취급품은 채소류 및 과실류였으며 1년간 거래액은 12만5000원에 달하였다. 거래 규모가 증가하자 1928년 5월 같은 장소에 건물을 신축한다. 당시 중개인(중매인)은 일본인 7명, 조선인 15명, 중국인(화교) 10명 등 총 32명이었다.

중매인 중 화교가 약 30%(10명)를 차지해 눈길을 끈다. 이는 각종 채소를 전문으로 재배하는 화교 농가가 외곽에 집단을 이루고 있었고, 시내에 중식당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1918년 현재 군산 인구는 총 1만2136명으로 조선인 5990명, 일본인 5985명, 외국인(화교 포함) 214명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화교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추 한 포기 시세에서 고단했던 삶 모습 엿보여
 
1927년 6월 동아일보에 실린 옥산당약점 광고와 1938년 12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1927년 6월 동아일보에 실린 옥산당약점 광고와 1938년 12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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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료품시장 공식 명칭은 '군산부영청과물시장(群山府營靑果物市場)'이었다. 군산부에서 운영하는 시장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일반인은 물론 신문들도 청과물시장, 채소약간, 채소곡간, 야깡(약깡) 등으로 기재하였다. 한국인 약사가 운영하는 옥산당약점(玉山堂 藥店)은 1927년 6월 광고에서 주소와 함께 '채소곡간 엽헤'라고 안내해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1938년 12월 13일 치 <동아일보>는 '채소기근 군산부민 수난(菜蔬饑饉 群山府民 受難)'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지난 11월 하순부터 '야깡(청과물시장)'에 채소의 부족을 느껴 일시 그 가격은 천정 모르게 올라가므로 부민들은 멍한 기막힌 자태에 있었다.(현대어로 수정)"고 현장 분위기를 전하였다.

신문은 "11월 중순 배추 한 포기에 3전~3전 5리 하던 것이 지금은 12전~13전이란 그야말로 삼 배 이상 고가를 보이므로 여간한 힘으로는 김장하기 곤란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부두 노동자 한 달 임금이 15원 안팎이던 시절이었으니 김장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은 당연지사. 전쟁과 기근으로 절대빈곤이 지속됐던 시절, 조선인들의 고단했던 삶 모습이 엿보이는 시세이기도 하다.

광복 후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

군산부영청과물시장은 광복 후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된다. 1945년 10월 중매인들이 군산 청과조합을 결성하고, 1948년 5월 군산시 위탁업체인 '군산청과물 주식회사'로 개칭한 것. 당시 중개인은 30명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초대 대표(사장) 기록이 없으며, 1950년대 들어 현제범(玄濟範), 송용섭(宋龍燮) 등이 사장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송용섭은 10년 넘게 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1950년대 중반 사장에 취임한 그는 1968년 반공기금 2만 원을 기탁한 이후 언론과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송 사장은 군산상공회의소 부회장, 군산시 교육위원, 군산시체육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운영이 어려운 단체에 재산을 희사하고 가난한 선수들을 후원하는 등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았던 인물로 알려진다.

송용섭 사장은 누구?
 
광복 후(1959) 군산청과건어시장주식회사 건물과 송용섭 사장
 광복 후(1959) 군산청과건어시장주식회사 건물과 송용섭 사장
ⓒ 군옥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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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섭(1912~1992) 사장은 전주 출신으로 1935년경 군산으로 이주한다. 미곡상 운영하는 형님 권유로 군산에 온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권남선 보건교사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광복 후(1950년대) 군산청과건어시장주식회사(청과시장) 사장으로 취임한다. 소탈한 성격에 경영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재임 동안 회사를 반석위에 올려놓는다.

송 사장은 1992년 유명을 달리한다. 이후 애국지사로 밝혀져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전주고보 재학시절인 1929년 5월 단체(13명)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단다. 당시 나이는 열여덟. 그는 만주로 건너가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학교에서 퇴학당했던 그는 광복 직후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모교와 동문회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정하여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던 것.

송 사장은 3·1운동 101주년이 되는 2020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 직인이 찍힌 애국지사 증서를 받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 그가 사후에 명예를 회복한 이유는 '평소 재물은 공동의 것'이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여 권위주의 시절(60~80년대) 몸을 사리고 지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의 표창 증서에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표창한다'는 문구가 선명하다.

송재현(송용섭 아들)씨는 "아버님이 학창 시절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상처 자국을 손자에게 보여주셨던 모양"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지난 어느 날 아들이 "할아버지 고문 흔적을 봤다"는 말을 하는데 눈물이 나오더라는 것. 아래는 송재현씨가 부친의 명예를 회복해드린 후 느꼈던 소감이다.

"'할아버지가 학창 시절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한 상처 자국을 봤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고민 끝에 삼일운동 100주년 앞두고 독립유공자 신청해서 영광스럽게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고, 증서를 대전 현충원 아버님 묘지에 놓아드리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살아계실 때 불효를 조금이나마 덜어낸 것 같아 위안이 됩니다."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송용섭 애국지사 묘역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송용섭 애국지사 묘역
ⓒ 송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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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군산시사 上권>(2000)/ 군산상공회의소 100년사/ <조선의 보고 전라북도 발전사>(일명 ‘전북안내’)/ 20~30년대 ‘동아일보’/ 송재현 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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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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