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2 09:30최종 업데이트 22.08.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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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한 잔이 들어가니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70억이 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70억분의 1 이상의 확률로 보고, 70억분의 1 이상의 확률로 듣고, 같은 확률로 냄새 맡고, 같은 확률로 감촉을 느끼고 , 역시 같은 확률로 맛을 본다고 한다.

인간은 모두 똑같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미각 이렇게 오감을 통해 인식하지만, 그것이 머릿속에서 인지되는 건 모두 조금씩이나마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2015년, 사진 속 드레스 무늬 색깔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 일명 드레스 사건은 좋은 예일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는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이들은 검은색과 파란색 줄무늬 드레스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흰색과 황금색 줄무늬 드레스로 인식했다. 내 아내와 아들, 딸에게도 물어보니 모두가 검은색과 파란색 줄무늬란다. 과거의 난 어떻게 봤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어떤 이들은 검은색과 파란색 줄무늬 드레스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흰색과 황금색 줄무늬 드레스라고 주장했다. ⓒ 텀블러

 
하여튼 이것은 세상이 시끄러울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문제는커녕 오히려 소소한 즐거움을 줬다.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도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가진 차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런 차이로 인해 사회가 발전했고 문화가 번성했는지도 모른다.


일명 '장애인'이란 꼬리표가 달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같은 장애를 가진, 그러니까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들도 모두 다르다. 그리고 그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떠드는 것 중에서 어떤 건 일반적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이 무 자르듯 명확히 구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떠드는 이 이야기는 내 개인적 경험과 느낌이란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70억분의 1 이상의 확률 말이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

나를 잘 아는 사람들도 간혹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 의심할 때가 있다.

어느 가을 오후,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은행나무 가로수가 즐비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야, 이제 완연한 가을이구나. 은행잎이 완전히 노랗게 물들었어."
"오, 멋지네. 바람에 날리는 노란 은행잎이라... 환상적인데."
"뭐? 너... 혹시… 보이니?"


친구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고, 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날은 차 안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람이 심했고 우리는 좌우로 즐비한 은행나무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청각과 감각 그리고 기억이라는 내 새로운 눈들은 이런 정보를 통해 가장 비슷한 장면을 보여줬을 뿐이다. 거기다가 그날은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기분은 더없이 즐거웠다. 어찌 감탄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언젠가 여행 도중 들렀던 인상적인 음식점에 대해 말하는데 그때 동행했던 사람 중 그 음식점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 거길 몰라? 멋들어진 초가 아니면 고풍스러운 한옥 스타일 음식점 같았는데. 우리 거기서 막걸리에 김치전 먹었잖아, 청국장도 먹고..."
"혹시 너… 이런, 이런, 내가 장난친 거길 말하는 거구나."
"장난?"


내 말을 알아들은 친구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난 막걸리를 좋아한다. 세련된 분위기보다는 약간은 촌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고, 오래된 나무나 흙냄새도 좋아한다. 처음 그곳에 들어섰을 때 난 이런 분위기를 느껴 친구에게 내 느낌을 설명하면서 맞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그 친구는, 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알아챘으면서도 날 놀려주려고 내 말에 약간의 감탄까지 섞어가며 동의했다.
 

내 기억은 막걸리집에 관해 엉뚱한 그림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 픽사베이

 
얼마 후 그 친구는 물론 다른 친구들도 진실을 말해줬지만, 아마도 내게 딱 맞는 맛있는 막걸리와 안주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새로운 내 눈들은 그 왜곡된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뒀던 것이다.

사실 그곳은 막걸리와 음식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식재료를 여기저기 대강 쌓아둔, 시각적으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평균 이하의 음식점이었다. 나도 그때 동행한 사람들의 설명을 들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도 내 기억은 이렇게 엉뚱한 그림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의 착각은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가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나 같이 중도에 시력을 잃은 사람은 그 정도가 좀 심하다. 아니, 사실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이 외부 자극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오감 중 시각이 무려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다 합쳐도 겨우 30% 정도의 정보를 입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시각은 우리가 정보를 입수하고 저장하는데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은 영원하지 못하고 자주 왜곡된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생생한 기억과 정확한 기억은 전혀 별개다. 그런데 그나마 그 생생한 기억도 내 경우에는 이미 10여 년 전 일이다.

그러니까 시각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데이터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들은 완전히 정보의 입수와 보전이 다른 방식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30% 남짓 역할을 담당했던 나머지 감각 기관들이 시각이 담당했던 70%를 포함한 100%를 처리해야 하니 계속해서 과부하가 걸리고 왜곡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사는 새로운 세상이 못 살 곳이란 얘기는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또 다른 재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다. 그 재미란 게 나 혼자는 안되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찬란한 태양 빛이 가득한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한 영원히 시각적 이미지는 필요하다. 그래서 난 도움이 필요하다.

서울의 한 공연장으로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다. 용변이 급해 그냥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소변기를 찾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지만 내게 도움을 주는 이가 없었다.

"저기요, 제가..."

순식간에 몇 명이 내 말을 외면한 채 지나쳐 갔다. 처음 느끼는 당혹감이었고 약간은 두려움이었다. 곧 소변기를 찾을 수 있어 용변은 해결했지만 끝내 그날 날 도와준 사람은 없었다.

사실 정반대의 경험이 훨씬 많다. 심지어 화장실을 나오려다 내 지팡이를 보고 다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시는 분도 있고, 내가 볼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도 간혹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소한 것이 내 기억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뮤지컬과 그 공연장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선 수준 이하로 남아 있다. 내 가상의 눈들은 배우들의 노래와 춤을 그다지 멋지게 보여주지 못하고, 공연장의 시설 역시 한참이나 모자라는 것으로 보여준다.

결국 내 새로운 눈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 새로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하다. 나를 에워싼 사람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전해지는 감정들이 내가 새로 얻은 눈을 통해 내가 사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다.

10년 만에 발목 등산화도 벗고 반바지까지 입고 나와서인지 오늘따라 무척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이 등산화와 반바지 얘기도 좀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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