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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 문학예술산책 프로그램 현수막
 길동무 문학예술산책 프로그램 현수막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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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천문화재단길동무'에서 주관하는 문학예술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근대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학·예술가의 생가를 둘러보고, 그곳이 서울에서 어느 위치인지, 지금은 어떻게 변했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이다.

서촌 일대는 사적·유적·고적이 많은 곳이어서, 조선 시대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 '사직단'만 해도 조선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던 장소였다.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모신 장소로, 한 해에 세 번, 봄, 가을, 납일에 제사를 지내고, '종묘'와 더불어 '국가' 즉 조선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였다.

1592년, 임진년 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사라지고 단만 남았다가 1603년 무렵 중건되었다. 이후 18세기 들어오면서 부속건물이 늘어나는데, 모두 제사를 위한 악기, 물품을 보관하는 건물이었다. 제기고, 재생전, 전사청, 잡물고, 수복방 등이 서쪽에 자리 잡고, 악기고, 안향청, 차장고, 악공청, 부장직소 등이 동쪽에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어 훼손했고, 한쪽에 '경성도서관'을 지었다. 이 도서관은 해방 이후 '종로도서관'이 되었고, 여기에 '서울시립 어린이도서관'이 나중에 세워졌다. 해방 이후에 사직단은 면적이 축소되고, 사직터널이 생기면서 대문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80년 말에 사직단 복원 작업으로 제단과 건물 일부가 복원되었다.

5월 28일(일) 우리 답사 일행의 프로그램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직공원(강의1)-염상섭-이상-박노수-윤동주-수성동 계곡(강의2)-점심/ 청운문학도서관-윤동주문학관(강의3)-창의문-작소거(강의4)-효자동 산원-진명여고

걸은 경로를 지도에 표시했다. 약 4시간 정도를 걷다 쉬다 했고, 약 1만 5000걸음을 걸었다.
 
프로그램 당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경로를 ‘카카오맵’ 지도 위에 표시했다.
 프로그램 당일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경로를 ‘카카오맵’ 지도 위에 표시했다.
ⓒ 카카오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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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김유정, 작가 김유정

우리 일행이 출발한 사직단 위쪽, 일제강점기 시기에 이곳은 사직공원이었고, 그 윗동네에서 김유정이 누나의 집에 얹혀살았다. 김유정의 소설 <생의 반려>(1936), <따라지>(1937), <연기>(1937), <형>(1939)에 사직동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지>에서는 첫 문장이 '쪽대문을 열어놓으니 사직공원이 환히 내려다보인다'로 시작한다. 사직공원이 보이는 언덕에 김유정이 사는 초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동네에 사는 버스걸(버스 안내원), 카페 여급, 공장 여공 등 빈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

<생의 반려>는 김유정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김유정은 몰락한 집안에서 오갈 데 없어 시집에서 쫓겨난 둘째 누나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둘째 누나는 경무과 분실 양복부의 노동자로 일하며 하루 70전 임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린 딸과 무위도식하는 남동생까지 거둬 먹여야 하는 처지였다. 둘째 누나는 저임금을 받으며 힘겹게 살면서도 임금의 일부를 떼어 공장 사람을 상대로 돈놀이를 했는데, 돈을 벌기는커녕 본전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곤 했다.

공장에서 남자 관리자, 남자 직원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빌려준 돈을 떼이고, 궁핍에 찌들어 살다 보니 동생 유정에게 모진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누나의 날카로운 히스테리와 신경질이 폭발하면 유정은 대꾸도 못 하고 괴로워했다.

이상(李箱)의 작품 <소설 김유정>에서 김유정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말이 거의 없는 뚱한 샌님이지만, 술이 들어가면 검지손가락으로 앞머리를 후벼파며, 강원도 아리랑을 잘 부르고, 술 동무들과 싸움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안회남은 그의 소설 <김유정전>에서 "지독한 가난과 병(폐결핵, 치질)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고, 판소리 명창 박녹주에게 일방의 애정을 보냈으나 무시당한 연애의 상처를 지닌 채 세상을 뜬 유정은 인간으로는 비참했으나 작가 유정은 찬란하다"라고 말했다.

박태원의 소설 <거리>(1936)에서 사직공원과 사직동 장면이 나온다. 가난한 소설가 '나'는 극빈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생각하지만, 자살할 용기는 없고, 멀리 떠나고 싶어도 여비가 없어 방황하다 사직동으로 향한다. 사직동에는 제법 잘 사는 벗이 있어 은근히 기대하고 찾아가지만, 사직동 집에 친구는 없었고, 낙담하여 사직공원으로 갔더니 그곳에서 물구나무 하는 벗을 만난다.
  
횡보 염상섭 생가 앞에서 김남일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횡보 염상섭 생가 앞에서 김남일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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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직단(사직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횡보 염상섭 생가가 있다. '종로구 필운동 야조현 고가나무골'이 생가 주소인데, 지금은 '체부동 106의 1번지'다. 이 자리에는 지금 빌라가 서 있고, 염상섭과 관련한 아무런 표시가 없다. 염상섭의 조부 때부터 살던 곳은 적선동인데, 조선시대 '삼군부'라는 시위대가 있던 병영 뒷골목으로 염상섭 조부 때부터 아버지, 형까지 태어난 집이다.

이 적선동 집에 관해서는 염상섭의 소설 <암야>(1922)에서 'A군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암야>는 인습적 결혼을 강요당하는 지식 청년의 고뇌를 그린 작품으로, 적선동, 종교예배당, 야조현 시장, 대한문, 광화문, 체신국 앞, 사복개천, 천변, A의 집(적선동), 숙주감다리, 삼청동길, 종친부(다리, 대문 앞), 사십자각(경복궁), 육조대로, 광화문통, 태평통 길, 전차 종점 등 서울 시내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상과 구본웅
 
이상이 태어난 집으로 알려진 통의동 집. 이 집은 이상의 큰아버지 집이었다.
 이상이 태어난 집으로 알려진 통의동 집. 이 집은 이상의 큰아버지 집이었다.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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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문한 곳은 염상섭 생가 자리에서 가까운 '이상의 집'. 이 집은 이상이 태어난 곳으로 잘못 알려졌다. 이 집은 이상의 큰아버지 집이며, 이상은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가 아기 때부터 청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상이 태어난 곳은 '사직단'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사직동 165번지로, '광화문 스페이스본 오피스텔' 자리다.

이상이 쓴 산문 <슬픈 이야기>와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가 쓴 <오빠 이상>을 보면, 이상의 아버지 김연창은 관내부 활판소에서 활판공으로 일하다 두 번 사고를 당하는데, 이때 손가락 세 개를 잃는다. 그 뒤로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했다. 이상의 큰아버지 김연필은 자식이 없어 큰조카를 양자로 삼는다.

지금 '이상의 집'은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으로,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 4통 6호'로 지금 주소로는 '통인동 154번지'다. 이곳에서 이상(김해경)은 세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사는데, 경성고등공업 건축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하면서 최초의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쓴다.

이상과 구본웅은 같은 학교(신명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의 배화여고 자리가 신명학교가 있던 곳이다. 이상과 구본웅은 신명학교 동기동창이지만 구본웅이 네 살이나 많았다. 구본웅의 생가는 누상동257번지로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은 기업가로 재산이 많았다. 구본웅은 장애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 고희동, 나혜석, 김복진 같은 당대 최고 작가에게 미술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친구 이상을 위해 '창문사'라는 출판사를 세워 이상이 그곳에서 일하도록 배려했다.

윤동주의 하숙집
 
종로구립미술관 겸 박노수 가옥의 정원
 종로구립미술관 겸 박노수 가옥의 정원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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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들른 곳은 '박노수 가옥'이자 종로구립미술관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내용을 인용했다.
 
2013년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방된 박노수 가옥은 80여 년 전인 1937년 경 지어진 절충식 기법의 가옥입니다. 1973년, 한국 화가인 남정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여 2011년도 말까지 거주하였습니다. 80여 년이 된 고택이자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인 건축물의 의미를 살려 화백이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를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미술관으로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을 설치하였습니다. 각 전시에 따라 공간구성이 달라져 여러  차례에 거쳐 가옥의 다채로운 공간 또한 관람할 수 있는 화가의 숨결과 시간을 담은 전시 공간입니다(출처: 종로문화재단 홈페이지).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집 자리는 빌라가 서 있고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집 자리는 빌라가 서 있고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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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들른 곳은 윤동주 하숙집 자리였다. '누상동 9번지'로, 인왕산이 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소설가이자 극작가 김송의 집으로 그가 1939년 2월부터 그의 둘째 아내와 살기 시작한 집인데, 학생을 상대로 하숙을 했다. 윤동주는 1941년 5월부터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 이 집에서 하숙했다. '대지가 백수십 평에 달하는 그곳은, 과거 무당들이 굿하고 살풀이하던 흉가를 기와로 신축한 건물'(방민호)이다.

윤동주는 누상동 하숙생 시절에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간' 같은 시를 지었다. 지금 윤동주 하숙집 자리는 특별한 게 없고 명패만 붙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허경진 교수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인용했다.
 
졸업반 시절에 태평양전쟁 여파로 기숙사 음식이 시원치 않게 되자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하숙집을 찾았는데, 정병욱은 하숙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 <경향신문>, 윤동주 하숙집을 시민들 품으로

윤동주보다 8세 위였던 김송은 함경도 출신으로 대표적인 항일 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의 감옥 체험을 다룬 데뷔작 <지옥>을 신흥극장 창단 작품으로 공연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중단 당했으며, 일본 경찰에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 살던 시절 윤동주의 동선은 글자 그대로 서울 산책이다.
 
"아침 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明治座)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윤동주가 기숙사에서 나와 누상동에 하숙집을 잡은 이유는 서울 문화산책을 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 <경향신문>, 윤동주 하숙집을 시민들 품으로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
 
수성동 계곡과 기린 다리.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수성동 계곡과 기린 다리.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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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들른 곳은 '수성동 계곡'이다. 윤동주 하숙집 자리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조금 올라가면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 철거된 종로구 옥인동 옥인아파트 자리에서 복원된 계곡이다. 계곡의 길이는 총 190.8m, 폭은 최대 26.2m, 최소 4.8m에 이르며 하류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가 1기 남아 있다.

그 옛날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흘렀는데, 이 물줄기가 기린교에서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옥같이 맑게 흐르던 옥류동 계곡은 콘크리트로 덮여 주택가로 변했지만, 수성동 계곡은 옥인아파트 철거 후 옛 모습을 되찾아 여전히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고 있다.

수성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고,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집터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 일대를 8폭의 진경, 즉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으로 남겨 놓았는데 인왕산 일대 〈수성동〉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출처 : 위키백과). 

수성동 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걸었다. 인왕산은 송영의 소설 <인왕산>(1936)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의 인왕산 풍경을 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표지석.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에서 이곳까지 산책했다는 추론을 통해 이름 붙였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표지석. 윤동주 시인이 하숙집에서 이곳까지 산책했다는 추론을 통해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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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들른 곳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이다. 윤동주 문학관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온다. 이 언덕이 윤동주와 직접 관련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윤동주가 누상동에서 하숙하며 이 뒷동산에 자주 올라왔을 거라는 합리적 추측을 통해 이 언덕에 기념비를 세웠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백운동 계곡이었다. 백운동(白雲洞)은 인왕산 자락 자하문터널 상부 일대로서 행정구역상 종로구 청운동 6-6번지를 중심으로 한 곳이다. 청운동에서 부암동 방향으로 가는 자하문터널 입구 오른쪽 편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건물의 뒤편 즉, 서북쪽 일대의 계곡부를 일컫는다. 백운동은 흰 구름이 떠있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일찍이 조선 전기부터 당대의 사대가(四大家)로 칭송받던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 1410~1481),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등이 그 경치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바 있으며, 용재(傭齋) 성현(成俔, 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傭齋叢話)>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서도 한양도성 내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다섯 군데의 명소(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 장소이다.(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백운동
 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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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계곡에서 모임을 마쳤다. 오늘 모임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많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점심밥도 나눠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준비한 김남일 선생님이 충실하게 준비한 자료로 한층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무심히 흘려버릴 수 있는 장소에 뜻밖의 의미를 발견하는 놀라움과 즐거움이 있었고, 서촌 일대 근대의 문물이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는 안타까움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길동무 문학예술산책 – 서울 근대 편'을 진행 중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문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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