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31 19:50최종 업데이트 22.07.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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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가 보관된 기념비전. ⓒ 김종성


올가을에 열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국장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기운이 샘솟곤 했던 친일파가 있다. 일본에서 초상이 날 때마다 두각을 보인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이 바로 그다. 일본 경조사를 놓치지 않고 꼭꼭 얼굴을 내밀곤 했던 그는 경술국적 8인 중 하나다.
 
그는 이완용·박제순·고영희·윤덕영·이병무·조종응·조민회과 함께 경술년인 1910년 8월에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IV-5권은 그의 친일행위를 나열하는 대목에서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모의하고 8월 22일 궁내부 대신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주도"했다고 설명한다.
 
재미 한국인들이 발행한 1910년 9월 21일 자 <신한민보>는 위 어전회의 풍경을 보도하면서 "좌중이 묵묵불언하고 한 놈도 반대함이 없는 고로 완용이는 이를 가결이라 하고"라고 보도했다. 그 '한 놈도'에 포함된 인물이 민병석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근처에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순종 황제와 함께 민병석의 글씨로 제작된 비석이다. 민병석은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기릴 일이 있을 때마다 앞에 나서서 자기 이름을 남기는 모습은 민병석의 친일 인생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났다. 애경사에 민감히 대처할 뿐 아니라 그런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는 데 소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철종 임금 때인 1858년 12월 12일 출생한 민병석은 명문가인 여흥 민씨의 일원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 판사였으며 박정희 정권 때 대법원장이었던 친일파 민복기가 그의 아들이다. 임오군란 이듬해인 1883년에 예조판서가 된 민영위가 그에게 양조부가 된다.
 
21세 때인 1879년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민병석은 그 뒤 대체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이고 고종의 부인도 민씨라서 여흥 민씨의 위상이 높았던 시기다. 그런 시절에 그는 우수한 소장파 관료들이 배치되는 규장각·홍문관·성균관 같은 데서 경력을 쌓았다.
 
음력으로 고종 21년 9월 16일 자(양력 1884년 11월 3일 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26세 되던 이 해에 국립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다. 그 뒤 광역시장급인 강화유수 등을 거쳐 42세 때인 1900년에 대한제국 군부대신이 됐다. 이 정도면, 가문뿐 아니라 조정으로부터도 은덕을 많이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일 간 이벤트 있을 때마다 두각
 

친일파 민병석 ⓒ 조선귀족열전


그러나 그는 은덕을 곱게 갚지 않았다. 기회가 생기면 외세와의 결탁을 거리낌 없이 시도했다. 일본에 대해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청나라를 상대로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민병석 편은 동학농민군의 궐기로 조선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고 청일 양국 군대가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조선에 진주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1894년 평양에 진출한 청국군과 결탁하여 민씨 척족의 복권을 도모하다가 일본군에게 평양이 함락당하자 인장과 부신(符信)마저 챙기지 않은 채 도주했다"고 말한다.
 
둘로 쪼갠 뒤 한쪽은 발행자가 갖고 한쪽은 수신자가 갖는 부신은 신하에 대한 군주의 신임을 표시하는 증표였다. 비상시에 그것을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신하의 '에티켓'이었다.
 
그것마저 챙기지 못하고 달아날 정도로 일본군을 무서워했던 그가 러일전쟁 시기인 1904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로 자기 존재를 부각시켰다. 한일 간에 기념할 만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두각을 보였다.
 
궁내부대신이었던 1904년에는 특사로 방한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영접 행사를 지휘했다. 오늘날의 국가보훈처 비슷한 표훈원의 총재였을 때는 이토 히로부미를 왕실 고문으로 초빙하는 운동을 벌였다. 황제를 보좌하는 시종원경이던 1907년에는 다이쇼 왕세자(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는 봉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국권 침탈 전년도인 1909년 2월에는 일본에까지 가서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을 유임시키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해 10월 26일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격을 받고 쓰러지자 11월에 도쿄로 건너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또 한양 남산 기슭의 장충단에서 추모회를 거행하자는 발의도 제기했다. 12월 14일에는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사망 50일 추도식에도 참석했다.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일본 경조사에 더 적극 참여했다. 일제 강점 뒤에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 왕실을 담당하는 이왕직 장관이 된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친일인명사전>은 "이왕직은 일제가 조선 왕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 궁내성 소속기관이다"라며 "(민병석은) 일본 천황에게 정기적으로 문안하고 일본 황실과 정부의 경조사를 챙겼으며 신사·신궁에서 거행하는 각종 제례에 참석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메이지 일왕의 장례식, 다이쇼 일왕의 즉위식, 순종의 일왕 방문 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의 친일이 경조사 참석 수준에서 그친 것은 아니다. 이완용 등과 함께 경술국치를 주도한 그는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 및 부의장 역임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유교 친일화를 위한 기구인 조선유도회 부회장으로도 활약하고, 한국사 왜곡을 위한 기구인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조선귀족회 회장으로서 한국 특권층이 일본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책무도 맡았다.

친일파라는 지위가 재산 형성에 기여
 

2016년 철도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고종 황제(오른쪽)와 함께 철도원 초대 총재였던 친일파 민병석(왼쪽)의 사진도 보인다. ⓒ 이민선


일본 경조사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일은 그의 지위뿐 아니라 통장 잔고도 두둑이 만들어주었다. 명문가의 일원이었으므로 집안에서 전해진 재산도 있었을 것이고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 관료로서 받은 봉급도 있었고 관민 합작으로 출자한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하면서 벌어들인 수입도 있었지만, 친일파로 두각을 보이며 일본과 제휴하는 동안에 벌어들인 소득이 적지 않았다. 이왕직 장관(8년 재임)이나 중추원 고문·부의장(15년 재임) 같은 월급쟁이 친일파로 근무한 기간도 상당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에 뛰어든 것은 1904년이고, 막판까지 친일을 하다가 사망한 것은 1940년이다. 82년 인생 중에서 36년을 친일파로 살았고 친일파 지위를 기반으로 소득을 축적했으니, 적어도 햇수로만 친다면 절반에 가까운 소득의 출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적극적 친일을 하던 기간인 1920년에 해동은행 취체역(이사)이 되고 1921년에 고려요업 대표가 되고 조선생명보험 사장이 되고 1923년에 조선제사(製絲) 사장이 되고 1924년에 계림전기 창립위원장이 됐다. 친일파 지위를 발판으로 이런 기업활동을 했으므로, 이런 데서 생긴 소득도 친일재산 산정 때 고려하는 게 이치일 것이다.
 
금전 문제와 관련해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관계가 있다. 대한제국 시절에 그가 한일 양국을 매개하면서 공금을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04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제공한 정치자금 30만 엔을 중간에서 전달한 사람이 그였다. 1905년에 고종이 이토를 왕실고문으로 영입하라며 내놓은 업무 추진비 10만 엔을 사용한 사람도 그였다.
 
왕조시대 관점에서 보면, 그는 충성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임금과의 언약을 증표하는 부신을 챙기지도 않고 자기 몸부터 챙긴 행위는 군주와의 신뢰관계를 소홀히 다루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낳을 소지가 컸다. 그런 사람이 고종과 이토 사이를 매개하면서 비밀자금을 만졌던 것이다.
 
고종은 10만 엔을 준 그해에 그를 귀양보냈다. 성과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그는 친일 행위 과정에서 양국 위정자들의 돈을 맡아두는 일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잡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관료치고는 재산이 많았다. <친일인명사전>은 "1933년 2월 현재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자산가"였다고 말한다.

1927년 4월 8일 자 <조선일보>에 경성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초임 봉급에 관한 기사가 보도됐다. "초입이 남자 오십이 원, 여자가 사십사 원"이라고 한 뒤 일본 사범학교 출신과 비교할 때 너무 많으니 깎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을 담은 기사였다. 초등학교 교사 초임 봉급이 50원이던 시절에 민병석은 30만 원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단순 계산하면 초등 교사가 500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다. 주업이 관료인 사람이 이 정도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민병석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 친일파로 살았고, 친일파라는 지위가 그의 재산 형성에 기여했다. 그런데도 2013년에 법무부가 발표한 것처럼 정부는 민병석 재산을 8억 7천만 원어치 환수하는 데 그쳤다. 자료의 한계 때문에 친일 재산을 충분히 찾아내기 힘들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36년간의 친일 활동 기간과 비교하면 금액이 소소하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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