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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며 임신중단권리 폐기해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 같은 퇴보를 막기 위해, 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 후속 조치를 제대로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 이후 3년, 길었던 공백의 시간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지난 2019년 4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던 여성단체 회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지난 2019년 4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던 여성단체 회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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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의 권리를 인정했던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결정을 내린 이후, 한국에서도 앞으로의 법·제도 향방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상황으로 인해 혹여 한국에서도 임신중지를 법적으로 다시 제약하는 조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을지 우려하고(혹은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우려(혹은 기대)는 이제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한국은 이미 임신중지가 '비범죄화' 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임신중지가 더 이상 법적인 처벌이나 허용 요건을 필요로 하는 '범죄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2021년 1월 1일 이후로 한국에서 '낙태죄'의 법적 실효는 사라졌으며, 임신중지는 더 이상 범죄 행위가 아니다. 당연히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와 연동되었던 모자보건법 제14조의 합법적 임신중지에 관한 허용 요건 또한 현재는 별도로 적용될 이유가 없는 조항이 되었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 된 한국에서는 이제 임신중지를 하는 당사자, 관련 의료행위를 통해 임신중지를 도운 보건의료인, 임신중지와 관련된 정보나 상담 등을 제공한 사람 등 어떤 사람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또한 임신 기간, 임신중지의 사유, 제 3자의 동의 여부 등에 관해서도 별도의 처벌 조항이나 허용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것은 현재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UN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 등 여러 국제기구가 세계 각국에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방향이다. 이제 임신중지는 형법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 건강권과 사회적 권리,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중지는 건강권과 인권의 문제임을 알리는 세계보건기구의 포스터
▲ 임신중지는 건강권이다.  임신중지는 건강권과 인권의 문제임을 알리는 세계보건기구의 포스터
ⓒ 세계보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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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대법원의 결정은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이러한 국제 사회의 흐름에서 크게 역행하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일 뿐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어떠한 기준이나 지표도 될 수 없으며,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다. 오히려 한국은 이미 비범죄화가 이루어진 현재의 조건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경제적 지원 체계를 마련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정작 정부와 국회, 보건당국, 관련 부처가 아직까지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보건의료 체계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입법공백"과 같은 말들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만들고 당장 필요한 제도적 조치들을 지연시키는 뻔뻔한 핑계가 되고 있다. 

법적 기준 없어 혼란? '비범죄화' 인정하지 않아 문제

정부와 국회는 2019년 헌법재판소가 주문했던 입법 시한인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정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임신중지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다"라는 것이 현재 임신중지에 관한 법적 기준이다. 더 이상 범죄가 아니므로 정부는 이제 공적 의료체계를 통해 누구든 안전하게 임신중지에 필요한 의료적,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며, 보건의료인들은 필요한 의료적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2021년 1월 1일부터 적극적으로 시행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비범죄화가 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여전히 "법적 기준이 없어서 현장이 혼란하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틀렸다. 법적 기준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범죄화'라는 새로운 법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변화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안전한 보건의료 시스템을 마련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동안 의료 현장에서는 "법이 없어서"라는 말로 환자의 부담을 가중시켜 왔다. 임신중지를 문의하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면 여전히 많은 병원에서 "현재는 명확한 법적 기준이 없다"거나, 아직까지도 "모자보건법 14조의 허용 조건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라며 환자에게 불안감을 주고 병원이 제시하는 금액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누군가는 무리해서 일을 하고, 누군가는 돈을 빌렸다가 폭력적인 상황을 겪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임신중지를 미뤘다가 오히려 더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를 하게 되기도 한다. 

유산유도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유산유도제는 세계보건기구에서 '필수핵심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있는 약으로, 이미 전 세계 70개국 이상의 보건의료 체계 하에서 안전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임신 초기 유산유도제 사용률이 80% 가까이에 달할 정도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식약처가 계속해서 승인을 미루고만 있는 바람에 오히려 온라인 시장만 커지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약은 정확한 복용 정보를 얻지 못하고 성분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은데다, 적절한 시기에 부작용이나 후유증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온라인 구매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승인되지 않은 미페프리스톤 외에 미소프로스톨이나 다른 약물을 통해 병원에서도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보건사회연구원의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는 병원에서도 환자에게 제대로 된 안내나 후유증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약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76.6%는 '의사에게 처방 받아서', 14.9%는 '지인 또는 구매 대행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구매'라고 답했으나, 다음 질문인 "약을 복용했을 때 다음 내용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약의 복용(삽입) 방법'을 몰랐다는 응답이 74.5%, '약의 임신주수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효과'를 몰랐다는 응답이 66.0%, '약 복용 이후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후유증'을 몰랐다는 응답이 63.8%로 나타났다.

즉, 응답자의 76.6%가 의료기관에서 의사한테 처방을 받았는데도 복용 방법, 효과, 증상과 후유증에 대한 정보다 설명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식약처가 유산유도제의 승인을 미루면서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에 관한 제대로 된 가이드와 공급 체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정작 식약처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6월 30일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자료 중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에 관한 설문 응답 결과 캡쳐
▲ 보건사회연구원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6월 30일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자료 중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에 관한 설문 응답 결과 캡쳐
ⓒ 보건사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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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권 대 결정권'이란 낡은 구도는 완전히 폐기해야

올해 2월 말일과 3월 8일, 세계산부인과학회와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국가에서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3년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여러 국가에서 임신중지를 제한적으로 합법화했으나 이러한 제한적 합법화 방식으로는 임신을 한 당사자의 건강과 권리도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임신중지나 임신·출산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각국은 소위 '여성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법을 통해 조정하겠다는 전제하에 12주, 24주 등 임신 기간을 기준으로 처벌 조건을 달리하거나, 특정한 허용 사유를 추가하는 방식, 임신중지 전 상담 의무제, 의무 숙려기간 제도 등 다양한 제약을 두는 방식 등 다양한 법적 장치를 두었으나 법적 제약이 많고 이로 인해 의료 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질수록 오히려 부작용만 클 뿐이었다.

주수 제한이나 각종 제약으로 인해 오히려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시기만 지연되었고, 합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쳐서 해외로 이동하거나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를 시도하게 되는 이들이 증가했다. 보건의료인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안전한 시술 방법이나 지원 체계를 모색하기 보다는 합법적으로 가능한 수준 하에서만 의료행위를 하다 보니, 오히려 임신 중기 이후의 의료적 지원이 더 필요한 사람들일수록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자는 낙태하고, 가난한 사람은 죽는다"라는 전 세계 '낙태죄' 폐지 운동의 유명한 구호는 지금까지 임신중지를 처벌로서 다루겠다는 법의 통제 방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처벌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할 국가의 적극적인 책임을 방기하는 가장 쉬운 선택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 2022년 3월 8일에 새롭게 발표한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각국에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권고하는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 세계보건기구의 2022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세계보건기구에서 2022년 3월 8일에 새롭게 발표한 임신중지 가이드라인. 각국에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권고하는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 세계보건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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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범죄화'의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할 한국에서 아직도 '생명권 대 결정권'이라는 낡은 구도를 붙잡고 있다면, 자신이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처벌로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생명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임신의 유지 여부에 대한 결정 또한 단순한 O, X 퀴즈가 아니다.

임신중지를 결정하게 되는 상황에는 법으로 재단할 수도 없고, 누군가가 강제할 수도 없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변수들 가운데에서도 처벌이 두려워서 임신중지를 안 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임신의 유지 여부에 대한 결정은 처벌 여부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산 이후 자녀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삶의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처벌이 아니라 평등하고 안전한 삶의 조건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다. 

정부가 지금 당장 해야할 일 

'입법 공백'만을 핑계로 대고 있는 대신 정부가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매우 많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현재의 법적 기준은 '비범죄화'이므로 정부는 이제 임신중지가 공식 의료체계를 통해 보장되는 일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관련 체계부터 정비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일은 유산유도제를 하루속히 승인하고,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약물과 시술을 모두 포함하여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비 지원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료 행위와 마찬가지로 1차 의료기관부터 3차 의료기관까지 필요한 의료 지원이 연계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설이나 의료진의 여건에 따라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나 시술이 어려운 사람들은 상급 의료기관에서 안전하게 진료와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임신중지는 5주에서 6주경에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이른 시기에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하는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다만 임신 20주 이후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에 있거나 본인 또는 태아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당사자의 건강이나 사회경제적 상황 등을 두루 고려하여 임신중지나 출산 후 양육 또는 입양 등의 관련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정보와 상담 체계, 다른 사회적 지원이나 보장 체계도 필요하다.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는 온라인을 헤매며 부정확한 정보를 찾는 대신 정부와 의료기관을 통해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임신기간에 따른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에 대한 정보, 부작용과 후유증 관리 등에 관한 정보, 여러 지원 시스템에 관한 정보들이 포함되어야 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의사소통과 이동에 필요한 지원도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기관, 기업, 사회복지 기관 등에서도 임신중지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고, 유급 유·사산 휴가를 보장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런 제반의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점검하기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 이제 법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까?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는 지난 2020년 말부터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만들고 제안해 왔다. 이제 임신중지와 출산 등을 각각 개별적으로만 다루거나, '모자보건' 같은 한정된 틀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성교육, 성건강, 월경,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등에 관한 건강과 권리를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장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본법이 제시하는 권리 보장의 원칙과 방향에 따라 의료법, 근로기준법 등 관계 법령도 개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비범죄화'라는 가장 중요하고 큰 길이 열려 있다. 이 길에서 누구나 자신의 건강과 권리를 보장받고, 불평등하고 울퉁불퉁한 길은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이제 낡은 뒷길은 저 멀리 남겨두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 모여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 2020년 11월에 발표한  ‘성ㆍ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해설집 표지
▲ 성ㆍ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 2020년 11월에 발표한 ‘성ㆍ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해설집 표지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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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나영씨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활동가입니다.


태그:#임신중지, #낙태죄, #입법공백, #비범죄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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