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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어린이>는 조선어 잡지였기에 한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즐겨 읽었다.
▲ 잡지 『어린이』 창간호(1923.03.20.) 잡지 <어린이>는 조선어 잡지였기에 한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즐겨 읽었다.
ⓒ 한국방정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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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소년회는 "새 조선"의 "새 살림"을 향한 "새 사람"의 "새 운동"이었다. 천도교의 종지 아래에서 지육·덕육·체육의 세 가지를 장려하며 일반 소년의 활기를 기르기 위하여 천도교 신자의 자녀가 아니라도 17세 이하의 소년(소녀)에게 입회를 허락하였다. 구체적으로 당시 회원자격은 만 7세부터 16세까지, 남녀불문, 국적 불문, 천도교사상 여부 불문이었다. 소년회는 소년의 자립 자존성을 우선으로 운영하였다. 발족 1개월 만에 회원은 320명에 달하였다.

소년회는 유락부(遊樂部), 담론부(談論部), 학습부, 위열부(慰悅部)를 만들어 강연회, 축구대회, 동화극, 가극대회, 토론회 등을 열어 지덕체를 기르는 활동을 하였다. 이는 일제가 식민교육을 통해 신민(臣民)이나 국가 공민(公民)을 양성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즉 질서와 규율적인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조직활동이었다.

그 후 조선 13도 각 지방에 있는 천도교회에서는 지방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경에는 전국에 120여 개의 지부가 설치되었다. 1929년 5월에는 천도교소년연합회는 150여 개의 단체 4만여명의 회원을 가졌고, 1930년 5월에는 전국 120여 개 단체가 가입되어 1920년대 천도교 소년운동의 조직 기반은 전국적으로 탄탄했다.

색동회 창립과 와 잡지 <어린이> 발간하다

울산지방에서는 1921년 9월 울산공보 교정에서 울산천도교소년회가 불교, 기독교소년회와 함께 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4월 30일 울산천도교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회장 허준해, 간무원(幹務員) 차덕줄 장진희, 간의원(幹議員) 김동욱 박지양, 지육부장 박지양을 개선하였다. 언양지역 천도교인은 없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울산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듯하다. 김동욱, 박지양, 차덕줄[출]은 1920년 창립된 울산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21년 6월 5일 경성 천도교소년회는 회장 구자홍, 총재 김기전을 추대하였다. 당시 방정환은 일본에 유학 중이었다. 김기전은 천도교소년회를 창시하는데 이념적인 정립과 조직적인 역할에 앞장섰다. 김기전은 어린이(소년)운동의 이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실천가였다. 천도교소년회는 범민족적 소년운동의 중심적 기관으로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어린이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불교 소년회, 기독교 소년회 등도 조직하게 되었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담당했던 김기전의 어린이 운동은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에게 이어져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소파 방정환은 조선의 아이들을 아동노동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어린이 운동을 하였다.

천도교 소년회는 천도교단 차원의 김기전의 지원, 개벽사의 후원, 그리고 방정환의 노력으로 1923년 3월 20일에 잡지 <어린이> 를 창간하였다. 소파 방정환은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는 생각에서 넘쳐 나오는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 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라고 창간호에 적었다.

잡지 <어린이>는 창간호부터 일제의 원고 검열과정에서 삭제 당하였다. 1934년 7월호로 종간되었는데, 검열로 삭제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소년회가 없는 농촌에서 소년회를 만들자. 조선인은 우수하고 건강하지만 애국심이 부족하다. 조선의 소년과 소녀는 한 마음과 한 정신으로 일치단결하자. 조선소년의 정신발달을 위해 분투하자. 소년들이 새로운 사회건설에 나서자.' 심지어 천도교 소개와 이율곡의 10만 양병설도 삭제 대상이었다.

천도교 소년회는 잡지 <어린이>를 통해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잡지 <어린이>는 저희끼리의 소식, 저희끼리의 작문, 담화 또는 동화, 동요, 소년 소설을 실어야지 수신강화와 같은 교훈담이나 수양담은 넣지 않았다. 어린이가 자유롭게 즐겁게 웃고 놀고 뛰고 노래하는 공간이었다. 이를 통해 어린이의 인권과 민족의 미래를 헤쳐 나갈 역량을 정서적으로 함양하는 데 힘썼다.

잡지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의 조선인 사회에도 유통되었다. 1925년 무렵에는 3만부의 판매 부수로 많은 어린이가 구독하여 영향을 받았다. 천도교소년회는 <개벽>과 <어린이>를 통해 어린이 운동의 이념을 창출하고, 소년운동과 소년문예운동을 확산시켰다. 한때 10만 구독자를 강조할 정도로 당시 식민지 조선 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2년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하다

1922년 4월 각 소년운동 단체, 신문사 등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 1일을 어린이날(소년일)로 정하고 그 해에 천도교소년회에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였다. 당시 5월 1일은 메이데이(국제노동절)인 동시에 어린이날이었다. 노동자의 존엄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강조한 인간존중의 날이 바로 5월 1일이었다. 1922년 5월 1일 조선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해방이 시작된 날이다.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는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이었다.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어렵게 오후 1시에 할 수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조선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 어린이날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십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는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그(천도교) 소년회원이 거리거리에서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할 터이라는 데 이러한 일은 조선소년운동의 처음이라 하겠으며 다른 사회에서도 다수히 응원하여 '조선사람의 십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더라."
 
어린이 날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순조롭지 않았다. 하지만 행사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동아일보, 1923.05.01.)
▲ 제1회 어린이날 신문보도 어린이 날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순조롭지 않았다. 하지만 행사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동아일보, 1923.05.01.)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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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소년회원들은 "어린이의 날", "소년보호", "항상 10년후의 조선을 생각하라" 등 4종의 선전 인쇄물을 배포하며, 청년회 유지들과 함께 서울 시내를 돌며 선전활동을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서울의 종로, 탑골공원, 교동, 광화문을 거쳐 노래를 부르며, 어린이날 취지를 선전하며 혁명적 운동을 시작하였다. 선전물에는 8가지 어린이를 대할 어른의 태도가 적혀있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敬語)를 쓰시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睡眠)과 운동을 충분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추어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7. 나쁜 구경을 시키기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주십시오.
8.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어린이날 행사는 나라 안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이 사는 전세계 나라에서도 행사가 열렸다. 어린이를 해방치 아니하면 모든 인간해방운동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어린이 해방은 인간해방으로, 나아가 계급해방으로 이어짐을 당시 사람들은 자각하였다. 생각의 혁명은 사회제도 변혁 운동이 일어나야 함을 또한 깨달았다. 억압된 삶의 극복은 계몽에서 시작해야한다.

1923년 제1회 전국 어린이날 행사를 하다

1922년 서울에서 보이스카우트 운동 단체인 '조선소년척후대(정성채)' 9월에, '조선소년단(조철호)가 10월에 창립되었다. 1923년 3월 반도소년부(半島少年部)가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무산계급소년의 해방을 목표로 출범하였다. 소년잡지 <반도소년>을 창간 발행하였고 주산경기, 유년축구대회, 기근구제 동서음악대회, 신춘토론회, 웅변대회, 무산아동야학 등을 하였다. 1925년 11월 창립 2주년 행사를 하고 이원규(李元珪)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1920년대 초반에 다양한 소년운동단체들이 설립되었다.

1923년 1월 초 방정환은 조선일보 대담에서 "어린아해를 잘 인도하고 해방해서 조금 자유스럽게 천진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 자녀교육에 가장 필요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1923년 5월 1일 전국적으로 제1회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1923년 4월 18일 천도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 40여 개의 소년운동단체가 모여 1922년 천도교소년회가 처음 시작한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전국규모의 행사로 확대하기 위하여 연대체인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협의회의 중심인물은 김기전, 김선, 김일선, 윤성준 등이었다. 여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기 때문이다.

1923년 4월 28일 천도교당에서 소년문제 강연회가 열렸다. 김기전의 개회사로 시작하여, 김선(金善) 여사의 '어린이의 설움', 김일선(金一善)의 '장래 행복은 별무타도(別無他道)', 유성준(兪星濬)의 '사회개조의 근원' 강연이 있었다. 이때부터 소년운동 자체가 일반의 관심을 갖게 되고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조선소년운동협회의 형성은 한국소년운동의 개화였다. 그 꽃은 어린이날 행사였다.
 
1923년 4월 28일 천도교당에서 열린 소년문제 강연회(동아일보, 1923.04.30.)
▲ 소년문제강연회 1923년 4월 28일 천도교당에서 열린 소년문제 강연회(동아일보, 1923.04.30.)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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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 행사의 표어는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로 어린이가 미래의 희망임을 강조하였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 조상적부터 아이나 어른이나 사람의 허물을 쓰고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은 우리의 골수에 박힌 원한이다. 지금에 우리 조선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가 누가 사람의 권리가 있으며 사람의 대우를 받는가 생각하면 실로 기가막히는 일이다. (…)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하였다.

천교당에서의 기념식 이후 200명의 소년이 경성 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20만 장을 배포하였다. 어린이 운동가들은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였다. 이날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 동무들에게"라는 글이 배포되었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은 1922년보다 내용이 조금 달라졌다.

◇ 어른에게 드리는 글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2.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여 자주 이야기를 하여 주시오.
3. 어린이들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4. 이발이나 목욕, 의복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5.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6. 산보와 원족(소풍) 같은 것을 가끔 가끔 시켜주시오.
7.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8.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나 기관같은 것을 지어주시오.
9.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도 당부의 글을 실었다.

◇ 어린 동무들에게
1.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듯이 보기로 합시다.
2.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산들끼리고 존대하기로 합시다.
3.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4.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와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5. 꽃이나 풀을 꺽지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6.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7.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그리고 천도교당 기념식장에서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근현대 한국소년운동의 목표이기도 하다. 윤석중은 세계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고 했다. 어린이들이 인간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하는 윤리적 압박과 궁핍을 면하기 위해 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제적 압박에 짓눌려있다고 보고 '소년해방'을 강조한 소전 김기전의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 소년운동의 기초조항
본 소년운동협회는 이 어린이날 첫 기념되는 5월 1일인 오늘에 있어 고요히 생각하고 굳이 결심한 나머지 감히 아래와 같은 세 조건의 표방을 소리쳐 전하며 이에 대한 천하 형제의 심심한 주의와 공명과 또는 협동 실행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하게 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3.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계해(癸亥)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1923년 5월에 주장한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날 서울 도심에는 소년들은 옥양목에 앞에는 붉은 글씨로, 뒤에는 녹색으로 적은 "어린이날"이라 쓴 휘장을 가슴에 걸고 선전지를 배부하였으나 경찰은 붉은 글씨가 불온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옥양목을 압수당하여 할 수 없이 학교 문턱에서 전전하기도 하였다. 어린이날 행사는 경성뿐만 아니라 대전, 안주, 공주, 창녕, 마산, 의천, 남포, 김해, 개성, 진주 등지에서 깃발 행진, 악대 행진, 나팔 불기, 어린이날 창가 부르기, 만세 삼창 등의 행사를 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는 <울산저널>에도 연재됩니다.


태그:#어린이운동, #소년운동,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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