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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에 우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현행 주52시간제를 월단위로 개편하는 등 유연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주52시간제 도입 이전 밤샘근무 등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다른 현장의 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2018년 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서울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모습(자료사진).
 2018년 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서울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모습(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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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아버지께 게임 개발자가 되겠다고 처음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노발대발 하시며 말씀하셨다.

"전자오락 만들어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겠냐?"

24년 뒤 아버지께서는 결과적으로 내 말이 맞았다며 마음을 바꾸셨지만, 아버지 말대로 '게임 노동자들의 사람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업계 과노동 바로잡는 첫 단추, 주 52시간제

일단, 게임 업계 내부의 비효율적인 개발 방식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얼마 전 익명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야집힘'이라는 단어가 밈으로 유행했었다. 이는 '야근은 집단의 힘'의 줄임말로, 한 면접 자리에서 어느 면접관이 "야근을 하지 않는 건 이기적인 마인드며 동참해야 할 덕목"이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한 것이 알려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게임 업계의 과노동 문제는 오래된 난제다. 게임 개발 업무는 동시 진행되기보단 공장 컨베이어 벨트와 같이 순차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모르는 관리자들이 종종 "일이 완료될 때까지 모두 다 남아있으라"는 비효율적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런 비효율을 그나마 바로잡은 게 '주 최대 52시간' 도입이었다. 주별 노동시간에 상한이 생긴 것이 과거 비효율적으로 일하던 프로세스를 변화시킨 한 첫 단추였다. 그런데 이 첫 단추가 풀린다면 어떻게 될까. 윤석열 정부는 '노동시간 유연화'를 강조할 게 아니라, 효율적 개발방법론을 연구하고 도입을 지원해 노동생산성을 늘릴 필요가 있다.

하나 덧붙여 게임 업계에서는 다수가 '포괄임금제(실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고 매월 일정액의 시간외 근로수당을 주는 방식)'를 채택하고 있는데, 나는 이를 폐지해야만 업계의 고질적인 과노동과 장시간 근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비효율적인 개발방법론'에 '포괄임금제'를 첨가하면, '비효율적인 공짜 야근'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떻냐고? 두 명이 일해야 할 분량을 한 명이 커버하고, 그렇게 아무리 야근해도 수입은 늘지 않는다. 야근을 많이 하니 가정·자녀 돌봄은 고사하고,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 온갖 병을 달고 산다.

노동자 잡는 장시간 노동, 해결 의지 있나
 
2020년 10월 19일 판교 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앞에서 진행된 'IT노동자, 우리가 서로의 울타리가 됩시다' 모습. '우리 같이 노조 해요' 피켓을 든 각 노조 지회장들(순서대로 서승욱 카카오지회장, 오세윤 네이버지회장, 배수찬 넥슨지회장, 차상준 스마일게이트지회장).
 2020년 10월 19일 판교 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앞에서 진행된 "IT노동자, 우리가 서로의 울타리가 됩시다" 모습. "우리 같이 노조 해요" 피켓을 든 각 노조 지회장들(순서대로 서승욱 카카오지회장, 오세윤 네이버지회장, 배수찬 넥슨지회장, 차상준 스마일게이트지회장).
ⓒ 이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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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회사가 모인 판교지역에는 이상하리만큼 정신의학과와 정형외과가 많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얘기다(실제로 엄청난 대기시간을 자랑한다). 뒤집어 말하면 게임업계의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정신적·신체적 문제가 그만큼 표면화 되어 있다는 얘기다.

2017년 게임업계 과로사 문제와 '장시간 노동'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회적 공론화도 되었지만,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당장 내 주변만 봐도 정신적 스트레스로 회사를 떠나거나 안타까운 선택을 하시는 분, 디스크 등의 근골격계 문제나 뇌출혈 등 심혈관계가 안 좋아져 회사를 떠난 분이 있다.

면역체계가 무너질 정도의 과로로 암‧백혈병에 걸린 동료 숫자까지 합치면 얼핏 따져봐도 10명을 훌쩍 넘어간다. 포괄임금제가 그대로인 한 노동자들은 쓰다가 망가지면 버려지는, 컴퓨터 부품과도 같은 취급을 당하게 된다.

이런 비인간적인 야근 환경을 바꾸려면 비효율적 과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고용노동부 발표대로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하고, 주 단위 노동시간을 월 단위 관리로 바꾼다고 달라질까?(관련 기사: 논의도 없이... 윤석열정부 노동정책 끼워넣기는 국민 '기망' http://omn.kr/1zj7k ).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시간주권'과 현장의 괴리  
 
2019년 4월, 필자가 속한 스마일게이트 첫 단체협약 조인식 모습
 2019년 4월, 필자가 속한 스마일게이트 첫 단체협약 조인식 모습
ⓒ 화섬식품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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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고용노동부의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 브리핑' 중 주52시간제 유연화와 더불어 눈길이 갔던 대목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워라밸', '시간 주권'이 중시되면서 일하고 싶을 때는 일하고, 쉬고 싶을 때는 쉴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해 달라는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란 내용이었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게임회사 인사시스템상 정부의 예상처럼 '자유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란 99% 불가능하다고 본다. 통상 게임 회사는 출퇴근 복장 등이 자유롭지만, 비밀연봉제의 직능급이 가진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있다. 가령 직능급 형태에서 객관적 평가 기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비밀이고 "연차 대비 퀄리티 낮음"이란 평가 한줄이 가능한 게 현 게임회사의 평가 시스템이다.

이런 문제는 '괴롭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해 네이버 직장 내 괴롭힘으로 벌어진 안타까운 자살 사건, 스마일게이트 내 평가를 통한 괴롭힘 문제로 국정감사에 당사자가 등장한 일이 그 예다. 이렇듯 노동연구원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경직됐다고 말하는 곳이 바로 이 게임업계 시스템이다. 안타깝게도 '자유로운'이라는 단어를 붙이긴 애매한 곳이란 이야기다. 이런 환경 속에서 윤 정부가 말하는 '시간 주권'이라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 환경을 결정하고 장시간 노동 뒤 자유롭게 휴식하기를 선택한다는 게 가능한 얘기일까?

바로 여기에서 정부의 해결 의지, 국가의 개입이 중요해진다. IT·게임 업계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해 '판교 IT 사업장 직장 내 괴롭힘 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를 꾸린 뒤 서명운동(www.itgame119.com)을 진행하고, 동시에 정부의 제대로 된 관리를 촉구해온 이유다(관련 기사: "직장내 괴롭힘 여전...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선제 조치 해야" http://omn.kr/1vo74).

'재미 만드는' 게임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부터 건강해야 한다

나는 게임 개발자로는 15년, 게임 업계에서 일한 건 총 20년 정도 되었다. 거기에 게임회사 노동조합의 지회장으로 4년을 지내오면서 느낀 게 있다. 바로 게임 노동자들은 '재미를 만드는 사람'이고, 따라서 우리의 노동 환경이 건강하고 즐거워야 그 결과물 역시 더 건강하고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개인에만 달려있지 않다. 그것을 넘어 시스템의 변화, 특히 시스템이 얼마나 문제의 본질을 관통해 법제화돼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부가, 노사 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의 목소리만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목적과 원인을 엄밀히 분석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 양측의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 연결점을 찾는 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해야할 일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 정부의 '친기업' 행보, 임금 인상을 자제하라는 경제부총리의 발언이 우려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차상준씨는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입니다.


태그:#게임업계, #윤석열, #노동정책, #과로사, #스마일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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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년간 게임디자이너로 활동 했고, 현재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지회장으로 게임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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