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퀸 크랩> 포스터

영화 <퀸 크랩> 포스터 ⓒ 주식회사 레드아이스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조금 독특한 것들도 있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특이한 영화를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특이한 게 아니라 기묘하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영화들 있지 않은가. 정말 재미없기로 유명하거나, 설정이 이상하거나… 속된 말로 못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영화들 말이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굳이 찾아본다. 물론 '그런' 영화들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비싼 디저트가 아니라 불량식품이 먹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영화 <퀸 크랩>을 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왜 제목이 하필 킹크랩도 아닌 '퀸' 크랩일까? 라는 호기심이 내 기묘한 취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줄거리도, 감독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로지 제목이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영화를 고르다니. 그러나 영화는 내 기대 이상이었다.

주인공 '멜리사'는 어린 시절 우연히 집 근처 호수에서 게 '피위'를 발견한다. 과학자인 멜리사의 아버지는 물건을 크게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고, 멜리사는 실험체로 쓰인 열매를 먹이로 주며 남몰래 피위를 키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멜리사는 피위가 모든 일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친구를 지키기 위해 피위를 죽이려는 마을 사람들에게 맞선다.
 
줄거리를 보고 이 영화가 전형적인 괴수 영화처럼 느껴졌다면… 당신은 속았다. 이 영화에는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있다. <퀸 크랩>이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뛰어난 서사와 섬세한 연출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영화는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영화는 전반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위기에 빠진 멜리사는 갑자기 텔레파시 능력을 사용해 게를 조종한다. 멜리사와 정신적으로 교감한 피위는 곧바로 위기 상황을 해치워 버린 후 그녀를 자기 등껍질에 태우고 달아난다. 이런 설정에 대한 사전 설명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멜리사는 정말로 초능력이 있는 걸까? 아니면 우정의 힘으로 피위와 정신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된 걸까? 그러나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영화를 따라잡아야 한다. 피위를 죽이려는 보안관이 전화 한 통을 걸자마자 탱크가 나타났는데 초능력이 무슨 상관인가? 곧이어 전투기 두 대까지 등장해 호수에 폭격을 날려버린다. 그 시점에서 모든 궁금증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걸 깨달았을 테니.

그럼 감독은 치밀한 구성 대신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전략을 선택했을까? <퀸 크랩>은 그렇게 쉽지 않다. 영화는 오히려 보는 사람들이 등장 인물에게 이입하는 걸 치열하게 막으려 드는 것 같다.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지만 멜리사는 슬퍼하는 기색조차 없다. 부모님의 무덤 앞에 서 있는 순간에도 오로지 애완 게 생각에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 딸이라니. 영화 내내 주인공이 신경 쓰는 것은 피위 뿐이다. 헛간만큼이나 커진 게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자신의 집으로 다가오는 주민들에겐 가차 없이 총을 쏴버린다. 정작 멜리사와 피위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은 초반 6분을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도! 주인공과 대왕 게의 우정은 오로지 설정으로만 존재한다. 우정을 증명하는 근거는 없지만, 관객은 주어진 설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할 것은 아직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CG가 최대한 현실에 있을 법한 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퀸 크랩>은 그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영화는 거대한 게를 표현하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적극적이라는 말이 곧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피위의 움직임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처럼 뚝뚝 끊기고, 등껍질 위에 앉은 멜리사는 붕 뜬 것처럼 보인다. 피위를 쓰다듬는 멜리사의 손은 허공에서 헛돌고 있음이 역력하다. 그뿐만 아니라 결말에 등장하는 전투기는 고전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거슬림을 참지 못해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감독의 목표였다면 충분히 성공했을 듯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퀸 크랩>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영화들이 더 있다. 사실 아주 많다. 이 영화들은 개성이 너무 강해서 같은 분류로 묶을 수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껏 보았던 영화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하고 기이한 설정, 터무니없는 전개 방식,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까지.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면 그 영화는 '그런' 영화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좋은 영화로 평가받기 어려운 운명을 타고난다. 혹평을 받거나 더 나아가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영화들을 찾아보는 이유는 이 작품들을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즐겁기 때문이다. 정말로.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보는 것이 즐겁다.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영화들은 보는 이의 예측을 완전히 무시한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 갈림길 사이에서 무작정 직진하는 걸 선택한다. 작중에서 멜리사를 돕는 연구원 '맥캔드릭'은 피위 구출 작전이 통할 것 같냐는 질문에 "괴물 영화들 결말 알잖아요"라고 답한다. 맞는 말이다. 이런 영화들의 결말은 뻔하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멜리사가 피위를 구해내겠지. 그러나 그 과정은 그렇지 않다. 이 세계에서 기존의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영화는 무모한 수를 거침없이 내놓으며 정형화된 틀을 깨트린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애써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무리수를 포장할 시간에 한술 더 뜬다. 멜리사의 초능력에 황당함을 느낄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탱크와 전투기를 출동시킨 것처럼.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의문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온전히 이 세계에 빠져들어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에 탄 채로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을 질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디에 도착할지도 모르면서 머뭇거리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것들이야말로 '그런'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굉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가진 대담함을 사랑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를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져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감독의 의도, 연출의 의미와 영화가 지닌 다층적인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짊어지게 된다. 다른 사람의 감상과 비교하며 느껴지지도 않았던 감정들을 지어내고, 억지로 잘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을 더듬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정들은 빠르게 휘발된다. 결국 완성된 감상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볼 때는 그렇지 않다. 이들의 세계에 몸을 맡기고 달리고 있노라면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오직 그 엉뚱함을 따라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뿐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의 끝에, 영화를 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즐거워진다.
 
"왜 그런 영화를 보는 거야?"라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뿐이다. '그런' 영화를 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퀸 크랩> 같은 조악한 괴수 영화를 굳이 시간을 써가며 보는 것이 재미있다. 영화가 무모할수록, 전개가 허무맹랑할수록 더 만족스럽다. 어이없을 만큼 엉성한 액션 장면들이 나와도 괜찮다. 혹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해도 좋다. 나는 그들의 대담한 모험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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