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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만 원'. 월급봉투에 찍힌 금액을 보고 '뿅 가서' 시작한 일이었다. 2004년에 어린이집 보조교사를 하던 김나연(익명)씨가 하루 네 시간씩 일하고 받는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학부모 하나가 보험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처음 물었을 때 만해도 보험은 남의 일이었다. 남을 설득하는 게 보통 일 같지 않아 손사래를 쳤다. 만날 때마다 권유를 받았고 번번이 거절했다.

우연히 은행 앞에서 학부모를 만난 게 나연씨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자신은 한 달에 부모님 용돈으로 150만 원을 준다고, 자기 통장 보겠냐는 말에 나연씨는 두말 않고 건물 3층에 있는 당시 보험회사 사무실로 따라 올라갔다. 통장에 찍힌 1400만 원이라는 숫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설계사 월 평균 급여는 250만 원, 사무실에서 제일 적게 받는 사람이 80만 원 받는다고 했다. 아무리 못 벌어도 보조교사 월급 60만 원보다 많았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몇 달은 '연고' 계약으로 돈을 벌었다. 서너 달 지나 '연고 다 떨어지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설계사들이 일을 가장 많이 그만두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연씨는 그만두는 대신 '개척'을 다녔다. 아침 7시부터 상가를 돌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신문 안에는 보험설계사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놓은 명함이 잘 보이게 붙여놓았다. 명함 끼운 신문을 돌린 지 몇 달 지났을까, '당신이 김나연이냐'며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일 년쯤 지나자 몇몇 상가를 빼곤 거의 계약을 맺었다. 일하는 재미가 생겼다. 계약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처음 눈이 돌아가게 만들었던 통장의 숫자가 그의 통장에도 찍혔다. 돈을 많이 벌어서 좋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은 것 같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보람이 컸다. 18년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보험 일이 좋은 건 올해 10년 차 설계사인 김채린(익명)씨도 마찬가지였다. 갤러리 카페를 운영할 때는 모르던 세상이었다. 보험에 대한 편견에 있을 때라 카페로 찾아와 보험을 해보지 않겠냐던 사람이 나간 뒤에는 소금을 뿌리기도 했던 그였다. 카페 운영이 어려워지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막상 떠오른 건 보험이었다. '다른 일보다 쉽게 벌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을 해보니 '사람을 향한 고민' 없이는 일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강과 돈 문제를 자신에게 의논한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계약서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한 사람의 삶을 컨설팅하는 일이라는 자부심과 '절벽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보람에 채린씨는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올해로 26년차 설계사 김상아(익명)씨도 처음엔 보험을 '껌으로' 봤다. '코웃음' 치며 시작한 일이었지만 고객들이 덕분에 잘 치료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숭고한' 일이라 느낀다. 자신이 꼭 필요한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상아씨를 '에이스 설계사'로 만든 힘이었다.

실적 그래프를 달리는 경주마

채린씨 하루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다. 7시까지 출근해 조조 교육을 들으며 그날의 목표를 다짐한다. 매일 9시에 시작하는 조회는 지점교육 시간으로 한 시간 정도 진행되고, 조회가 끝나면 그때부터 업무가 시작된다. 상담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객을 만난다.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만나야하기에 설계사들의 근무시간은 24시간이었다. 다만 '귀점 시간'이 있어 퇴근 전에 본사로 들어와 퇴근 보고를 해야 한다.

귀점 시간은 외근이 많은 설계사들을 '회사에서 관리하는 방법'이기도 했는데 설계사들에겐 '강제'와도 같았다. 귀점률이나 출근율은 업무평가에 영향을 주고 이는 급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귀점 시간은 회사에 들어왔다고 알리면 끝나는 게 아니라 '일한 흔적'을 제출해야 한다. 고객을 만나 일을 했다는 흔적은 '매일 개인정보동의서 하나, 가입 설계서 하나, 보장 분석 하나'로 남겼다. 지역은 모두 다르지만 나연씨와 채린씨, 상아씨 모두 귀점 시간을 지키며 매일 같은 압박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라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하면 선물을 줘. 당근이죠." (김상아)
"주로 어떤 걸 줍니까?"
"롤 팩. 행주, 식용유도 주고. 무조건 5천원 미만이에요. 그것도 매일 주지 않고요. 매일 줄 때는 천 원짜리."(김채린)
"껌 깞 줘요." (김나연)
"귀점률로 (업무)평가를 해요. 안 하면 잔소리 들어야 되니까 그냥 하죠. 왜 이런 걸 하나 싶어요. 그런데 자료를 많이 내면 또 상을 줘. 그럼 하게 되는 거죠. 작은 거라도 받으려고 회사가 하라는 대로 해요."(김상아)


실적에 대한 압박은 귀점 시간에만 있지 않다. 귀점 때 '일한 흔적'을 제출하고, 매일 조회 땐 그 흔적들이 실적 그래프로 수치화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프가 올라가면 그날의 주인공이 되어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얻고, 롤 팩 따위를 상으로 받는다. '실적으로 먹고 사는' 설계사에게 압박과 경쟁은 매달, 매일,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이다.

'오늘 고객을 만나고 계약했다고, 내일도 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늘 불안하다. 이번 달에 계약이 많아 수당을 많이 받았더라도 다음 달엔 수당이 없을 수도 있다. 실적 그래프를 볼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다. 그런 불안감은 실적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회사는 설계사들이 갖는 집착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계약을 닦달하는 관리자 문자와 제출 서류의 두께, 매일 열리는 시상식과 '껌값'도 안 되는 선물까지 모든 게 설계사들에겐 실적 압박으로 연결된다. 관리자의 매일같은 '실적 타령'과 찌푸린 미간으로도 가슴이 죄어오는 듯 무거워진다. 결국엔 스스로 압박하게 되고, 그 무게는 고스란히 '자기 계약'으로 이어진다.

압박은 주말, 월말 마감 때가 되면 극에 달한다. 회사는 전국 1등부터 등수를 매기고 설계사의 위치를 시도 때도 없이 확인시켜주는데, 실적이 낮으면 '박살난다'고 할 만큼 압박이 심해진다. 지점장은 빨리 평균 실적을 내라고 조건을 걸며 설계사를 뒤흔든다. 그럼 설계사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무리를 해서 계약을 따내고' 신입 설계사를 데려온다. 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고객 대신 설계사가 보험료를 대납하기도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결국 '내 돈 집어넣어서 계약'을 하고 실적을 채운다. 자기 계약은 설계사에겐 흔한 일이다. 지점 전체 계약 건수를 맞추기 위해, 또는 '조금만 더 채우면 1등이니까', 때로는 '지점장 승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자기 계약이 필요한 순간은 너무 많다.

"급하면 어떡해요? 우리 계약 꼬라박는 거지. 자기 계약도 매달 쌓이면 돈이 커져요. 보험회사 들어가서 빚졌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지점장은 손해가 나지 않게 해준다고 하는데, 결국은 손해예요. 영업은 매달 오니까."

설계사들은 실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빼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하라는 건 다 했다. 계약해오라면 다 해왔고 신입 데려오라면 어떻게든 데려왔다. 마구잡이 영업에 사람들이 보험설계사를 향해 던지는 부정적인 말들을 상아씨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실적을 위해서 내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돈이 나왔으니까. 돈 많이 번다는 말에도 할 말이 많다. 실적만큼 버는 게 위촉직이라지만, 실은 돈을 쓰는 만큼 버는 게 설계사의 월급이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우리만 아는' 위촉계약직의 세계였다. 그렇게 일해도 실적이 없는 설계사가 되면 '자리 빼라'는 말밖에 듣지 못한다. '사채 구렁텅이에 들어간 것 같다'는 상아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연씨가 말을 이어 받았다.

"왜 설계사를 황금알 낳는 거위라 하잖아요. 황금알 욕심나면 그 배를 가르는데, 황금알 낳는 거위는 많거든. 배를 갈라서 황금알 빼먹고 버려. 새로 데려오면 되니까. 보험사는 신입사원 뽑을 때 채용공고 안 내요. 다 설계사 통해서 뽑아. 한 명 데려오면 그 가족, 친지들 보험은 다 빼먹을 수 있으니까. 모르는 사람은 우리더러 월급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걸 우리만 아는 거예요."
 

롤 팩이 당근이라면 채찍은 수수료 환수였다
 
설계사들은 실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빼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하라는 건 다 했다.
 설계사들은 실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리를 빼지 않고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하라는 건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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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사에게 실적 경쟁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경쟁과 압박 덕분에 자기 관리를 잘하게 되는 것 같아 성공의 비결처럼 느껴졌다. 자기 계약도 가족들을 위한 거라 스스로 위안하면서 에이스 설계사가 겪는 고충으로 여겼다. 관리자의 끊임없는 압박과 무리한 요구를 늘 그러려니 했던 이유다. '아들뻘' 되는 관리자의 칭찬과 채찍질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실적이라는 명분이 컸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었던 게 아니다. 황금알을 빼앗기는 것 같고 배가 갈리는 것 같을 때마다 '우리는 정규직과 태생부터 다르다'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본사 복지 가운데 하나였던 일주일에 한 번 단축 근무하는 '가정의 날'은 정규직에게만 주어졌다. 퇴근하지 못한 설계사들은 사무실에 앉아 먼저 퇴근하는 관리자에게 웃으며 인사해야 했다. 차별이 일상에, 억울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초기, 마스크 대란이 있을 때 회사는 직원들에게 마스크를 제공했다. 관리자들은 재택근무로 사무실에 한 명씩만 출근하던 때였다. 설계사들은 '재택이라는 말이 없어' 매일 출근했다. 같은 건물로 들어가도 마스크는 정규직만 받을 수 있었다. 설계사들은 마스크 대신 '실적 해오라'는 재촉을 받았다. 마스크 한 장 못 받는다는 사실에 괴로웠지만 '정규직은 다른 게 있겠지, 우리보다 더 잘하겠지.' 되뇌며 억울함을 삼켰다. 참고 버티는 게 일상이던 설계사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건 수수료 환수였다.

설계사들이 상품을 판매하고 계약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보험계약 유지율이다. 유지율은 보험을 중간에 해지하지 않고 일정 기간 계약을 유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보험상품을 계약하는 과정에서 자필서명과 약관 교부 등 반드시 지켜야하는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완전판매가 되지 않거나 관리가 부실해 소비자가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면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에 유지율은 설계사의 고객관리지표이며 보험사의 영업지표이기도 하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고객과의 신뢰가 유지율로 평가받기 때문에 설계사들에게는 유지율을 지키는 게 매우,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유지율은 월급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지율이 97% 이상이면 가산이 붙고, 반대로 85% 이하가 되면 월급의 10%를 차감한다. 설계사들이 종종 계약을 거절하면서까지 유지율을 지키려는 이유다. '본사가 손해나지 않게 안전장치를 만든 것'에 설계사들은 '어마어마하게 불만이 많다'며 나연씨는 외우고 다니는 계약서 내용을 읊으며 손가락으로 찌르듯 천장을 가리켰다.

"우리 회사 위촉 계약서 9조 6항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이미 지급된 수수료는 정당한 사유 없이 환수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다 환수해요. 그렇다고 해약 환급금을 고객한테 다 주는 것도 아니야. 해약하면 고객은 손해 보죠. 고객한테도 떼고 우리한테도 떼는 거야. 그래서 보험회사 빌딩이 올라간 거지."

설계사들의 불만은 수수료 환수 자체가 아니다. 고객이 설계사에 만족하지 못해 계약을 해지한 경우라면 수수료를 환수해도 별 할 말이 없다. 문제는 설계사 잘못이 아닌데도 설계사가 책임져야하는데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계약 이후 2년이 되지 않아 고객이 병에 걸리면 보장 내용에 따라 많게는 몇 천만 원 진단비에, 보험료 납입이 면제된다. 그럼 회사는 보험료를 2년 이상 납부하지 않았으므로 불완전 판매로 보고 수수료를 환수해 간다. 설계사와 계약한 보험 내용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콜센터 실수로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환수당하는 건 설계사쪽이다. 환수도 모자라 신뢰로 먹고 사는 설계사는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까지 달아야 한다.

'우리 회사만 그러는 게 아니'니까 설계사들은 불만들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내가 25년 동안 뭐하고 살았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이 생겼다. 자신이 '딱 쓰고 버리는 도구'라는 확신이 든 건 상아씨만이 아니었다. 차곡차곡 쌓인 불만이 터진 건 2021년 1월 2일, 새해 첫 출근날이었다.

* 다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싸우는 노동자 기록팀, 싸람'에 몸담고 있습니다.


태그:#보험설계사, #위촉계약직, #노동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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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일로 밥벌이하며 르포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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